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의저편 Dec 21. 2023

압둘라자크 구르나 [배반]

노벨문학상 수상작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늘

울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이 말은 박경리선생의 [토지]에서 인용한 말 입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의 강제 노동을 참다 못해

탈출한 노동자가 일본인 할머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후,

그 할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말 한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들을 일본군에 보내면서 눈물없는 울음으로 나날을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타지의 아들들도 혹시 도망가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자신도 누군지 모를 조선 청년에게 호의를 배풀었다는 것 입니다.


그 할머니는 내지인이고 그 청년은 이방인 이였습니다.

그 조선 청년은 강제노동자들의 동료애의 배반이었고,

그 할머니는 조국의 배반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배반과 배반의 역설에 따뜻한 온기마저 전해지는 모순을 경험합니다. 제국과 식민지, 나와 타자...


'M'님은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이상은 배반을 했다고

보는데 작든 크든 다양한 배반의 틀안에서 배반의 경계의 용서와 단죄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보는 시간과 배반의 삶 그리고 배반의 역사에서 개인의 배반적 정체성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생각해보는 시간은 오래오래 가슴을 두드리는

질문들로 남았습니다.


 배반은 어떤 대상과 어떤 장소로부터 내지인과 이방인,

나와 타자 두 정체성을 경험합니다.

그 타자화 된 정체성을 배반이라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정체성에 우린 의식하지 않고 묻혀 살지만, 노벨문학수상작인 [배반]의 작가이자 실제 주인공인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자신의 타국의 이방인 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에 깊은 의식,

그것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죄의식 비슷한 빚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과 타자(고향, 조국)에게 고백을하는 장면이 바로 [배반]의 주제라고

생각 했습니다.


어찌보면 고백보다는 참회의 심정과 극심한 향수병의 그리움과 따뜻함마저 전율하는 이 책은 파노라마 형식의 

구성 (1부2부3부)을 빌려 전개를 착실히 밟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탐정소설의 극적인 반전이 있는 소설이다"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인정합니다. 여튼 독토의 'D'님께서는 독토의 중심주제를 배반에 방점을 두고 줄기있게 토론의 물길을 내셨습니다.


특히 "낮선 사람이 집으로 돌아왔다"의 글을 차용하면서 집을 떠남과 돌아옴의 관계속에 우린 내지인과 이방인의 모습의 연출을 한다고 하며, 그것은 배반과 배반의

서사라고 토론했습니다. 집을 떠나 방황하고 새로운것을 경험하고 하는 것 은 디아스포라의 서사라고도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결국 디아스포라는 상처와 상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움의 경험과 인내와 도전 그리고 연단끝에 소망

의 싹을 이뤄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졌기 때문입니다.


지구촌에는 다양한 국가와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아마도 제국식민주의 시기 이전에는 각 나라와 나라마다 분명한 경계선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지형의 변화와 기후의 변화로 나라의 경계로

삼았을 듯 합니다.


그러나 1800년 대 이  총의 발명으로 제국식민주의는 뿌리를 내립니다. 그것은 열강의 탐욕구조를 트리구조로 뻗어가면서 그 제국식민주의 는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엔 주인공이 살았던 '잔지바르' 가 있습니다.

지금의 탄자니아 국가의 인도양 연안의 해변이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작고 조용한 지역입니다.

이곳은 다종교 다문화 지역에다 영국 제국주의 식민지

아래 그야말로 작은 마을은 무지개색과 같은 다양성의 문화를 간직합니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국가는 각 식민지를 색으로 표현했습니다.  토론에서 'O'님은 "식민국가들이 색으로 아프리카 분활을 했다는 것이 각 나라의 국기의 특징으로 한 것이라는 추론속에, 그렇다면 '백의민족'으로 불리우는 우리나라의 색은 어떤 색으로 하면 적절할지의 의문을 남겼습니다. 국가의 운동팀들의 유니폼에서 그만의 색이 상징하는 의미가 있 듯,

제국주의 색으로 지배하는 식민지를 색으로 규정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발제했습니다.


나는 이 추론이 참 오래 남았습니다. 색에는 상징성이

있고 의미가 있어서 우린 색으로 여러가지를 표현하고

규정하고 심지어 감정의 상태도 색으로 표현합니다.

