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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Nov 25. 2021

흔한 슬로우스타터일 뿐입니다

내향형 달팽이 인간

몇 년 전, 당시 팀장은 출근하자마자 메신저로 보고 자료 상신을 요청했다. 내가 파일 전송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한숨 섞인 문장들이 이어졌다.


"OO님은 너무 느려요. 납기 좀 맞춰주세요. 마감일이 정해진 자료는 내가 출근하기 전까지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날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 9시까지 야근을 한 후, 노트북을 들고 퇴근해 새벽 2시까지 붙들고 있었다. 보고 마감일이면 늘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뒤척였고, 그날 역시 뜬눈으로 2시간을 새웠다. 꿀잠 ASMR을 들어봤지만 귀가 간지러워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해괴망측한 기분마저 들어 꺼버렸다. 오디오북을 켰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리더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져 오히려 더 정신이 차려졌다. 짜증의 끝에서 간이 조명을 켜고 책을 펼쳤으나, 옆으로 누워 책장을 넘겨야 하니 자세가 영 불편해서 몇 장 못 읽었다.


만국 공통의 불면증 퇴치법인 양을 세어 보라고? 음...그건 실패율 100%의 방법이었기에 시도도 안 한다. 세다가 귀찮아져서 세 자릿수가 넘어가면 하릴없이 양 99마리.. 양 99마리만 되뇌는 꽤나 멍청한 광경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의식은 점점 더 또렷해져 100을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 신경이 곤두선다. 뇌의 연산 기능이 가동되는 한 나는 잠이 들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동틀 무렵 겨우 잠이 들어 늦잠을 자버렸으니 평소 걸었던 길은 냅다 뛰는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생각보다 여유 있게 도착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선 채로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내 거치대로 옮기고 전원을 켠다. 이제야 자리에 앉으려는데 팀장이 보낸 메신저가 울린다. 그녀의 자리에서는 내 뒤통수가 보이기에, 자리에 앉는 걸 보자마자 메신저를 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는 이유였다.


노트북 오른쪽 하단에 표시되는 시계를 보니, 8시 50분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숨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은 그녀가 야속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그녀 말대로 난 업무처리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기획 파트이다 보니, 경영진의 지침으로 불쑥불쑥 긴박하게 진행해야 할 업무들이 생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팀장은 내가 포함된 파트원 3명을 급히 호출했다.


다른 두 명은 팀장의 의도를 신속하게 이해했으며, 작성 속도 또한 빨랐다. 팀장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고, 덧붙이는 설명 또한 명료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팀장은 보고를 받는 중 입버릇처럼 "이거 맞아요? 확실해요?"를 말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박식한 지식 정보와 구조화된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논리력을 입증했다.


반면,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위축이 되었다.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에는 상사가 믿음을 주려다가도 의심하도록 만드는 가는 떨림이 있었다.


그때마다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를 했지만, 시간의 탓으로 돌리기엔 다른 팀원들이 척척 해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업무 파악이 덜 되었다는 나름의 변명 거리도 있었으나(실제로 내뱉은 적은 없다), 팀장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기본기가 있다면 한쪽 발로도 설렁설렁할 수 있는 업무들이라 선수치며 변명의 기회조차 차단해버렸다.  


경력직으로 입사했다면, 일명 Catch Up이라는 단어로 통용되는 학습 기간이 부여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경력직을 채용할 때 이력서와 면접만으로 쓸 만 한지 아닌지를 판별하게 된다. 여기에서 쓸 만하다는 건 실무에 바로 투입이라는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알맹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수인계나 교육 기간이 필요한 직원은 쓸모없는 껍질이나 다름없다.


나는 신중하고 집중력이 좋은 편이나, 기민하고 영민하지 못한 탓에 알맹이로 구분되지 못했다. 팀장은 입사 일주일 만에 조심스럽고 소심한 성향의 나를 파악해 버린 듯 하다.


매일 출근하는 자리는 똑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책상의 크기는 줄어갔다. 2의 거듭제곱을 배울 때 2, 4, 8, 16으로 숫자가 커질 때마다 희열을 느꼈던 나지만, 내 책상은 이와 반대로 -1 제곱씩을 곱하며 1/2, 1/4, 1/8로 소멸되어 갔다. -1 제곱을 곱할 때마다 나오는 결과값이 곧 내 존재감이었다. 희미해지고 있었다.


