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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26. 2023

그날, 부부는 전우가 되었다

도원결의

저녁 6시 무렵 남편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


휴무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그는 "네? 뭐라고요?"라는 외침과 함께 아메바처럼 늘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IC 망했어!"라는 남편의 절규에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망했다는 말은 '짜증 나', '열받아'와는 또 다른 의미의 불행이었다. 감정이 아닌 사고에 기반한 절망인 것이다. 이 사고(思考)는 곧 사고(事故)를 의미했다.


급하게 옷을 입고 남편을 따라나섰다.


 

남편이 운영하는 만화카페 현관문을 열자, 이미 절망은 차오르다 못해 흘러넘쳐 버린 상태였다. 매장 안에 들어찬 물은 갈지자를 이루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앞뒤가 뚫린 슬리퍼가 단박에 젖었다. 발가락 사이로 물이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나이키 슬리퍼를 오물인지 똥물인지 모를 이것에 적실 수는 없었다. 신발부터 갈아신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발 걱정부터 하다니. 한심하면서도 참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쓰레받기와 대야, 양동이를 들고 와서 물을 퍼다 날랐다. 다행히 더 이상 물이 새고 있는 상황은 아닌 듯했지만, 원인 찾기에 앞서 일단은 홍수에 가까운 물난리부터 해결해야 했다. 물이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내가 움직여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무아지경의 물 퍼 나르기는 계속되었다. 쓰레받기를 이용해 물을 퍼올렸다. 쓰레받기 아랫부분이 바닥이랑 밀착되어 물이 새지 않고 의도한 대로 착착 담겼다. 그 와중에 남편이 쓰레받기는 제대로 된 놈을 사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시간 정도 지나 조금씩 물기 없는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남편은 원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바로 원인을 규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같은 층 매장들을 일일이 둘러보았지만, 물이 샌 곳은 남편 가게가 유일했다.


남편은 피해 상황이 걱정된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매장 안 두어 곳에는 양동이가 받쳐져 있었고, 출입문에는 "오늘, 개인 사정으로 휴무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시 2라운드를 시작했다. 남편은 화장실에 들락거리며 대걸레를 계속 빨아다가 남아 있는 물을 흡수시켰다. 그 사이 나는 보관 중이던 10개들이 행주 포장을 뜯어 손으로 바닥을 닦았다. 구조물 사이로 들어간 물은 마른행주나 키친타월을 이용해 삼투압 현상으로 빼냈다.


몇 시간을 웅크리고 앉아서 물을 퍼내고 닦아냈기 때문인지 팔다리도 쑤시고 다리도 아팠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기로 했다.


그때 아래층 매장 여사장과 그녀의 친정어머니로 보이는 초로의 여인이 씩씩거리며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들은 눈에는 쌍심지가 켜졌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감정이 치밀어 오르다 못해 눈물을 쏟기를 반복했다. 말끝마다 모든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실랑이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 역시 피해자 쪽에 가까웠기에 옥신각신해 봤자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될 것이 뻔했다. 매장 안 그 어디에도 물길이 치솟은 흔적이 없다는 점과 더 이상 새고 있는 곳 또한 없었다는 점은 원인이 외부에 있을 가능성에 대한 단서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필요한 건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왜 이러세요?"가 아닌 명확한 책임 소재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다 이해하지만 객관적인 원인은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규명 후 연락을 드리겠다"라고 다독이듯 말하며 여인들을 돌려보냈다. 남편과 나의 말투와 태도, 눈빛은 절대 이 사람들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놀랍도록 차분했다. 사전에 전략이나 작전을 짠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우리는 각자 의자에 앉아서 차분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가 뭘까? 하고 말하면 그는 뭐지?라고 대답했다. 질문이 곧 대답이고 대답이 곧 질문이 되는 답답한 상황이 10분가량 이어졌다. 이대로 피해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아! 느낌이 왔다.


"나, 알 것 같아!"


동시에 유레카를 외쳤다.


남편은 곧장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오늘 정전이 있었나요?"

그즈음 간혹 일부 매장에서 정전 사태가 터지곤 했기에 이 부분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돌발적인 정전은 아니고, 변압기 교체로 강제 정전이 있었어요."

남편과 나는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매장에 물이 샌 원인을 알 것 같아요. 이쪽으로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날 변압기 교체는 사전 예고 없이 갑자기 이루어졌고, 마침 남편 매장은 휴무일이었다. 모터 방식으로 돌아가는 싱크대 하단의 하수 시설은 전기가 멈추자 작동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싱크대 옆에 위치한 제빙기의 온도 유지가 안되어 얼음들이 녹게 되었는데 싱크대와 연결된 호수를 타고 물은 계속 하수 시설로 차올랐고 모터 펌핑이 안되니 흘러넘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CCTV를 확인해 보니, 물이 새기 시작한 시각 역시 정전에 들어간 이후였다.


관리실 측에서는 바로 수긍을 했고, 보험 처리가 가능하다며 아래층 역시 보험으로 해결할 테니 걱정 마시라 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올라온 아래층 여인들은 소장님의 설명을 듣고도 우리 때문에 인테리어가 엉망되고 장사도 망쳤다며 울분을 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까 원인 찾을 때 말이야. 어떻게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한 거지? 신기하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자영업자 3년이면 대충 각이 나오는 거지. 메커니즘은 뻔하니까."


"그나저나 우리 아까 물 퍼 나를 때 진짜 일사불란하지 않았어?"

"응, 마저. 사단장님이 오시는 날도 아닌데 엄청 각 잡고 필사적으로 했지."


그날 밤, 우리는 앞으로 다시는 아래층 매장에 디저트를 사러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비록 복숭아나무 아래는 아니었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한 유비, 관우, 장비처럼 비장했다.


친구에서 남편을 넘어 전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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