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분열과 대립의 역사
표지 사진: 이라크 남부 도시 나자프(Najaf)에 위치한 이맘 알리 마스지드(Imam Ali masjid), 제4대 칼리파이자 초대 이맘이었던 알리의 영묘(靈廟)다. 쉬아 무슬림의 대표적인 성지로 786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9세기까지 끊임없이 증축과 보수가 계속되었다. / 출처: 나무위키, <나자프>
일러두기: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아랍어 표기법이 없어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아랍 인명과 지명, 역사 용어 등은 한국이슬람학회의 공식 표기에 따라 기술하였습니다.
7세기 초반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원한 이슬람(Islam: 아랍어로 “복종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살라마(asalama)에서 유래한 명칭이다.)은 알라(Allah, 창조주 하나님 즉, 유일신(唯一神)을 의미한다.)의 뜻에 절대복종하고 알라가 정립한 질서 아래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그래서 이슬람 신자 무슬림(Muslim)은 아랍어로 “귀의한 자” 혹은 “복종하는 자”를 뜻한다.
이슬람은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보편성과 신앙의 단일성(샤하다(Shahada: 신앙고백): 알라는 위대하고,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리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을 강조하고 교인들 사이에 우애와 공동체 의식을 중시하는 종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순니(Sunni)와 쉬아(Shia) 이렇게 두 종파로 나눠 있다. 순니는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제시한 규범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교도라는 의미로 전제 무슬림의 약 85%를 차지한다.
반면에 쉬아는 제4대 칼리파(Khalīfah: 칼리파 라술 알라(Khalīfat Rasūl Allāh: 신의 사도(使徒)의 후계자)의 약어)이자 쉬아파의 초대 이맘(Imam: 쉬아파의 종교적 수장)인 알리를 지지하는 종파다. 쉬아는 순니에 비해 이슬람 교리에 더 엄격하고 원리주의를 강조하는 편이다. 전체 무슬림의 약 15%가 쉬아파에 해당한다. 그런데 ‘쉬아파'라는 명칭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아랍어로 쉬아는 파(派)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쉬아파는 우리말로 ‘派派’가 된다. 본디 알리를 지지하는 집단이라는 의미로 알리派(Shi'ite Ali)에서 시작된 명칭이었으나 후대에 ‘알리'의 이름이 생략된 채 그냥 쉬아(派)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순니와 쉬아는 같은 이슬람을 신봉하면서도 상대방을 공히 이단(異端, heresy)이라 비방하고 서로 통혼(通婚)을 금지할 만큼 반목하고 대립해 왔다. 중세에는 두 종파 간에 전쟁(실제로 10세기 초반 이집트에서 발흥한 쉬아파 파티마 왕조는 순니파 척결을 기치로 내걸고 압바스 왕조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에 비견할 만한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현대에도 순니와 쉬아는 서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앙숙이다. 대체 왜 두 종파는 1,400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서로 갈등과 대립을 빚어 온 걸까? 이 해묵은 갈등의 원인을 찾아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계로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632년 6월 8일, 메카 순례 중이던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열병에 걸려 향년 62세로 사망하자(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의 죽음을 승천(昇天)했다고 표현한다.) 이슬람은 후계구도를 놓고 내홍에 휩싸인다. 무함마드는 평생 10명의 아내와 2명의 첩을 두었으나 끝내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메디나를 대표하는 안사르(Ansar: 헤지라 이후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지지한 집단)와 메카가 근거지인 무하지룬(Muhajirun: 헤지라 당시 무함마드를 따라 메디나로 이주한 원조 무슬림 집단)은 서로 자기 진영에서 무함마드의 후계자가 선출되길 원했다.
후계구도를 놓고 벌어진 이 두 세력 간의 갈등 때문에 이제 막 국가의 지위에 올라선 이슬람 공동체(움마 : Ummah)가 분열될 위기에 놓이자 움마는 무함마드의 오랜 친구이자 장인이었던 이슬람의 제2인자 아부 바크르(Abū Bakr, 재위: 632~634)를 초대 칼리파로 추대한다.
