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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Nov 26. 2021

저, 착한 딸 아니에요

좀 더 후련하게 퇴사하기 위한 길

편은 조기 직장 은퇴를 실현한 선배로서 울타리 밖의 삶이 결코 지옥이 아님을 설파해왔다. 아니 오히려 행복하다고 했다.


우리 둘 다 "호기심 많은 예술가" 유형인만큼 나 역시 자유로운 삶에 익숙해지면 조직생활은 하기 싫어질 거라고 했다. 맞벌이 직장인 시절보다는 확실히 수입도 불규칙하고 불안해지겠지만 조금 아끼고 살면 다 살아진다는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 사람, 1년 반 동안 자기 주도적으로 살더니 뭔가 어른이 된 건가.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퇴사 예찬론에 스며들었다. 지난 8월의 어느 날 퇴사를 결심했다고 했을 때, 그는 여태 결심을 안 했던 거냐며 농을 치기도 했다. 응원이라기보다는 퇴사 물귀신에 가까웠다.


하고 싶은 일을 정한 것은 아니기에 회사를 그만두면 당분간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 기간이 꽤 길어질 수도 아예 일을 안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혹자는 그렇다면 돈 걱정에 여가는 물론, 일상생활불안하지 않겠냐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직장생활 지속으로 막상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쫓기는 삶을 살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 부부는 기본 의식주와 아이들 교육 외에는 딱히 돈을 쓸 곳도 없다는 생각도 일치했다. 큰 아이가 중학생인 만큼 학업이라는 굴레에 갇혀 이젠 먼 나라 여행도 부담스러운 시기다. 당분간은 수년에 한 번 드문드문 가면 될 것 같다.


럭셔리한 호텔에서의 1박보다는 집에서 김치전이나 제육볶음을 후딱 만들어 술 한잔 기울이는 소소한 일상을 더 행복해하는 우리다.


그러니 돈보다는 시간의 여유를 택하기로 했다.


이제, 직장을 나오면 바로 없어진다고 하는 3종 세트에는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월급. 명함. 인맥.


월급은 간소화된 소비습관과 가치관으로 전환하면서 부재에 대비해왔고, 시간이라는 대체제로 포기할 수 있다. 명함은 이미 내 것이 아님을, 내일 당장 내 자리가 소멸되고 대체되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임을 받아들였으니 괜찮다. 인맥은 원래 없다. 집에서 조용히 충전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다. 소모임을 좋아하며, 있던 약속이나 회식이 취소되면 은근히 시간이 생겼다면서 좋아하는 타입.


마인드셋은 끝났다. 이제 실전이다.


팀장에 면담을 신청해서 퇴사 의사를 밝혔고 그는 그동안 미안했다며 사과를 했다. 앞으로 잘 지내자며. 그러니 퇴사 생각을 접어달라 했다. 오해가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풀렸고 상처도 조금은 아물었다. 그 상처는 내가 스스로 더 건드리고 후벼 파서 더 곪았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상사에 대한 감정 소모 없이 나쁘지 않게 떠날 수 있어 홀가분했다.


허나, 한 가지 잊은 게 있었다.


난, 조금은 애매하지만 대학 졸업 무렵부터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부모님 사업이 갑자기 망했다던지 집안이 폭삭 주저앉아서 짐을 지게 된 건 아니다. 단지 원래 가난했고 계속 가난했는데, IMF로 더 가난해졌고 집안에서 나만 개천의 이무기 수준의 애매한 잘난척과 성실함에 힘입어 경쟁과 사회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언니가 있지만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혈기왕성했던 시절 가난에 본인의 짐을 얹었다. 아빠와 나는 가난에 더해진 짐을 나눠지고 버텼다. 부모님은 노후 자금은커녕 나와 함께 빚을 탕감하는 데에 급급했다. 어깨 위의 짐은 결혼 후까지도 이어졌다. 남편에게 미안했고 친정에는 원망의 앙금이 남았다.


그러는 사이 부모님은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 두려운 나이가 되었다. 전쟁세대라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셨으니 계속 몸으로 하는 일만 해오셨고 노후에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추운 날에는 추운 곳에서, 더운 날에는 더운 곳에서 일해 오셨다.


노년에도 그렇게 일을 하던 아빠는 결국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아니 조금만 무리해도 일상 조차 버거운 노인이 되셨다.


