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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22. 2023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지

사색의 시간

계절을 많이 타는 타입이다. 특히 이 맘 때면 마음이 한없이 차가워지는 탓에 자꾸만 몸에 뭐라도 휘감고 싶어 진다.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고 싶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린다.


남편과 냉랭해지는 시기도 딱 이 때다. 아마도 식어버린 마음이 시베리아 바람의 불씨를 당기기 때문일 거다. 차고 건조한 바람은 평소와 다름없는 농담에도 마음을 쩍쩍 갈라놓는다. 화해의 손길이 다가와도 외면하고 만다. 못 이긴 척 손을 잡는다면 마음도 따뜻해질 텐데. 미련하게도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 혼자만의 동굴로 기어 들어간다. 굳이 말이다.


남들은 단풍을 찾아 나사며 오색찬란한 자연의 절정을 만끽할 때, 나는 이불속으로 침잠한다. 온 세상에 붉게 물든 지금이 가장 아름다울 때라며 칭송하는 이들과 달리, 내 마음은 이미 한 계절 앞서 있다. 곧 갈색으로 멍들어 이내 툭 떨어질 낙엽을 보기 두려워 눈을 감아 버린다. 그 쓸쓸함과 허무함이 싫어서 차라리 먼저 겨울이 된다.


짙은 가을의 멋을 모르는, 아직은 아량이 부족해 자연의 순리가 야속하기만 한 마흔 언저리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 꺼려지는 마음 탓이었는지, 아니면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계절에는 유난히 건강이 안 좋아졌던 기억이 많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거나, 입에 침이 한가득 고이는 증상이 생겼던 무렵도 딱 이 시즌이었다. 번아웃이 왔던 때도, 무기력에 빠지거나 자책감에 시달리던 시기 역시 그랬다. 그래서 이 계절이 싫어졌다. 매년 어김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늘 혼자서 버텨왔다. 애써서 품을 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아니지만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라 해도 완벽한 타인이다. 그에게 가벼운 감기가 나에겐 독감일 수 있고, 그에게 코웃음 거리가 나에겐 심각한 고민일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극복하는 방법도 조금씩 터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귀찮아도 일단 나가야 한다. 마음의 위로를 받는 곳을 찾아 사색의 길을 떠나본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부쩍 차가워졌고 손끝마저 시렸지만 햇살만은 여전히 포근하다. 바람이 차가운 만큼 부서지는 햇살은 더없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어느새 등뒤에 땀이 송골송골 차 오르는 건 이 위대한 가을 햇살 덕분이다. 딱 이맘때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다. 귀하다.


평소보다 느릿느릿 페달을 밟아본다.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갈 땐 몰랐던 것들을 오감으로 주워 담는다. 하늘이 유난히 파란 날,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햇살을 머금은 나뭇잎은 여전히 반들반들한 윤기를 자랑한다. 지나가는 강아지와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를 지어본다. 꽃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자전거는 도서관으로 향한. 평소 눈여겨두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본다. 도서관에 앉을자리가 없어서(역시, 독서의 계절이라 사람이 많은 건가?) 느긋하게 볼 수 있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지만 책장 앞에 짝다리로 서서  읽는 맛도 근사하다. 책에 둘러 싸여 있으니 종이 향이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가벼운 삶에 관한 책 2권을 빌려왔다.


일본 영화 '안경'의 주인공들은 매일 같이 사색을 한다. 눈앞의 풍광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대로 생각해 버리는 것, 자연의 흐름에 따라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 때로는 아무 생각 없는 것 모두 사색이 된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즐겁고 행복하고 애잔하고 서글픈 감정 또한 사색의 일부일 것이다. 사색에 몰입하다 보면 상념과 잡념은 없어지고 힐링의 기쁨만 남는다. 그 기쁨은 차가운 마음에도 따뜻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렬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 컷

평생을 남편과 2인조로 살아가고 있지만, 각자의 삶의 리듬은 다를 수 있다. 외적 갈등 없이도 감정이 바닥으로 내려간다는 건 불안감이나 허무감 등 내 안에서 빚어진 균열의 결과다. 갈라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건 나 자신 밖에 없다. 진정한 나와 만나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사색은 내면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스스로 평정을 찾는다면 다시 단단한 독립체로 돌아올 수 있다. 배우자에게 말로 상처를 주거나 감정을 전가하지 않고도 건강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있음을 통해 진정 자신을 알게 된다
-쇼펜 하우어

덧) 때 마침 주민센터 주최의 마을축제가 열렸다. 미술 교실 선생님의 권유로 그림을 하나 제출했는데 고수님들 옆에 초라하나마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시되는 기쁨을 누렸다(자격은 따로 없고 누구나 내면 다 받아주는 듯함). 급히 제출한 탓에 볼품없는 다이소 액자에 끼워진 녀석이지만, 덕분에 이 계절에 좋은 기억이 하나 생겼다. 다른 작가님들의 그림을 보며 힐링한 후, 잠시 내 그림 앞에 멈춰 서서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공교롭게도 그림의 제목은 '사색을 노 젓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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