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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사대제 Dec 30. 2023

Book Review  <<1984>>

조지 오웰이 예견한 미래의 디스토피아

나는 중학생이던 1985년 여름방학 중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당시는 군사정권이 집권하던 시기로 교육당국은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1984>>를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강요했었다. 


나는 그때 그저 여름방학 숙제였기에 읽기 싫은 책을 억지로 읽고(사실 이 책은 중학생이 읽고 이해하기엔 너무 수준이 높은 책이다.) 공산주의는 나쁘다는 식의 형식적인 독후감을 학교에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무렵 소설 <<1984>>는 연도가 주는 상징성 때문에 출판 36년 만에 재조명받으며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었다. 그 열기를 타고 1985년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영화 자체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영국의 팝 듀오 유리드믹스(Eurythmics)가 부른 주제가는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나도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영화 주제가 <Julia>를 무척 좋아했었다. 에코 효과를 이용해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테크노 팝 형식의 주제가는 지금 들어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얼마 전 우연히 중학교 시절 옛 추억이 어린 소설 <<1984>>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38년 만에 다시 펼쳐든 이 책의 흡입력은 정말 대단했다. 책을 손에 잡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독파해 버렸다. 세월이 흘러 연륜이 쌓인 덕분인지 어렸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소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소설은 1984년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조지 오웰은 이 소설을 1948년에 집필했다. 지금은 1984년이 이미 과거 시점이 되어버렸으나 집필 당시엔 36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쓴 것이다. 소설의 제목 '1984'는 집필 연도의 뒤 두 자리 숫자를 뒤집은 것이라고 한다.) 


핵전쟁 이후 세계는 유라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이렇게 세 개의 초강대국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세 나라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히 철저한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중에서 오세아니아는 영국 사회주의(INGSOC) 이념을 바탕으로 당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무시무시한 일당독재 국가다. 권력의 정점에는 당의 지도자 '빅 브라더(Big Brother)'가 군림하고 있다. 빅 브라더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의 실체를 모르는 신격화된 권력자다. 


당은 국민을 내부당원, 외부당원, 프롤(프롤레타리아의 줄임말, 노동자 계급)로 삼분해 모든 기록을 조작하고,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언어와 사고를 철저히 통제해 절대 권력을 유지해 간다. 당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지워질 정도로(소설 속에서는 이것을 '증발'이라 부른다.)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오세아니아 제3의 도시 런던에 살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각종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진리성 기록관리국에서 일하는 외부당원이다. 독재 체제에 염증을 느낀 윈스턴은 작은 반항을 시도한다. 텔레스크린을 피해 일기를 쓰고 동료 여직원 줄리아와 밀회를 즐긴다. 


은밀한 일탈과 반항에서 삶의 의욕을 느낀 윈스턴은 연인 줄리아와 함께 당의 반역자 골드스타인을 추종하는 반체제 지하조직에 가입해 빅 브라더 타도와 체제 전복을 기도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의 감시망에 걸려 체포되고 사상범죄를 관리하는 애정성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세뇌교육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윈스턴은 인간성이 말살될 정도로 정신과 자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철저한 세뇌교육에 따라 당이 원하는 인간형으로 개조된 윈스턴은 비록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혼은 죽어버린 산송장에 불과하다. 그는 마침내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파멸해 간다.

    



국내엔 <<1984>>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소설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조지 오웰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을 모델로 이 소설을 썼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를 혐오하고 경계했다. 조지 오웰은 1930~40년대 파시즘이 유럽을 휩쓰는 것을 목도하고 전체주의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는 파시즘에 맞서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그 자신이 온건한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스탈린의 독재와 폭정을 지켜보고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조차 서로 다른 두 전체주의의 대결이라 보았다. 조지 오웰은 이후 국가가 안보나 공익을 내세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국가 우선주의에 반발해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 소설 속엔 이 같은 조지 오웰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국가 주도의 전체주의를 통렬히 비판한다. <<1984>>는 독재 권력이 어떻게 조작과 선동을 통해 대중을 기만하는지, 감시와 폭력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고 짓밟는지 극명히 보여준다. 영국 사회주의당의 강령인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정치 구호는 전체주의와 독재 권력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구호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심도 있게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전쟁은 평화

소설 속 오세아니아는 영구 전쟁 중이다. 당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고 선전한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는 것은 독재 정권이 늘 사용해 온 고전적인 수법이다. 체제 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도발을 일삼는 북한이나 미국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민자들이나 중국의 탓으로 돌려 국제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트럼프 前대통령의 행태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 자유는 예속

자유는 방종과 다르다. 자유는 책임을 수반하는 부담스러운 개념이다. 


대중은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짊어지느니 차라리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지도자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사회가 혼란하고 삶이 어려운 시기엔 이런 경향이 짙어진다. 


1930년대 나치는 독일인들의 자유에 대한 책임회피와 나약한 심리를 파고들어 집권했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런 현상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불렀다. 


'자유는 예속'이라는 문구는 자유가 권리이자 곧 의무(그러므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이며 숭고한 가치를 지닌 개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부정한다. 



