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오빠도 아닌 공기 반 소리 반의 비음을 섞어 "오퐝~"이라고 불러주는 그녀를위해서라면 이 한 몸 가루가 되도록 충성을 바치고 싶었단다. 그런데 하필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하는 바람에 소원 성취는 다음생으로 미루어졌고, 나는 태생적 한계로 그의 충성을 받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가끔 장난스레 "오퐝~"을 해보지만 12일이나 먼저 태어난 누나가 하면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나 역시 친구들이제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한 적은 있다. 덤벙거리고 실수해도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오빠 한마디만 하면, 오빠가 무장해제된 미소를 지으며 등을 토닥토닥해 주려나. 밥 하기도 귀찮고 설거지도 지겨울 때 애교 섞인 오빠 한마디면 "우리 ㅇㅇ 이 오늘은 편히 있어. 오빠가 다 해줄게."라며 머리를 쓸어주려나.
연상의 남편은 만나본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여전히 오빠라는 존재는 환상 속의 왕자님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부부는동창이라는 근원적 뿌리로 인해"오빠"와 "우리 OO이"라는 호칭을 쓸 수 없는 운명이었다.
결혼 전 남편 외갓집에 인사드리러 간 날, 평소대로 서로를 "너"라고 불렀다.그렇게 몇 번의 "너"가 오간 후에, 당시 팔순이셨던 외할머니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곧 결혼할 사이인데 "너"가 뭐냐며 호통을 치셨다.
'어머나, 너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건가 봐.' 순간,얼음처럼 굳어버려 가까스로 눈빛으로나마모스 부호를 보냈다. 어른들 앞에서는 너라는 호칭을 자제하자는 신호였다.
할머니의 야자 금지령 이후, 결혼 후에는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었지만, 이름을 부르다 보면 너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딸려 나왔다.
자기야도 싫었다. 당장은 귀엽고 사랑스러울는지 몰라도 백발의 나이에도 자기 자기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여보 당신은 더 싫었다. 일단 입이 떨어지지 않는 데다 신혼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 20년 차쯤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기때문이다.
둘만 있을 땐 여전히 너라 불렀지만, 특히 양가 어른을 포함한 제삼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굳이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할 말이 있을 땐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신혼 초에 유난히도 싸웠다. 뭐가 그리 꼴 보기 싫은지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를 했고, 뭐가 그리 미웠는지 상처 주는 말들을 툭툭 내뱉었다.
그 대화 안에는 늘 "너"란 단어가있었고 때로는 "야"가 되기도 했다. "너"와"야"는 무시하는 말투, 과격한 언어, 경멸하는 표현 등 그야말로 막 나가자는 모든 요소들을 품고 있었다.
이대로 살다가는 너와 야가 놈과 년이 될지도 몰랐다. 이제라도 호칭정리를 하자 싶었다.
여보 당신은 아직 부담스러우니,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로 합의했다. 단, 친구처럼 "누구야"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들어 있는 표현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ㅇㅇ씨는 어때?"
"좋은데? 특별해 보이기도 하고."
ㅇㅇ씨라고 부르는 건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게다가말씨가 절로 부드러워지면서 너라고 할 때보다 귀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자연스럽게 "~요" 체의 서술어가 붙기도 하니 존중감은 한층 더 높아졌다.
우리는 앞으로 싸우더라고 절대로 야, 자를 쓰지 않겠다는 불문율을 세웠다. 다투다가 나도 모르게 너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면, "지금 나한테 너라고 불렀어?"라며 옐로카드를 꺼낸다. 어떤 효력도 없는 경고지만 너라고 부르는 순간 막말의 시작임을 알기에 화가 난 상태라 해도, "미안해."라며 정중히 사과한다. 싸움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부부 사이의 본질을 잊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호칭을 통해 존중감이라는 마지노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선을 지키는 것이다.
이제야 할머니가 호랑이 얼굴로 너라고 부르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던 의미를 알 것 같다.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평생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다만 작은 소망은 있다. 비록 오빠라 부르진 못하더라도 평생 다정하고 정중하게 그대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나에게도 충성해 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