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직장을 그만두기에 앞서 1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계획하고 실천하며 충분한 연습 기간을 거쳤기 때문이다.
퇴사 다음 날, 전날 과음한 탓에 묵직한 숙취는 있었으나 몸에 배어있는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좋아, 앞으로도 쭉 이렇게 매일 성취하는 경험을 쌓는 거야!
이따금 지인이나 친구들이 퇴사 후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물어오면 글 쓰고, 책 읽고, 요가하고 그림을 그린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삶은 아닐지라도, 하루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채워나가다 보면 충만한 일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매일 성취하는 삶을 토대로 작은 목표들도 생겼다. 경험 삼아 새로운 직업에도 도전했으며 흥미로운 분야에 대한 자격증 취득으로도 이어졌다.
나의 첫 백수 생활은 스스로를 컨트롤하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최근 시작된 두 번째 백수 생활을 앞두고는 별 다른 훈련을 하지 않았다. 한번 경험해 본 터라 언제든 알찬 시간표를 꾸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사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책을 펴고 일기를 쓰는 모습은 없었다.
내 의지력이 이 정도였다니 조금 놀라긴 했지만 스스로를 책망하기보다는 첫날은 피로가 누적되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다독여보았다. 내일은 기필코 벌떡 일어나 아침 루틴을 시작하자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일주일 가까이 되도록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가까스로 밥을 챙겨 먹고 겨우겨우 집안일을 해내며 틈만 나면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정신을 차릴 겸 스케치북을 열거나 일기장을 펼치며 시스템 안에 스스로를 욱여넣어 보지만 얼마 못 가 집중력이 흐려지면서 눕고만 싶어 진다.
결국 침대로 향한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훌렁 2시간이 지나간다.
이대로 괜찮을까? 두려움, 죄책감, 허무감이 뒤엉키며 나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간다.
문득 깨닫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렇게 실컷 잠이나 잔적이 있었던가? 하다못해 재작년에 난생처음 맞이했던 백수기에도 필사적으로 성실한 하루하루를 꾸려갔던 것이다. 더 잘살아 내고 픈 마음에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면서 열심히 살아내는 방법을 선택했기에 이전에 직장 생활할 때와 마찬가지로 잠은 부족했을지 모르겠다.
다시 취업한 이후의 수면 시간은 하루에 고작 6시간 남짓이었으니, 잠빚은 더욱 늘어났을 것이고.
퇴사하자마자 잠만 자는 이유를 알아채고 나니, 잘못되고 있다는 두려움, 무기력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 덧없이 흘려보낸 하루에 대한 허무감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시간이 많아진 만큼 조급할 필요는 없다. 첫 번째 백수 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다. 그때는 마음만 급해서 나를 조종하는 시간이었다면 이번에는 나를 존중하는 마음부터 가져보려 한다. 내게 맞는 체력 수준이나 적정 수면 시간을 배려해 주는 것 또한 그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욕구 가득한 셀프컨트롤 대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삶을 배우는 중이다.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