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부국 미국의 어두운 민낯, 그래도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있다.
모두가 아는 대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다. 하지만 미국에도 엄연히 빈부격차는 존재한다.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 LA, 시카고 등 대도시들이 미국의 부와 번영을 상징한다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중남부는 빈곤과 낙후의 대명사와도 같은 지역이다.
이 지역의 일부는 1인당 GDP가 $14,000 ~ $15,000(세계 60위 수준, 남미의 빈국 칠레(58위)나 동유럽의 빈국 루마니아(59)보다도 낮고, 세계 평균인 $13,971를 살짝 상회하는 수준이다. 미국 전체는 $76,027로 세계 8위, 참고로 대한민국은 $34,994로 세계 29위 - 출처: World Economic Outlook - GDP per capita(IMF) April, 2022)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곳이 정말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GDP 순위 세계 1위) 미국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곳을 배경으로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한 백인 소년이 만난을 극복하고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Law school)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촉망받는 청년 벤처 사업가로 출세하기까지의 성공담을 다룬 회고록이 바로 <<힐빌리의 노래>>다.
이 책의 원제는 'Hillbilly Elegy', 직역하면 '촌뜨기의 애가(哀歌) 혹은 비가(悲歌)' 정도 되겠다. 'Hillbilly'는 미국 벽촌에 사는 백인 저학력, 저소득층을 가르치는 멸칭(蔑稱)으로 'Redneck' 또는 'White Trash'와 동의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저자 J. D. Vance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州의 철강도시 미들타운에서 태어나 켄터키州의 탄광촌 잭슨을 오가며 자란 힐빌리 출신이다. 저자는 책에 자신의 출신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백인이긴 하나, 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인 와스프(WASP)는 아니다. 나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핏줄을 타고 난 데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 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 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부의 노예 경제 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 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Hillbillies), 레드넥(Rednecks), 화이트 트레시(White Trash)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른다. - 프롤로그, P.24
밴스는 이른바 흙수저 출신이다. 그의 가정환경은 불우하다 못해 비참할 지경이다.
밴스는 열여덟 살에 혼전임신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한 어머니와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부(親父)는 그가 막 걸음마를 뗄 무렵 고작 양육비를 아끼려고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리고, 그 후 어머니는 수많은 남자들과 번갈아가며 동거를 이어가지만 번번이 파경을 맞는다.
밴스의 청소년기는 온통 가난, 절망,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있다. 직업도 없는데다가 마약중독에 빠진 어머니는 허구한 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소리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며 날을 지새운다.
불우한 가정사에 유년기부터 깊은 정서적 상처를 입고 자포자기에 빠진(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상태를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ACEs: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이라는 전문적인 심리학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고 있다. - 제2부 14장 P.363)
밴스에게 집안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다. 학교에 가는 것도 싫었지만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는 게 두려울' 만큼 가정은 어린 밴스에게 공포와 고통을 안겨주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할지 암울하기만한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일어난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어머니가 정도가 지나쳐 열두 살의 밴스를 죽일 듯이 심하게 때리고 이로 인해 체포돼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판사는 미성년자인 밴스를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와 떨어져 할머니(한글 번역본에서는 본가, 외가의 구분 없이 그냥 할머니로 지칭하고 있지만, 사실 저자의 어머니의 친어머니 즉, 외할머니다.)와 함께 살도록 판결하고 이때부터 그의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밴스가 할모(Mamaw: 이 책에선 조모(祖母)를 가리키는 미국 남부 방언이라 소개하고 있지만 원래 조모나 친모를 가리키는 게일어(Gaelic: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원주민의 언어) 방언이다. 저자의 혈통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라고 부르는 할머니는 본인도 성공적인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중졸에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평생 전업주부로 가난하게 살았으며, 원만치 않은 결혼생활 속에 여덟 번의 유산을 포함해 아홉 아이를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굳은 의지, 그리고 손자를 향한 깊은 애정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입에 욕을 달고 살고 불의를 보면 총을 뽑아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밴스가 대마초를 피우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 그들을 차로 들이받아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그가 방과 후 숙제를 게을리하면 불같이 화를 낼 만큼 꺽진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밴스에게 인생의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밴스에게 생애 처음으로 가정의 안온함을 맛보게 해주고, 실의에 빠진 손자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 공부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독려한다. 할머니의 지지와 후원에 힘입어 밴스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던 학업에 다시 정진해 오하이오 주립 대학(Ohaio State University)에 입학하게 된다.
밴스의 인생에 두 번째 전환점이 된 것은 해병대 입대였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군대에 복무하면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군복무를 마친 제대군인들에게 대학교 학비를 지원하는 '제대군인원호법'을 제정한다. 이를 일명 G.I. bill이라 부른다.)는 사촌 누이의 조언에 따라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해병대에서 밴스는 노력의 가치와 규율준수, 자기관리의 중요성과 방법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힐빌리 문화와는 정반대의 해병대 문화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강도 높은 육체적 훈련,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는 규칙적인 생활습관, 취식 관리를 비롯한 엄격한 자기관리를 강조하는 복무 환경 등 해병대에서 보고 배운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제대 후 공부에 매진한 밴스는 만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계적인 명문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州 실리콘밸리의 전도유망한 벤처 사업가로 성공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주목할 점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이 책은 뉴욕의 초고층 빌딩숲과 월 스트리트,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 LA의 베벌리힐스와 로데오 드라이브, 할리우드 등 일순 화려하게만 보이는 부강한 나라 미국에도 화려함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바로 저자가 힐빌리라고 부르는 백인 저학력, 저소득 계층의 신산한 삶이 그것이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의 물결이 지구촌을 휩쓴 지난 30년간 미국 국내의 빈부격차는 급속도로 벌어졌다. 세계화와 제4차 산업혁명에 편승해 개인의 부를 크게 늘린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서 소외돼 빈곤층으로 전락해 버린 다수가 버젓이 공존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의 급격한 양극화를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극빈가에 거주하는 백인 노동계층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70년에는 백인 어린이의 25%가 빈곤율이 10% 이상인 동네에 거주했다. 2000년에는 그 수치가 40%로 증가했다. 현재의 수치는 이를 훨씬 웃돌 게 분명하다.' - 제1부 4장, P.99
미국은 사회 양극화에 따른 소외 계층의 증가와 가정의 해체, 그리고 그 부작용인 일탈 범죄가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총기난사 사건, 인종차별, 증오범죄, 마약중독 문제 등은 현대 미국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미국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파고든 포퓰리스트 선동 정치가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 前대통령이다. 2016년, 그는 다수의 백인 힐빌리들의 분노와 좌절을 이용해 예상을 뒤엎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기는커녕 미국 사회를 크게 후퇴시켰고 미국과 세계를 혼란과 분열로 몰아넣었다.
