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라미 Dec 25. 2021

아름답고 평화로운 점수 80점

100점이 뭐예요? 먹는 건가요?

시험 점수 몇 점 정도 나와야 공부 잘하는 거예요?

아직 자유 학년제로 내신 시험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딸아이의 물음이었다.

평균 90점 정도면 우등생이라 했던 것 같네.

느낌대로 대답했다.
라테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90점 정도면 꽤 잘하는 편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90점이라고 해도 그냥 얻어지는 점수가 아니다. 과목당 2개 또는 3개만 틀려야 나오는 점수이니 수업 시간에 집중하고 열심히 필기하고 달달달 외우고 꼼꼼하게 문제풀이를 해도 까딱 실수하면 얻을 수 없는 점수다.

80점은 어떤가? 음 약간 아쉽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좀 더 노력하지 않아서 안주하는 느낌이랄까? 100% 이상 노력해준다면 85점 또는 90점도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다.




이직 후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매번 100%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나는 슬로우 스타터 유형인지 때로는 조금 미련하고 무식했다.

업무 퍼포먼스는 내신 성적처럼 점수가 명확하게 나오는 게 아니기에 스스로 점수를 가늠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100% 이상의 노력을 하면 그게 90점은 되겠지 하고 우직하게 성실히 했다. 시간을 들이면 그나마 괜찮은 결과치가 나오고 인정받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정치력, 툴 활용력, 문서 작성력 , 발표력, 상황판단력, 센스력까지 종합 예술인에 가까운 퍼포먼스가 요구되기에 우직은 무식으로 성실은 미련으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었다.

마치 쉼 없이 논술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는데 상사는 첨삭을 따로 안 해주고 마음에 안 든다고만 했다. 뭐가 어디가 부족한지 잘 모른 채 미련 곰탱이같이 무식하게 열심히만 하다 낙제당할 위기에 몰렸다. 


문제는 내가 평균 90점이었는데도 특정 능력 점수에서 한참 모자라 과락을 한 것인지, 80점이라서 우등 직원 대열에는 못 낀 건지 노력이 부족해 보인 건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는 거다. 혹은 그냥 애초에 더 낮은 점수였는지도. 


이후 부서를 옮겼고, 이전과 달리 일단 힘을 빼고 시작했다. 여기에서도 실패하면 그냥 그만두자는 마음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나의 시각에서 자료를 만들었고 첫 관문은 다행히 통과했다. 기사회생.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첫 관문이 운빨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또 전력투구를 했다. 이곳에서라도 90점 이상을 받아보고 싶었다. 매 순간 집중했고 쥐어 짜냈다. 찝찝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한번 확인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내려고 애썼다.

주말 오전 밀린 집안일을 하고는 오후에 기어이 노트북을 여는 나를 보고 남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매번 그렇게 100% 이상을 해서
100점을 받으면 남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버려. 이제라도 80점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80%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남편 말대로 나는 결국 1년 만에 소진되었다.


90점을 넘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마음과 몸 상태는 점점 90점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니 우울하고 불안한데다 소화장애에 두통에도 시달렸으니 그냥 낙제였다.


부서 이동 직후 "여기에서도 실패하면 그만두자"라고 마음먹었었을 당시엔 오히려 마음이 편했었다. 그땐 그냥 80점만 하자는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기를 쓰고 전력질주 하다가 중도포기하거나 인정 받지 못해 내상을 입는 것보다는 애매한 이 점수가 낫다. 상사가 90점 직원이 되어야 한다고 채근한다면 능구렁이처럼 콧방귀를 뀌어 주자. 본인도 평균 90점은 못할테니. 그래도 찍어누른다면 그냥 박.차.고. 나와버리기로.


결국 돌고 돌아 80점으로 목표를 수정하게 될 것을, 수많은 날들을 괴로워하고 힘들어했구나.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80점을 목표로 해본다. 남들은 80점이 아쉽다 해도 그건 잠시 스치는 참견일 뿐이다. 내게는 90점 이상이 되기 위해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 80점을 유지하며 마음을 느긋하게 하는 편이 더 유익이므로.


인생은 그런대로 괜찮으면 된다.


p.s. 더 낮은 점수도 OK. 아니 그냥 점수를 매기지 말아볼까 봐.

매거진의 이전글 회사에 남기로 했어도, 숨 쉬는 걸 잊어선 안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