아부 바크르는 헤지라 이전부터 무함마드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고, 헤지라 이후에도 무함마드가 메카와 전쟁을 치르는 내내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메카를 점령한 지 2년 뒤 그가 사망할 때까지 실질적인 오른팔 역할을 했기에 움마 내에서 절대적인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움마는 안사르와 무하지룬 사이의 갈등을 봉합할 최선의 인물로 아부 바크르를 지목한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칼리파로 추대될 당시 알리(Alī ibn Abī Ṭālib, 제4대 칼리파, 재위: 656~661)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칼리파의 자리를 후에 2대 칼리파에 오른 우마르(Umar ibn al-Khattāb, 재위: 634~644)에게 양보하는 겸손의 미덕을 보임으로써 움마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또한 이슬람의 수도를 메카가 아닌 메디나에 존속시킴으로써 안사르의 반발 또한 잠재웠다.
초대 칼리파에 오른 아부 바크르는 비록 재위 기간이 2년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영도력을 발휘해 이슬람의 분열을 막고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이슬람 제국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아부 바크르 사후 칼리파의 자리는 이슬람 교단의 선출에 따라 제2대 우마르, 제3대 우스만(Uthmān ibn ‘Affān, 재위: 644~656), 제4대 알리에까지 이어진다. 역사는 이 시기를 ‘정통 칼리파 시대(Rashidun Caliphate, 632~661)’라고 부른다. 이 시기 이슬람은 교세와 영토를 크게 확장해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이란고원에서 북아프리카까지 넓은 영역을 통치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정통 칼리파 시대’는 일견 태평성대로 보이지만 사실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갈등과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초대 칼리파 선출에서 소외당한 알리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지지자들을 규합해 은밀히 칼리파의 권좌에 오르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로 혈통으로만 따지면 당연히 초대 칼리파에 오를 자격이 있었고, 메카와의 전쟁 기간에도 많은 공을 세워 무함마드 생전에 무함마드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무함마드는 공개 석상에서 “여러분 중 나를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알리를 당신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받은 이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초대 칼리파 선출 당시에도 많은 무슬림들이 알리의 혈통의 정통성을 내세워 그를 지지했으나, 아부 바크르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밀려 알리는 분루(憤淚)를 삼키며 칼리파의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러나 알리를 지지하는 극렬 세력의 반발은 극심했고, 이 과정에서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아내였던 파티마가 충격을 받아 유산을 할 정도로 아부 바크르 지지파와 격렬히 대립했다.
아부 바크르 사후에도 알리는 계속해서 칼리파 등극을 시도했으나 무하지룬의 장로였던 우마르와 우스만에게 밀려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제2대 우마르와 제3대 우스만이 연이어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알리는 20여 년 만에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칼리파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칼리파 알리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제3대 칼리파 우스만을 배출한 우마이야(Umayya) 가문은 이슬람 제국을 칼리파의 제위(帝位)가 자신들의 가문에서만 대대로 이어지는 세습왕조로 만들 욕심을 품고 선대 칼리파 우스만 암살의 배후에 알리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제4대 칼리파 알리를 음해했다. 이 악의적인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 결국 이슬람의 분열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무함마드 이래 칼리파는 동로마제국의 황제(동로마(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제위(帝位)와 동방정교(東方正敎: Eastern Orthodox churches)의 수장을 겸하는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군주였다. 따라서 명칭도 서로마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카이사르(Caesar)나 임페라토르(Imperator)가 아닌 바실레우스(Basileus)라고 불렸다.)처럼 정교일치의 황제였다.
동로마제국의 바실레우스가 종교의 수장을 겸하는 전제군주였던데 반해 이슬람의 칼리파는 정치적 권력도 겸비한 종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칼리파는 종교적 권위가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통치자였다.
그런데 이제 이슬람은 혈통을 바탕으로 종교적 권위를 강조하는 알리파와 세속 권력을 기반으로 종교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순니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양측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폭발하고 만다. 우마이야家의 수장이었던 시리아의 술탄 무아위야 1세(Muʿāwiyah ibn ʾAbī Sufyān, 602~680, 재위: 661~680)가 세력을 규합해 칼리파 알리에게 도전한 것이다.(제1차 피트나, The First Fitna: 피트나는 이슬람의 종교 용어로 알라가 정립한 평화(살람, Salaam)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불신자(不信者) 또는 이교도들이 알라의 뜻에 항거해 벌이는 소동이나 폭동을 일컫는다.)
제4대 칼리파이자 마지막 정통 칼리파였던 알리는 제위에 오른 지 불과 5년 만인 661년, 우마이야 가문과 전쟁 중에 무아위야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제 2 장 카르발라의 참사 그리고 순니파의 승리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