색에는 분명 교류가능한 기능이 있다는 의미 이겠지요.


'잔디바르'는 영국제국주의 식민지 이후에 급격히

영국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갑작스런 쿠테타에 빠져들고

그 후유증은 학살수준의 참사와 홀로코트와 자국 내 또다른 디아스포라를 야기했습니다. 사뭇 파란만장한 우리나라의 짧은 기간의 격변기가 스쳐지나갔습니다.여전히 우리

나라는 식민제국 대분활체제의 여파인 분단체제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 작은 나라 안에서는 또다른 디아스포라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 노동현장에서 겪는 각종 인권

침해와 나와 타자, 내지인과 이방인의 디아스포라입니다.


 'I'님은 호주 유학때의 호주의 다민족에 대한 열려있는 호주민의 이방인의 남다른 수용성에 대해, 한국의

이방인에 대한  폐쇄적인 문화와의 비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호주의 '백호주의'의 언론기사가 가끔나오지만 여전히 호주의 다양성의 존중과 수용에 호주의 꿈을 꾸게

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넓은 대륙만큼 마음 씀씀이도 넓은 것일까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다가오는순간

이였습니다.


나는 책 [배반]을 이렇게 읽어 내려갔습니다.

1부 와 2부는 저자가 3자의 시선으로 지루하리만큼

세세한 주변 상황묘사와 풍경묘사 그리고 인물의 심리묘사와 대화를 파노라마 형식으로 시선흐름을 끌어가면서 그것이 저자가 타국(영국)에서 이방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조국과 고향의 그리움과 향수 그리고

결코 이방인된 자신이 고향과 가족을 기억속에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런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설에 표현한 것이라 느껴져 울적 했습니다.

그의 누나는 그녀의 시집발간 추천사에 그에 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p310~311

"그런데 이제는 내 여행이 끝났을까봐, 평생 영국에서 고립무원의 이방인으로 살게 될 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견딜 만한 이방인다움에 젖어들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 이방인 다움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저자가 서사하는 배반에는 버턴과 레하나의 혐오적인(잔디바르 지역인의 시선으로, 유럽 식민제국주의 국민을 혐오했다)

사랑으로 결국 버턴은 자신의 고국으로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저자의 형인 아민과 이혼녀인 파리다와의 금지된 사랑은 결국 가족과 주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이별을 택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영국 유학(실제로는 영국 망명)을 끝내고 가족의 어려운 상황(조국의 쿠테타와 새 국가의 탄생과 학살)에 결국 영국에 잔류를 선택합니다. 그 사이 그의 조국과 고향은 쿠테타의 학살을 경험합니다.


이로써 저자가 서술하는 배반의 서사는 사랑의 배반과 조국과 가족의 배반으로  크게 나눠집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조국과 가족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결국 책을 통해 전 세계 모든 독자에게 자신의 배반과 상실하지 않은 심적 정체성은 여전히 살아서 조국과

가족의 정체성과의 동질성을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배반의 제목으로 자신의 참회를 소설을 통해 표현하지만, 독자인 나는 형식적 배반이 었으나 진실적 정체성은 여전히 그가 함께 하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육체적 사랑은 진실한 에로스가 아니라는 논리라면 국가간의 경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버턴과 레하나의

사랑과 아민과 파리다의 육체의 서사가 형식이라면 주인공의 몸은 이방인 된 몸으로 타국에 있으나 꾸준한

그의 '잔지바르' 정체성에 관한 서사는 그가 몸을 초월한 진정한 그의 국가와 가족의 일원으로 한번도 그들을

 떠난적 없다던 그의 누나의 고백 - '우리를 떠난 적 없는 라시드' 이 진실로 다가 온 것이였습니다. 그렇기에 나와 여러분 모두가 어떤 대상과 어떤 장소로부터 이방인된 타자가 되었을지라도 그의 함께하는 정체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배반이 아닌, 역설로서 한 번도 떠난적없는 것이 되겠지요. 저자는 배반의 역설로 한 번도

떠난적 없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문학의 안아줌에 의지 했다고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