셋째, 무지는 힘

독재자들은 국민이 똑똑하고 의식 있는 시민이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지배자의 통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복종하는 우매한 노예이길 바란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우민화 정책을 편다. 3S 정책은 대표적인 우민화 정책 수법이다. 


이 소설 속엔 보다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우민화 정책 수단이 등장한다. 빅 브라더는 언어를 이용해 세뇌 공작을 펼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언어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세아니아에서는 신어(newspeak)라는 사상통제용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신어란 기존 언어의 어휘나 문법 중 굳이 필요치 않은 요소들을 없애거나 단순화시킴으로써, 국민 전체가 이른바 '이중사고'를 익혀 당에 대한 반역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고안된 언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당의 강령은 이중사고를 대변한다. 당을 구성하는 4개의 기관명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성, 사상범죄를 관리하는 애정성, 날마다 배급량 감소를 발표하는 풍요성,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진리성', 반어법을 이용한 조지 오웰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오세아니아에는 신어 이외에 사상통제와 집단 세뇌의 수단이 하나 더 있다. 주인공 윈스턴은 진리성에서 과거 신문기사를 수정, 조작하는 일을 한다. 당은 정보 통제와 조작에 광분한다. 오세아니아에서 '2 + 2 = 5'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사조차 당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된다. 조지 오웰은 주인공 윈스턴의 입을 빌려 역사 왜곡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묘사한 미래는 끔찍하다. 


정보 조작으로 보편적인 진리조차 부정되고 개인의 자유는 내면의 자유조차 억압당하며 사회는 오직 폭력(대외적으로는 전쟁, 대내적으로는 고문과 세뇌)으로만 유지된다. 인류가 누대에 걸쳐 이룩한 문명은 사라지고 야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도 오세아니아 국민들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지 않는다. 아니 저항의 의지조차 없다. 체제에 의심을 품는 자는 오직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뿐이다. 그러나 윈스턴마저 고문과 세뇌에 무너져 버리고 희망이 사라진 세상은 암흑에 뒤덮인다. 


원스턴은 자유, 이성, 정의의 마지막 희망을 상징한다. 조지 오웰은 이 같은 상징성을 내세워 이 소설의 제목을 애초 '마지막 유럽인(The last man in Europe)'이라고 지으려 했다.('1984'는 출판사에서 선택한 제목이라고 한다.) 


물론, 1984년은 이미 지나갔고 조지 오웰이 예상한 디스토피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소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시민들이 조금만 방심해도 독재와 전체주의의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나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의 파시즘이 그랬고, 20세기 후반에 공산주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21세기가 도래한 지금도 독재와 전체주의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세계 곳곳엔 독재와 전체주의가 만연해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크게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6년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우민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어 적극적인 선동과 여론 조작을 통해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미국 사회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놀랍고 또 개탄스럽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권리이자 의무이다. 국민이 시민의식을 잃어버리고 자유 수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면, 그리고 대중의 우민화가 지속돼 나라의 집단 지성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민주주의는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독재자의 유무나 국가체제에 상관없이 과학, 기술 발달과 이에 따른 사회 변화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1948년 <<1984>>가 집필될 당시 조지 오웰이 상상해 낸 감시 장치는 기껏해야 텔레스크린(당시는 아직 TV가 일반화되기 전이었다.)과 마이크로폰 정도였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현대의 감시 장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고 정교해졌다. 인공위성이나 드론을 이용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시간으로 감시, 감청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인터넷과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안면인식 시스템이나 위치추적 장치 등은 이미 일부 국가에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첨단기술을 활용한 감시 시스템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와 독재 조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팬데믹 기간 중에 우리나라에서 COVID-19 확산 저지를 위한 K-방역의 일환으로 확진자의 스마트 폰을 이용해 위치 추적을 한 것을 두고 프랑스에서는 인권침해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이제까지 독재의 주체는 늘 국가권력이었다. 그런데 기술발달과 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국가가 아닌 기업이나 사조직에 의한 독재 가능성을 드러냈다. 기업들의 빅데이터를 활용한 공격적인 마케팅 기법이나 현란한 상업광고는 독재 정권의 선전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개인들이 인터넷이나 SNS를 활용해 가짜 뉴스를 생산, 전파하는 행위나 IS와 같은 테러조직이 인터넷을 통해 선전, 포섭 공작을 벌인 사례 등은 정보화 시대가 당면한 새로운 유형의 위협이 어떤 모습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첨단기술의 발달은 기술이 단순히 독재의 수단이 아니라 주체가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무비 <터미네이터(Terminator> 시리즈나 <아이, 로봇(I, Robot)>(2004)을 보면 인간의 편리를 위해 제작된 컴퓨터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모습이 등장한다. 


근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AI)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영화 속 암울한 미래 예측이 말짱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현대인들은 조지 오웰이 살았던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다양한 위협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세월이 흘렀건만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 돼 버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설 <<1984>> 속에 그 해답이 있다. 조지 오웰은 우리에게 침묵하는 대중이 아니라 항상 깨어있는 시민(시민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나라 헌법에 의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자유민'으로 규정되어 있다.)이 되라고, 과감히 불의에 맞서 싸우는 행동하는 지성이 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설 <<1984>>를 고전으로 높이 평가하고 두고두고 곱씹어 가며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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