주관 업무라고 불릴 만한 일이 거의 남지 않았을 무렵, 팀장은 내년 사업 계획 내에서 솔직히 나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3달만 시간을 더 달라며 업무 향상 계획서까지 제출했지만, 기회를 준다고 할 수 있겠냐는 의문 섞인 말만 되풀이했다.


"네." 끝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는 대답하지 못했다(이후 업무는 계속 줄었고, 팀을 옮겼다).



내 성격은 내향형-외향형 스펙트럼 중 내향 쪽에 가깝다. 조용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역량이 발휘되는 유형이다. 그러므로, 반대의 환경, 이를 테면 애자일 방식으로 덤벼들어 의견을 교환하고 정신없이 퍼즐을 맞추는 업무 방식, 강압적인 어조의 "하세요" 지시 방식, "한 시간 내에 만들어서 제출"이라는 촉박한 시간 부여 방식 등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는 능력의 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팀장은 나의 성향을 단번에 간파하고 본인과는 오래 일할 수 없는 타입으로 규정해버렸던 걸 수도 있다.


물론, 내 성향을 존중하거나 장점에도 주목했던 상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시간에 비례해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믿어준 것 같다.


그들 중 한 명은 일부러 나에게 자료를 빨리 달라고 재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만 기다리면 본인이 재검토하지 않아도 될 만큼 꼼꼼하고 퀄리티 있는 보고서를 가지고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가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자료는 보고하지 않는다는 성향을 꿰뚫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속하게 가져다주는 직원의 자료는 톱니바퀴가 삐걱대곤 한다고, 그런 사례가 몇 번 반복되니 본인이 직접 재확인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시간과 자원을 빼앗아가는 꼴이라서 오히려 손해더라라는 본인의 판단 기준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사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외부 업체의 상품 설명회라던가, 프로젝트 개발 논의 등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기 때문인데,  불확실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못하다. 아! 나도 멋지게 아는 척하고 싶다.


반면 업무가 손에 익고, 이리저리 얽힌 구조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면 확신과 소신으로 대답한다. 현재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라면 돌발 질문이 들어와도 대처할 수 있으며, 그 대부분은 불확실이 아닌 확실이기에 가능하다. 심지어 다가오지 않은 위험 요소에 대해서도 미리 예측하고 고민한다.


역시, 난 슬로우스타터야.


애석하게도 30대 중반 이후 회사에서는 내가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다. 업체 미팅 시간에도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않고, 프레텐테이션을 맡기면 벌벌 떨고, 순발력도 없으니 답답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리라.


5년 차 미만이라면 성장하는 과정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과장급 이후부터는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 매사에 두려움 없이 접근하고 빠른 성과를 내야 하기에,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식될 수 있다. 관리자가 만든 톱니바퀴에 직원이 성향을 맞추지 못하면 배제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애초에 조직 생활 길게 못하는 성격이네."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으니까. 회사가 두려우니까.


다만 최근 들어 내가 어떤 성향인지를 알아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다보니, 조직을 무서워하는 것이 온전히 내 문제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시 보고에 익숙해진 경영진의 긴급 지시, 신속한 대처와 결단력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인정 욕구, 그런 중간관리자들의 구미에 길들여진 기민한 직원들의 영민한 태도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회사라는 환경이, 나처럼 내향형 인간은 존재감을 나타내기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이들은 이미 그들이 만들어 낸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수행력의 톱니바퀴 방식이야말로 회사의 생존과 발전에 최적이라고 믿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대기만성형 혹은 슬로우스타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살아왔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조직 안에서 살아남기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나 같은 유형도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가치를 인정해주고 활용법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회사는 안타깝지만 익숙한 평가 방식대로 월급의 무게와 비교하여 당장의 쓸모를 고민한다.  

우리는 "외향성 이상"이라 이름 붙인 신념 체계에 따라 살고 있다. 이상적인 자아란 사교적이고 지배적이며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외향적인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는 만연한 믿음이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팀으로 일할 때 능률이 높아지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자신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데 익숙한 유형. 가면을 쓴 내향인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이다가 뭔가 사건, 해고, 혼자 남음, 시간의 자유 등이 일어난 후에야 자신의 참된 성향을 재고해보게 된다.
- 콰이어트, 수전 케인 -


물론, 모든 걸 환경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쓸모없는 투정일 뿐이리라. 내면을 만나고 인정하면서 이런 성향에 더욱 잘 어울리고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있다.


"이제와서"가 아닌, "이제라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제어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일들로 인해 약해지지 않기로 마음먹을 수는 있다.
- 마야 안젤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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