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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07. 2023

가끔은 글로 말을 걸어봅니다

부부싸움 그 후

결혼 17년 차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다만 수년 전, 대규모 전투는 서로에게 출혈과 상처만 남긴다는 사실을 절감한 후에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싸움의 발단도 대폭 필터링되었다. 이제 나는 남편이 늦잠을 잔다며 타박하거나 침구를 정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이불을 갤뿐이다. 남편 또한 내가 음식을 먹다가 접시 밖으로 흘려도 그러려니 한다. 대신 조용히 식탁을 닦아준다. 백번 말해도 못 고치는 건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나만 피곤해지는 것이다. 나도 본의 아니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보완해 줄 수 있는 일은 후딱 해줘 버린다. 깔끔히 포기해 버리면 속이 부글부글할 원인은 사라진다.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으니 싸울 일이 줄어든다.


그러나 좀처럼 걸러지지 않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둘만의 화합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원가족 문제가 그렇다.


나는 시어머니의 부탁이 부담된다고 말했지만, 남편은 자식이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반박했다. 나는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사촌 언니에게 신경을 써주고 싶어 했으나 남편은 오버하는 것 같다며 불만을 표했다. 이처럼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부담이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진대, 팔이 안으로 굽어버리는 원가족에 대한 문제일 경우 도통 양보가 없다.



예전 같았으면 3박 4일 동안 싸웠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는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그를 쫓아다니며 따져 물은 적도 많다. 하지만 남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다툼 후에는 오히려 템포를 늦추는 타입인 거다.


나 혼자 조급해봤자 얻을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성급하게 해결하려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기장 적기 시작했다. 남편의 마음까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 그대로 씨부려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때로는 화가 나는 원인이 나의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도 했다. 3박 4일을 싸우는 대신 3박 4일 동안 일기장을 붙잡았더니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글쓰기의 힘은 대단했다.


이번에도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한치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여유는 없어 보였다. 그나마 처음에는 이성적이던 태도가 말을 하면할 수록 감정적으로 변해갔다. 서로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러다 문제 해결은커녕, 답 없는 나쁜 년 나쁜 놈으로 끝날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닫았다.



최근 들어 브런치에 남편 이야기를 연재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프라이버시가 드러나는 것이 조심스러워 망설였으나, 이는 진솔한 에세이를 쓰고 싶은 나에게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솔직한 내 이야기를 해보기로 결심한 김에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만 나열하지는 않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우아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지구상 어딘가 존재는 하겠지만 내 삶의 테두리 안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좋은 면만 쓰는 건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래서 공개 글을 썼다. 부부는 사랑을 맹세하면서 평생 기브 앤 테이크할 것 또한 맹세해야 한다고.


사실 그 이야기는 나에게 던진 메시지이자, 남편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읽어주신 모든 분 감사합니다).

 

부부 사이에 일방적인 희생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내가 받은 만큼 나도 해줘야 한다는 비즈니즈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글로써 진짜 속 마음을 보여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글을 통한 대화 시도는 적중했다(남편은 꼬박꼬박 내 브런치 글을 읽는다). 그는 어머니의 부탁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의무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오히려 부탁을 들어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처럼 죽일 듯이 달려들어도 물은 결코 둘로 쪼개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하나의 줄기를 이루어 흐를 뿐이다.


글로 대화를 시도한 덕분에 칼로 물을 베어내겠다는 헛짓거리 없이 전쟁을 멈추었다. 칼 끝으로 서로의 마음을 겨누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어 다행이다. 역시 펜의 힘은 칼보다 강할 수 있구나! 인생 1회차, 여전히 미숙하지만 조금씩 지혜가 쌓여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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