엄마는 큰 아이 출산 직후부터 양육을 도와주셨다. 당연히 용돈을 드렸고 부모님 생활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아빠가 더 이상의 소일거리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양육비 의존도는 더 높아져 실질적인 생계비가 되었다. 아이들이 많이 커서 엄마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직장에 다니는 한 내가 먼저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친정을 위해 희생한 만큼 엄마도 나를 위해 희생한 거라고 생각하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기적인가 싶기도 했다.


최근 김장을 하러 친정에 다녀왔다.


지난달 퇴원한 아빠는 이제 병원 약을 이기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는지 부쩍 수척해지셨다.


김장할 때면 투박하게 밤을 깎고, 경쾌하게 무를 갈며 잔소리를 하던 아빠는 없었다. 그 잔소리에 핀잔을 주던 엄마도 없었다. 김치 속 양념이 맛있다며, 10번도 더 배추에 싸 먹고는 속이 맵고 따끔거려 연신 물을 마시던 아빠도 없었다. 미련하다며 잔소리를 하던 엄마도 없었다.


아빠는 소파에 누워 계셨고, 드문드문 잠을 주무셨다. 퇴원 이후 컨디션이 안 좋고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아져 낮에는 이렇게 몽롱한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엄마는 내년에는 아예 김장을 하지 말자고 하셨다.


김장하러 가기 며칠 전, 엄마에게 퇴사 계획을 밝혔다. 퇴사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준비해왔는데 참으로 용기가 안 나 그제야 말한 것이다. 다만 앞으로 몇 달이 될지 약속할 수는 없지만 당분간 용돈은 드리겠다고 했다. 엄마는 별 반응 없이 이 말만 하셨다.


"그래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니. 징글징글했을 거야. 그 전쟁터에서."


친정에 다녀온 날, 부모님은 나보다 더 징글징글한 삶을 지금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물려받은 건 가난밖에 없어서 한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결과는 결국 가난만 남았다. 병들고 늙어가는 인생의 무상함에 경제적인 부담이 더해져 삶의 무게가 무력감으로 변해가는 노년을 보내고 있다. 나는 경제적 여유보다는 시간적 여유를 택하겠노라는 호화로운 설렘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시간의 여유가 많은 당신들은 하나도 여유롭지 못하다.


지난 20년간 둘째 딸에게 지운 짐이 너무 미안하고 한스러워서 나의 퇴사 이후 당신들의 생계에 대한 걱정을 내색하지 않는 그들의 짐이 가슴 아팠다.


결심이 서자, 남편에게 말했다.

"퇴사는 일 년 정도 미뤄야 할 것 같아. 앞으로 2년간은 생활비를 드릴 수 있도록 목돈이 있어야 할 듯해. 그리고 퇴사도 시간 여유 갖고 더 잘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퇴사 예찬론자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D-180 퇴사 축하 파티를 열고, 매일 응원을 받고 매일 퇴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다면 진작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고 준비했어야 한다며 나무랐다. 그리고 내 인생을 찾을 자격이 있고, 지금까지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마흔이 넘어서까지 짐을 내려놓지 못한 내가 안쓰럽다며 마음 아프다고 했다.


"응. 맞아. 하지만 이건 나를 위한 결정이야. 더 이상 착한 딸 콤플렉스가 아니야."


언니도 몇 년 전부터는 자유분방 대신 성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언니에게도 이런 DNA가 있었다니 이제야 발견한 것에 야속하기도 하지만, 인생 100세 시대에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은 만큼 응원을 보내는 마음이 크다. 그리고 어쩌면 나보다도 더 부모님을 생각하고 노후의 삶을 걱정하고 있는 듯 하다. 다만 아직은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퇴사 시기를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계획대로 내년 초 퇴사라면, 연로하신 부모님의 경제적 불안은 가중될 터. 그것이 짐이었다면, 내 인생을 찾겠다며 짐을 던져버린 꼴이 될 것 같았다. 짐을 사뿐히 내려놓기 위해 가족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부모님은 젊은 날의 내가 성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훌륭한 DNA를 물려주신 분들이며, 가정환경에 굴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신 분들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원망 대신 감사한 마음 뿐.


맥주 한잔하면서 호쾌하게 퇴사를 논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내 빛을 발견하게 해 주신 부모님은 스스로 그림자가 되셨다. 이제 그 그림자를 내가 지워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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