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일상, 상상
몇 달 전 브런치에서 우연히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20대, 4기 암 환자, 항암, 내성.
브런치북 소개글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비극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녀는 절망의 단어들 사이에 응원, 사랑, 감사의 마음을 엮어 기어이 희망의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은 언제나 희극으로 빛났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는 그 자리에서 지난 글들을 모두 읽어 내려갔다. 담담한 문체 속에는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려는 단단한 의지가 배어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걸으며 계절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선한 말들은 도리어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날부터 나는 작가의 팬이 되었다. 환우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인생을 마주하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매주 목요일이면 그녀의 브런치로 달려갔고, 새로 발행된 글은 어김없이 감사로 흘러넘쳤다.
그 무렵 나는 학원일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자문을 계속하고 있던 중이었다.
입사 3일 차에 마주했던 당황스러운 시추에이션으로 인한 - 사수의 질문 금지 요구와 방학 특강으로 인한 연장 근무 - 퇴사 고비는 가까스로 넘겼으나, 근속일이 더해질수록 발견되는 구습적 업무 지시와 시대 역행적 근로 환경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납득이 불가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쪽 필드에서는 커리어가 전무했던 만큼 빠르게 실패를 인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옵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가계 문제를 다소나마 해소했던 시점이기도 해서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져갔다.
남편은 "1시 정시 출근"을 제안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안 주는데 굳이 일찍 출근하지 말라며, "자를 테면 잘라봐라"라는 뻔뻔함이 필요하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한 두 번 시도해 봤지만 눈치가 보였고, 무엇보다 일이 계속 밀려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화장실까지 참아가며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돈을 버는 일에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고통만 느껴지는 듯해 견디기 힘들었다. 내 전임자들이 입사 몇 주만에 줄줄이 명찰을 내던지고 나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음이 명확해졌고, 나 역시 곧 그들의 행렬에 합류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이 자리는 영원히 저주받을 거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그러던 와중에 그녀의 글을 만난 것이다.
그녀의 바람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숙연해지는 마음과 함께 시선은 나의 하루로 옮겨갔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하루 10시간 일을 할 수 있고, 조금 피곤하지만 가족을 돌볼 체력이 있다는 것은 고통이 아닌, 누군가가 꿈꾸는 평범한 일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돌아가신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상당히 위독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여느 때처럼 야구를 보았고, 설사가 계속되는 속을 달래기 위해 무엇을 먹을지를 고민했으며, 엄마에게 잔소리까지 했다. 마지막까지 일상을 살아가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이 새삼 투영되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빠였다면 지금 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빠는 한평생 딱딱한 가난의 껍질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생활력과 책임감만큼은 대단한 분이었다. 겨울 한파와 눈보라 한가운데에서도 바깥일을 했고, 뜨거운 태양과 퍼붓는 빗속에서도 일터를 지켰다. 멸시와 억압, 불합리한 조건이나 불편한 환경은 고통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으리라.
아빠는 병상에서도 미래를 꿈꿨다. 작은 텃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당신은 숨이 차서 말하기조차 버거운 상황에서도 올해는 밭에 어떤 채소를 심을지를 이야기하곤 했다. 쑥쑥 자라나는 채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비록 농사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아빠를 닮았는지 미래를 꿈꾸는 걸 즐기는 편이다. 어느 날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갖고 있는 주식이 폭등하는 등의 망상 쪽은 아니고,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활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에 대한 상상이다.
지난 1월 학원 행정직을 인생 2막의 첫 직업으로 선택하면서, 운이 좋게도 원어민 영어 학원에서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이제라도 평생 발목을 잡았던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동기가 강렬해졌으며, 실제로 매일 영어를 공부하고 있고, 학원에서 조금씩 써먹으면서 실전 경험을 쌓아가는 중이다. 45세에 다시 언어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지만 (그놈의 발음이 정말 안 고쳐진다), Thank You와 Okay밖에 할 줄 몰랐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원어민과 대화가 잘된 날은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지기도 한다. 더욱 발전하는 내일이 기대되고, 더욱 유창해질 1년 후의 나 자신이 기다려진다. 일어에 영어를 더해 3개 국어를 구사하는 미래를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와 미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학원 행정직은 어디에 가던 좋은 처우를 받기는 어렵겠지만(대부분이 소규모 기업인 데다, 이윤 창출과 직결되지 않는 Staff 이기 때문), 1년가량의 경력 만으로도 관리자 보직으로 이직이 가능하다. 딱 1년만 버텨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스텝 한 스텝 올라가다 보면 학원 업무에 대한 베테랑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 이는 나름의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는 걸 의미하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이제부터는 망상이긴 하지만) 내가 스스로 운영권을 쥐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그 사이에 꾸준히 영어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겠으나.
나의 고통은 누군가가 꿈꾸던 일상에 불과하며, 의미 있는 경험으로 환원되어 미래의 꿈이 열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적어도 "당장 퇴사하지 않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섰다. 나에게 긍정적인 태도와 현명한 지혜를 일깨워 준, 지금은 하늘에서 편히 쉬고 있을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본다.
I will always cherish the gifts you left behind.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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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많은 배움을 얻었던 글을 남기신 분은 유남경 작가님입니다. 살아 계실 때 한 번도 댓글을 써보진 못했지만 이제라도 정말 팬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남겨진 가족이나 지인분들께 실례가 될까 봐 링크는 남기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