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할 땐 아담하고 다붓한 술집으로 향한다. 조금 어둑어둑한 선술집 분위기나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구조라면 상대방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조명이 밝은 치킨집이나 왁자지껄한 호프집은 사양한다. 스크린이 있는 술집도 피하는 게 좋다. 예쁜 아이돌이 나오거나 센스 만점의 자막이 달리는 예능 프로가 나오면 아무래도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니까.
"나 자격증 준비했잖아. 근데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공부가 힘들어서? 아니면 시간이 안되어서?"
늘 그렇듯 상담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으로 시작된다.
"공부는 나쁘지 않은데 시간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올해는 경험 삼아해 보고, 내년에 본격적으로 하면 어때?"
"게다가나중에 직업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면, 음.. 가슴이 답답하달까?"
"그럼 왜 공부 시작했는데?"
"미래를 위해서?"
"아오 답답하네. 그럼 그 공부 안 하면 되잖아."
"근데 뭔가 준비해놓지 않으면 너무 불안할 것 같아."
"아이고, 우리 여사님 단골 멘트 또 나왔네 걱정, 불안, 염려 3단 콤보."
남편은 소주를 원샷하고는 간명하게 결론을 내버린다.
"작년에 회사를 왜 그만두었는지 다시 떠올려봐.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싶지 많아서 멈춘 거잖아. 그 대신 조금 불안정해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서? 게다가 내키지도 않는데 꾸역꾸역 하는 건, 이 또한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거 아닐까? 잘 생각해 봐."
역시 상담의 끝은 날카롭다. 그는 나를 달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우쭈쭈 해줘 봤자 결정하지 못하고 머리나 쥐어뜯고 있을 것이 뻔다하는 걸 어찌 저리 잘 아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남편의 뼈 때리는 직언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 우유부단한 데다 이리저리 재고 따져보는 성격의 나에게 있어 세심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은 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이렇게 묵직하고 단순한 질문을 툭 던져주면 그 순간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지지만, 결국은 말끔하게 씻긴다. 마치 마법처럼.
중요한 기로에 설 때마다 남편에게 상담을 요청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맘 카페 익명 게시판을 이용하거나, 친한 친구에게 불쑥 전화해 고민을 털어놓는 패턴이었다.
사실 남편과는 상담은커녕 서로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단둘이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 시작한 건 3, 4년 전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나서부터다. 둘 다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한 집에 사는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스치듯 만난 날도 많았다. 남편은 늘 먼저 출근했고, 퇴근은 늦는 편이었다. 어쩌다 일찍 오는 날이라 해도 함께 저녁을 먹고는 방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하거나 야구를 봤다. 주말에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빴고, 가끔 외식을 하더라도 먹는 것에 집중했을 뿐 대화는 길게 가지 않았다.
남편이 퇴사 후 자영업을 시작한 무렵은 마침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독립성을 갖기 시작한 데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외부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워지는 시기였다. 남편은 팬데믹의 영향으로 평일엔 혼자서 가게를 지켰으니 시시껄렁한 대화조차 할 상대가 없었고, 나 역시 재택근무에 들어가면서 타인과의 대화라고는 업무 상 메신저가 다였다. 하루 종일 입도 뻥끗 안 하고 지냈더니 입술이 딱 붙어서 얼굴 근육까지 굳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밤에 귀가하는 남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남편 역시 술 한잔 기울이며 대화할 사람이 있다며 좋아했다.
우리는 외롭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대화에필사적이었다. 자영업 햇병아리인 남편은 판타스틱 좌충우돌 스토리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나는 이 망할 놈의 회사 이야기를 모조리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잘 통하는 사이었던가? 언제부터인가 술자리는 1차에서 끝나지 않았고, 12시가 넘어서까지 조잘대는 날들이 많아졌다. 굳이 맘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으며 친구들과는 가끔 안부를 묻는 전화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아무리 바쁘더라도 대화의 시간은 일과 중 단연 1순위가 되었다. 근데 따지고 보면 그다지 바쁜 것도 아니다.
나는 단시간 근로자에 사이드잡을 하고 사부작 거리는 취미들을 갖고 있지만, 드라마나 예능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SNS도 하지 않으며 친구들과의 연락도 가끔 전화로만 하기에 바깥세상 소식에 그다지 소모되지 않는 편이다. 집안일은 반짝반짝 빛나게 하느라 애를 쓰기보다는 적당히 깔끔하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하고 산다.
남편은 10분 거리의 가게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의 반복으로, 짬이 날 때마다 스포츠를 시청하고, 웹툰 또는 유튜브를 본다. 온라인 활동은 거의 없으며, 오프라인 약속만 가끔 있다.
단순 생활자라는 공통점은 일방적인 희생이나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저녁 이후의 시간을 비워둘 수 있는 비결이 되었다.
남편은 직장인이 아니고 나 또한 재택근무를 하기에 아침 시간도 느긋하여 밤 늦게까지 대화를 해도 전혀 부담이 없다.매일 얼굴을 맞대고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고 살까 싶지만, 대화를 많이 할수록 소재는 복리로 늘어나는 느낌이다. 가족 이야기는 물론 일상 속의 사소한 깨달음에서 좋아하는 운동선수 이야기, 새로 생긴 음식점 소식, 편의점에 들어온 신상 리뷰에 이르기까지 말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차곡차곡 쌓여가는 대화의 시간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이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명사로만 말해도 콩떡같이 반응한다. 상대방의 직설적인 행동이나 말에도 쉽게 상처받지 않으며, 혹여 불편할 경우에는 솔직하게 바로 마음을 표현한다. 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이끌어내려는 것이 아닌,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나의 기분을 왜곡 없이 전달하여 더 잘 알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지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 궁금해진다. 상담 요청이 들어오면 성심성의껏 응해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난 네가 여전히 궁금해."
백번 천 번 사랑한다는 말보다, 이 말에 더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화의 마법이 일어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