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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Dec 10. 2021

나이 많은 실무자가 뭐 어때서

40대 평직원이라도 위풍당당 살고 싶어

지금 회사로 이직한 이후로는 가급적이면 구석에 짱 박혀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지내고 있다.


낯가림이 지독히 심하다거나 여러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는 극도의 부끄럼쟁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도 이유는 나이.


우리 팀 아니 우리 조직 실무자의 대부분은 30대이며, 팀장 중에도 30대가 더러 있을 정도로 조직이 젊은 편이다. 공채가 아닌 경력직 중심의 회사이다 보니 20대를 찾아보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실무자 중에서만 따져보면 40대인 나는 조직의 평균 연령 상승에 꽤나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관계를 최소화하고 있는 탓에 조직원들의 얼굴이나 나이를 일일이 알지는 못하지만, 지나다니면서 스윽 보면 40대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간혹 50대 실무자분들이 보이는데, 대개는 리더였다가 조직 개편 등으로 인해 평직원으로 내려오신 분들, 지금까지 버텨왔으니 끝까지 버티는 분들, 혹은 직렬이 달라서 계속 실무자로 머물러야 하는 분들이다. 


40대 초반의 나로서는 외로운 환경이다.


물론 우리 회사 자체에 40대 평직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아는 타 부서 40대  여직원들은 대부분 장기간 근속한 분들로 베테랑 칭호를 받으며 전문 인력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관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회사로부터 인정받는 이들이다. 이곳으로 이직한 지 몇 년 되지 않았고 경력마저 바뀌어 아직도 허둥대는 나보다는 한참 윗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다 갔다 하거나 다른 층에 들를 일이 있을 때, 40대 정도로 보이는 타 조직 여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회사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곤 한다.


'다 관리자급은 아닐 텐데, 나이를 먹어도 즐겁게 회사에 다니는구나.'

나이로 선을 긋는 건 아니지만, 40대라도 외롭지 않아 보이는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회사는 2020년대의 추세에 맞게 팀장과 평직원으로만 구성된 수평적 조직구조이며, 중간 관리자는 다 없앴고 과차장급이라도 그냥 "님"으로만 불린다. 팀장급 미만은 각자 부여받은 업무를 각자 수행하고 바로 팀장에게 보고 혹은 결재하는 구조다. 조직구조가 잘 못 되었고, 내가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그저 40대라도 당당하고 싶을 뿐.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회사에 별반 능력을 보여준 것도 없는 어중간한 나이는 늘 위축이 된다.


업무에 대해서도 경험이 짧으니 젊은 직원들에게 배워야 하는 입장이고, 회사 근속도 짧으니 부서 간 협력 관계나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다 안되면 인맥으로라도 비벼봐야 하는데 회사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던 탓일까 유관 부서 분들과의 친밀도도 높지 않다(물론 유관부서 분들이 많이 도와주신다. 이 부분에는 감사할 따름이다).


퇴사를 결심한 데에는 5년은 더 젊은 직원들보다도 아직 뒤에 서 있고 아직도 배울 것 투성이라서 계속 이대로 초라하게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의 영향도 컸다. 하기 싫은 일에는 암울하게 보이는 미래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잘 살기 위해 나가려는 것이 아니었고, 나 자신이 더 구질구질해질까 봐 무서웠던 거다. 겁쟁이다.




나이 먹은 실무자가 잘못된 걸까? 번아웃이 올 만큼 열심히 일했고, 신입이나 주니어들의 두배 세배의 속도로 업무를 따라잡아서 이젠 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 안 되는 걸까? 계속 평직원으로 머무르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일까? 나도 엘리베이터의 그녀들처럼 당당해질 수는 없는 걸까? 


영화 '인턴'의 벤 할아버지처럼 비록 말단이라도 자신만의 노하우와 경험으로 회사에 기여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벤 할아버지는 신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신은 계속 배우고 싶고 계속 배울 것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풍부한 직장과 인생 경험을 쌓아온 만큼, 충성심이 있고 위기관리 능력도 뛰어나며, 이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즐겁게 인턴 생활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주어진 역할에 성실하게 임한다. 결국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젊은 CEO 줄리는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나는 그의 반토막만한 경험을 가졌을 뿐이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비록 여러 번 옮겼을지언정 직장 생활을 19년쯤 하니 조직 생활 노하우는 만렙에 다가가고 있다. 업무 숙련도는 아직 갈길이 멀긴 하나, 상사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혹은 심리 상태까지 단번에 이해가 되고,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곤란해하는 주니어들을 위로하거나 능구렁이처럼 상사에게 돌려서 애로사항을 건의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사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하는데, 그들은 세대차이나 꼰대 소리를 들을까 봐 대리급 직원들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나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10년 전의 나와 비교해보면 시야가 한층 넓어진 듯하다. 산 중턱에서 발 아래나 산 정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느끼고,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벤 할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신나고 매일 출근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지만,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는 당당하고 싶다. 업무는 1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으며, 팀에서는 윤활유가 되고 있으니 나이만 먹은 짐짝이 아니라고. 회사에 애정을 갖게 될 날이 올진 모르겠으나,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에게는 애정을 가져보자고.


계속 짱 박혀 사는 것이 편하면 짱 박혀도 좋지만, 굳이 구석탱이만을 찾지는 말자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나보다 앞서 산에 오르는 사람도, 높은 산을 정복한 사람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할 거다. 산에 오를 때 기쁨을 주는 건 꼭대기에 서게 되는 내가 아니라, 간간이 비치는 햇살의 따스함과 문득 마주하는 수평선의 평온함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남을 관리하는 일보다 직접 창조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보람도 있고 숭고하다고 여겨서 승진할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단다. 상사보다 학력도 높고 나이도 많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고 내 노동력 또한 소중하기 때문에 그 평가를 남에게 맡기거나 돈으로 재고 싶지는 않다.

-고등어를 금하노라 (임혜지)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공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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