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밥을 먹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은 적이 있다. 아빠의 첫사랑이 왜 뜬금없이 궁금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가밥을 오물오물 씹으며 지나가는 말로 질문할 만큼 가볍지는 않은 주제라고 생각했다. 아이 입장에서야 아니면 말고였겠지만, 나에게는 늘 신경쓰이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가 첫사랑이 아닐까 봐"가 아닌, "내가 첫사랑 일까 봐"였다.
남편은 늘 내가 첫사랑이라고 말해왔다. 연애 시절부터 여자 마음도 몰라준다며 토라질 때면, "네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래."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나는 늘 그의 손바닥 안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진짜 처음인가 싶어 막상 하나하나 가르쳐주려 들면 "다 알아서 하니까 잔소리 좀 하지 말아 줄래?"라며 태도가 돌변했다.
언제는 또 모른다면서?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안다는 건 경험이 있다는 이야기일진대, 내가 처음이라는 말만 반복하니 어디에서 알아낸 건지 당최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책에서 배운 것도 아니었을 테다. 살면서 그가 책을 쥐고 있는 순간을 꼽자면손가락이 남아돌 정도니까. 종종 웹툰이나 만화책을 보곤 하지만, 그 장르는 결코 로맨스가 아니다. (참고로, 남편은 열혈강호 마니아임)
그래서 나는 "아마도 그의 첫사랑은 내가 아닐 것이다."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버렸다.
때론,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그에게 묻곤 했다.
"진짜 내가 첫사랑이 맞아?"
솔직히 나는 첫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23년 동안 좋아했던 여자 한 명 없다는 것이 오히려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남고 출신인 데다 군대 기간도 감안해야 하지만, 파릇파릇한 스물 언저리, 별과 같이 빛나던 그 시절에 설레는 마음 한 번 갖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아닐 수 없다.
게다가 남편이 나에게 "너는 내가 첫사랑이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나에게도 한없이 맑고 투명해서 가슴마저 시린 시절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몇 번을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네가 첫사랑이야."였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으니 더 힘이 빠진다.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는 사람이 내가 첫사랑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첫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심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기에, 심화 문제로 넘어가 보았다.
"그럼 첫 키스도 나야?"
"응. 당연하지."
그 순간 나는 눈치를 채 버렸다. 남편의 어조는 당당했으나, 눈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고 코는 벌름거렸으며 보조개는 어색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이 100% 진심이 아닐 때, 그의 말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때 나오는 버릇이다. 아마도 본인은 평생 모를 테지만.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와 첫 키스를 했을 수도 있다는 데이터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꼬리는 꼬리를 물고 심연으로 들어간다. 이왕 첫사랑이었다면 첫 키스도 나였어야 하는 거 아니야?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결론은커녕 더 찝찝한 결과만 남았다. 괜히 물어봤다.
우리가 만나기 전 그가 있었던 세계는 내게 보이지 않는 암흑과 같다.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이다. 그 컴컴한 곳에서 나는 무얼 찾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 애당초 찾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죄를 짓거나 남에게 큰 피해를 주고 산 것만 아니라면나름의 가치로운 삶을 살아온 것일 테고, 그 안에서 누구를 만났던 무슨 일이 있었던, 고스란히 그의 인생인 것 아닐까? 알 수도 없는 그의 과거에 불쑥 끼어든 건 나였다. 훼방꾼이 된 기분이 들어서 더 찝찝해졌다. 홀가분해지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그의 말을 믿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