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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Dec 27. 2021

남편이랑 같이 출장 가도 되나요?

장롱면허 소지자의 시외 출장기

올해 안에 처리해야 합니다. 차주 초에 출장 진행해주세요.

팀장의 메일은 단호하고 건조했다.


여태 가만히 있다가 왠 날벼락인가.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면서 사내에서도 출장 자제 권고가 내려진 마당이니 내년으로 이월될 줄 알았는데, 게다가 12월이 반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갑분 출장 명령이었다.


나는 시외 출장을 싫어한다. 

겨울이면 더 싫어진다.


시내는 교통이 편리하고 여유롭지만, 시외라면 터미널이나 기차역 코앞이 아닌 이상 이동 수단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난 시내주행밖에 못하는 반의 반쪽이 운전자다. 거의 장롱면허에 가깝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겨울엔 웬만하면 돌아다니지도 않고, 약속도 최소화한다. 어릴 때부터 추운 날엔 친구들이 놀자고 찾아와도 아랫목에서 고구마나 귤 까먹는 걸 더 좋아했고 , 어른이 되어서도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갑자기 잡힌 추운 날 약속은 거절했었다. 겨울에는 회사에 기어나가는 게 용할 정도로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한다.


이번 출장은 팀원들이 각자도생으로 다녀오기로 했기에 난 동행자 없이 혼자 가야 했다. 그것도 추운 겨울에!!


고민이 깊어지는 와중에, 팀장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출장 운전해서 갈 수 있어요? 꽤 멀고, 마땅한 버스도 없을 거예요. 혹시 남편분이 운전해주실 있나요? 같이 다녀오셔도 됩니다.


헙. 남편이랑? 그런 방법이 있었군. 자영업자 남편을 둔 덕이 있었네. 마침 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라 그런지 매장이 한산하다는 얘기를 듣던 참이다. 평일 하루쯤 출입문에 closed를 걸어둬도 될 거야.


바로 톡을 날렸다.

평일 운전 알바 구함.
목적지 충청남도 ㅇㅇ 군, ㅁㅁ 군
유류대 및 톨비는 회사에서 지원
중식비는 사비로 제공
일비는 상황 봐서 사비로 드릴게


남편은 당황해했지만 ok를 외쳤다.

돈은 필요 없으니 꼭 휴게소에 들러서 따끈한 밥과 주전부리를 사달라고 했다.


출장은 유류대랑 톨비만 실비 정산으로 지원되기에 회사에 거리낄 요소는 없었다. 남편에게만 미안할 뿐.



출장 당일.

남편은 은근히 들떠있었다. 단둘이 고속도로를 타고 어딘가에 가는 것이 얼마만이냐며 갈만한 휴게소부터 검색해달라고 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주유소에 들렀다. 추운 아침 공기 속에서 급유하느라 손이 시렸을 만도 한데 사모님은 편히 앉아 계시라며  히죽히죽 웃었다.


원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고 시트 열선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히터 온도를 적절히 맞추며 여행 가는 듯한 출장길에 올랐다. 나도 두둥실 마음이 부풀었다.


가게 문 열었다면, 손님이 아무리 없어도 매출은 있었을텐데 나 때문에 미안하네.


좋은 분위기를 틈타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흔쾌히 같이 가주는 건 고마웠지만 운전 잘 못하는 마누라 대신 운전대를 잡아주는 상황이 부끄럽기도 했다.


뭐 그렇긴 하지. 근데 기름값 받으니까 공짜로 여행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 괜찮아. 춥긴 하지만 날씨도 맑고. 난 정말 좋은데?


물론 이렇게 오글거리고 비현실적인 다정한 대화만 오고 간 건 아니다. 남편이 밍기적거린 탓에 출발이 늦어 약속한 시간에 방문이 어렵게 되었다며 원망을 하기도 했고, 남편은 왜 그게 본인 탓이냐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차가 막혀 서로 짜증을 부렸다.


더군다나 4시 이후에는 내 전화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출장이라고 근태에도 올리고, 협업 멤버들에게도 즉시 대응은 어려울 거라고 분명히 말해두었는데 상도덕도 없이 전화를 해대는 이들이 야속했다. 그들은 한 번이지만 그게 10명이면 난 10번 전화를 받아야 했다. 남편은 이해한다면서도 정신없는 상황에 예민해진 것 같았다.


역시 출장은 출장일 뿐 여행이 될 수 없구나.


난 일을 하러 간 거고 아직 6시 전이니 퇴근한 것도 아니잖아. 운전을 직접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천만다행이지만 전화에 응대를 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다.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했으니 9to6로 일을 해야 한다. 단둘이 오붓하게 꿈결 같은 여행을 꿈 뀠던 철 없는 두근거림은 애초에 꿈꾸지 말았어야 했다.


설레는 마음에 무지개가 뜨고 예쁜 대화에 별빛이 내려오니 여느 때와 다른 일상이고 싶었던 날이건만, 평화를 깨는 전화들과 업무 독촉으로 특별한 일상은 이미 증발하고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정신 없고 급하고 바쁜 것이 출근일의 내 일상인 것을, 욕심이 과했나 싶기도 했다.


6시가 넘었네. 그만 통화하고 퇴근해


남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집까지는 5km도 안 남아 있었다. 종일 화사했던 햇살은 조금은 쓸쓸하지만 은은한 금빛 석양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노을 덕분인지 남편이 운전해주는 퇴근길이 꽤나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무리가 좋았으니 좋은 날로 기억되려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지고 볶긴 했어도 (잠깐씩 거래처에 방문한 시간을 제외하면)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가졌던 하루였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소소한 생각들까지 공유하는 금쪽같은 순간들. 금전적인 혜택보다도 귀한 황금빛 시간을 회사로부터 뽑아 먹은 것 같아 자못 흐뭇했.


그리고, 예민한 마누라와 여정을 함께 해준 그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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