아마도 이 책은 미국의 드러나지 않은 음습한 이면을 들여다보기에 더없이 적합한 교과서가 아닐까 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기에 읽기도 수월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치부를 제대로 파악하기에 그 어떤 저명한 사회학자의 통찰력 있는 저서보다도 더 훌륭한다.
둘째, 그래도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병폐에도 불구하고 밴스가 자수성가한 것을 보면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고 아메리칸 드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밴스의 출생 배경은 비참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도 비참한 미래를 앞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중퇴를 가까스로 면했고, 주변 사람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지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최근에 알게 된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간판과 직업만 보고서 내가 무슨 천재라도 되는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전부 헛소리다. 타고난 재능 따위를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이 구해주기 전까지 나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었다.' - 프롤로그, P.22~23
하지만 밴스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와 실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가 만난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비범한 존재다. 밴스는 자신이 속한 힐빌리의 환경을 '내가 사는 세상은 정말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가득한 곳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가난한 살림에서 지출을 늘려나간다. 거대한 텔레비전과 아이패드를 산다. 이자가 센 신용카드나 고리대금을 얻어서 자식들에게 좋은 옷을 입힌다. 필요하지도 않은 집을 매매하고 그걸로 재융자를 받아 소비를 더욱 늘리다가 결국 쓰레기로 가득 찬 집을 떠나며 파산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파산한 사람들은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에 빠저 신분 상승이 평생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해 버린다.' - 제2부 9장, P.244
힐빌리들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고 불만을 갖지만 이를 개선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남 탓만을 해댄다. 그러나 같은 처지였던 밴스는 이런 부류를 매섭게 비판한다.
남들에게는 근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부당한 대우 때문에 일을 못 해먹겠다고 합리화한다. 오바마가 탄광을 폐쇄했기 때문이라느니,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죄다 차지했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이유를 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죄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생겨난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거짓말이다. - 제2부 9장, P.246
푸드 스탬프(food stamp)를 팔아 마약을 사는 복지의 여왕(welfare queen)들을 향해 '복지 제도에 기대 놀고먹는 사람들이 정부에서 돈을 받으며 사회를 비웃는다!'라고 질타한다.
이와 같은 힐빌리의 사고방식과 행태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저자의 어머니다. 그녀는 한 때 촉망받는 고교생이었으나 문란한 사생활로 인생을 망치고 결국 마약중독자로 전락해 버린다.
밴스와 외할머니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밴스는 출생이라는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은 불운아였으나 그의 인생이 철저히 불운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밴스의 곁엔 인생을 구원해 준 외할머니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인이었다.
밴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그런데 과연 밴스가 속한 환경이 진정한 의미의 개천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밴스가 자신의 인생을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을 부정한 생각은 없다. 그는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제대 후엔 어마어마하게 비싼 아이비리그 법학대학원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three job을 뛰고 하루 3~4시간만 자가며 공부하느라 과도한 학습에 과로가 겹쳐 전염성 단핵증(mononucleosis)과 포도상구균 감염(staphylococcal infection) 합병증으로 병원 신세까지 져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학업을 이어가 마침내 인생의 성공을 이룬다.
하지만 그가 미국인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것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밴스가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을 때 목도한 이라크인들의 현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이 군대에 간다고 대학 학비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라크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보장된 미래가 있을까?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캡틴 필립스(Captiain Phillips)>(2013)를 보면 개심해 다른 인생을 살아보라는 필립스 선장의 설득에 소말리아 해적은 "당신은 미국인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나에겐 이 짓 외엔 먹고살 길이 없어!"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밴스가 미국이 아니라 동시대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혹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성공 신화는 없었을 것이고 이 책 또한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밴스는 행운아였다. 다시 말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그곳이 '미국'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새삼 인생에서 차지하는 국적과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뒷맛은 영 개운치 않다. 이 책 속에 실감 나게 묘사된 미국의 양극화 문제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밴스의 성공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인생을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긍정적인 감동이 느껴지다가도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하는 중압감에 시달리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는 밴스의 성공 신화 역시 후일담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 책 속에서 힐빌리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 부르며 따뜻한 연민의 정을 내비쳤던 밴스가 최근 정계에 입문하더니 평소 비난(밴스는 트럼프를 '미국의 히틀러'라고 맹비난했었다.)해 마지않던 트럼프의 열혈 추종자로 돌변해 버렸다.
결국 밴스가 추구해 온 인생의 성공이란 자신의 출신 성분을 부정하고 와스프(WASP)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나,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평생을 지켜온 신념마저도 한 순간에 저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 밴스의 진면목이었나 하는 실망감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용(龍)'은 되지 못한 듯하다. 이래저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