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아마추어, 덧셈과 뺄셈
밤 10시. 학생들을 셔틀에 태우느라, 정작 내 버스는 놓쳤다. 오늘은 걸어서 귀가하기로 한다.
뒤에서 세차게 페달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전거 한대가 밤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지나간다. 뒤로 맨 가방만 보아도 학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너, 빨리 집에 가고 싶구나. 나도 그래.
발걸음을 재촉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밥이다. 중간에 빵과 견과류로 허기를 달래긴 하지만, 한 끼 식사가 주는 에너지와는 크게 다른 듯하다. 뱃속은 허전함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얼른 집에 가서 따뜻한 쌀밥과 뜨끈한 국물을 먹고 싶다. 밤 10시. 남들은 야식을 먹는 시간에 나는 저녁을 먹는다.
학원 취업을 결정했을 때 10시 퇴근이라는 점에 부담을 느낀 건 사실이다. 아무리 집이 가까워도 그때 퇴근해서 가족을 챙기고, 씻고 자려면 밤이 너무나도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로 계약서에 다음과 같이 또렷하게 명시되어 있었기에 저녁밥만큼은 제때 해결할 수 있겠지 싶었다. 집안일은 오전에 하고 밤에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 되었다.
근무시간 : 13시~22시
('을'은 근무 시간 중에 1시간의 휴게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휴게 시간을 온전히 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해진 휴게 시간이 없기에 옆자리 실장과 그때그때 상의하여 서로 교대해야 하는데, 데스크는 빗발치는 전화와 학생들 관리로 늘 분주하고 대표나 원장의 지시는 예고 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대부분은 바로 해결해야 하는 건들이었다. 상사들은 그렇게 급해 보이지 않는 일들에도 ASAP이라는 표식을 붙여버리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실장과 내가 각각 1시간씩 저녁을 먹고 오는 것은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마 빠른 식사가 가능한 김밥이나 분식류의 경우 주문 후 식사까지는 대략 40분가량이 소요되는데, 나의 소중한 휴게 시간이 20분이 더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히 절사 시켜야 했다. 게다가 급하게 먹는 날에는 꼭 체기가 느껴졌다. 영양적으로도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지 않다는 물음표까지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휴게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즉, 밤 10시까지 저녁을 먹지 않는 삶이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의 끝으로 밀려버린 나의 저녁밥을 소홀히 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집에 와서 느긋하게 호사를 누리다 보면 어느덧 11시가 훌쩍 넘어 버린다. 몸과 마음은 다시 부산해진다. 다음 날 아이들 등교 시간에 맞춰 일어나려면, 서둘러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식사 후 겨우 한 시간 만에 잠자리에 드는 패턴이 반복되어 왔고, 밤 사이 혹사당한 위장이 조용히 신음하고 있을 것만 같다.
일반 직장인 시절, 밥에 그리 집착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당연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연연할 필요조차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운다는 욕구 충족을 넘어, 그 시간은 내게 평화와 안식을 선물해 주었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햇살과 만나는 그 순간이 주는 에너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학원의 근무 환경은 달랐다. 밥은 못 먹더라도 잠시 코에 바람을 넣으러 밖에 나간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카톡 단체 대화방은 지시와 보고, 채근과 속죄로 도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나의 휴식에만 집중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마음이 불편해 서둘러 들어와 버렸다.
게다가 일주일 정도 근무해보니,1시 출근 시간에 딱 맞춰 업무를 개시하면 안된다는 것도 간파할 수 있었다. 더 일찍 출근하지 않으면 그날 안에 일을 마치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0시 퇴근 시간만큼은 반드시 사수하고 싶었기에 자발적으로 12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업무 부담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간 여러 건의 레퍼런스를 목격해 왔다. 개선을 요구하는 순간 "너는 아마추어구나!"라는 맥락에 맞지도 않는 반응과 함께 밑도 끝도 없는 가스라이팅이 시작된다는 것을.
경영진은 실무자들의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시간 내에 다 할 수 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도록 닦달하거나, 상사라는 이름으로 위력을 행사하려 할 뿐이었다.
불시에 회의를 소집하고(심지어 밤 9시 50분에 회의하는 경우도 있음) 폭포수처럼 To Do List를 쏟아내는데, 가끔은 미처 소화되지 못한 토사물이 수직 낙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무자들은 응당 버려져야 하는 토사물을 주워 담기에 여념이 없고, 때로는 휘리릭 뱉어버린 그것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졌다.
결론적으로 매일 10시간을 휴식 없이 일하게 된 셈인데(다행히 화장실에는 간다), 이는 주휴수당까지 포함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저시급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근로 계약서에 "갑"은 "을"에게 근로시간 이외의 근무를 요청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에, 시간 외 근무 수당은 따로 지급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파트타임 직원의 근무 시간까지 줄여버리겠다고 했다. 누가 봐도 비용 절감이 목표인 게 자명하지만, 그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결정 사항을 전달할 뿐이었다. 덕분에 파트타임 직원이 해야 할 일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전가되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들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말이다. 그들의 마음은 투명하게 비치고 있으니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뽑아내겠다는 덧셈과 뺄셈.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사칙연산보다는 복잡해 보였다.
나는 왜 이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것일까? 근로 계약서에 명시된 조건과 실제 환경의 간극이 이렇게나 큰데도 버티고 있는 이유가 뭘까?
열정 페이를 받는 45세 학원행정직 종사자. 나를 향한 진지한 물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