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분열과 대립의 역사
표지 사진: 이라크 남부 도시 카르발라의 이맘 후사인 마스지드 앞에서 아슈라 축일을 맞아 아르바인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운집한 케르발러이(Kerbalâyi: 카르발라를 성지순례하는 쉬아파 무슬림을 지칭하는 명칭)들 / 출처: 나무위키, <카르발라 참극>
알리를 암살하고 예루살렘(Jerusalem)에서 제5대 칼리파에 등극한 무아위야는 이슬람 제국의 수도를 메디나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로 옮기고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750)를 개창한다. 이로써 이슬람 제국은 종교 공동체(움마 : Ummah)에서 세습왕조로 탈바꿈하게 된다.
혈통과 종교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알리파는 이에 반발해 알리의 차남(알리의 장남 하산(Hasan ibn ‘Alī ibn Abī Tālib, 625~670)은 이미 독살된 후였다.)이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사인(Ḥusayn ibn ‘Alī ibn Abī Tālib, 시아파의 제3대 이맘(Imam), 625~680)을 칼리파로 옹립하고 이라크 중부의 쿠파(al-Kūfah: 현대의 나자프)를 수도로 정해 우마이야 왕조와 맞섰다. 이에 무아위야의 장남이자 제6대 칼리파로 등극한 야지드 1세(Yazīd ibn Mu‘āwiya, 683~647)는 후사인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대대적인 쿠파 정권 토벌에 나선다.
양측 군대는 이라크 중부 카르발라(Karbala)에서 격돌한다. 카르발라 전투는 압도적인 수적 우세(후사인 군의 약 50배)를 지닌 우마이야 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전투 중 사로잡힌 후사인은 야지드 1세의 명령에 따라 몸통이 칼로 두 동강 나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는데(이 장면에서 순니와 쉬아 양측의 주장은 엇갈린다. 순니파는 전투에 패해 절망한 후사인이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 야지드의 명령에 따라 잔혹하게 처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사건은 순니와 쉬아가 영원히 갈라서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쉬아파 무슬림들은 후사인의 전사(戰死)를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殉敎)라고 여긴다. 그래서 후사인이 순교한 날인 이슬람력 1월(Muharram) 10일은 '아슈라(Ashura)’라고 불리는 쉬아파 최고의 종교적 축제일이 되었다. 이날 쉬아파 무슬림들은 손으로 이마와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거나 칼, 채찍 등으로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는 등의 고행을 통해 후사인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이 의식을 ‘아르바인(Arbaeen)’이라 부른다.
카르발라 전투로 인해 일단 순니와 쉬아의 대결은 순니의 승리로 끝난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쉬아파의 저항은 서아시아 전역에서 지속되었다.(제2차 피트나, The Second Fitna) 이로 인해 이슬람 제국의 패권을 장악한 우마이야 왕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카르발라 전투에서 벌어진 후사인의 참혹한 처형은 훗날 페르시아의 호라산(Khorasan) 지방에서 발흥한 압바스(Abbās) 가문이 우마이야 왕조에 반기를 든 빌미가 되었다.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의 자손이라 자처한 압바스 가문의 수장 아부 알 압바스(Abu al-`Abbās, 721~754)는 우마이야 가문을 제4대 칼리파 알리를 암살하고 칼리파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의 무리라고 비난하고 스스로 정통 칼리파라고 천명한 후에 우마이야 왕조에 원한을 품은 쉬아파 세력과 연합해 749년 우마이야 왕조 타도에 나선다.
검은 깃발의 압바스 가문은 흰 깃발의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승승장구한 끝에 750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우마이야 일족을 모조리 색출해 살해한다. 이때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도주한 우마이야 가문의 왕족 아브드 알 라흐만(Amīr Abd al-Rahman the first, 731~788)이 스페인(아랍명 안달루스, al-Andalus)의 코르도바(Córdoba)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바로 후기 우마이야 왕조(Umayyad Emirate of Córdoba, 661~750)다.
압바스 가문의 쿠데타로 우마이야 왕조는 채 90년도 안 돼 멸망하고 새로이 압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49~1258)가 수립된다. 압바스 가문은 본디 순니파로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제국의 패권을 잡자마자 쿠데타에 가담했던 쉬아파를 모두 가차 없이 숙청해 버리고 압바스 왕조가 순니파 제국임을 선포한다. 이로써 쉬아파는 다시 한번 순니파에게 배신 당해 이슬람 주류에서 소외되었다.
762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이라크의 바그다드(Baghdad)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압바스 왕조는 이후 약 500년간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번영을 누린다. 그 당시 이슬람 제국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서북단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남아시아의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대제국이었다. 8세기말에서 9세기 초반 황금기를 맞이한 압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세상의 중심임을 자처하는 인구 200만의 거대한 국제도시였다.
영원히 찬란한 번영을 이어갈 것 같았던 압바스 왕조도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연이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세력이 강화된 술탄(Sultan)과 아미르(Amīr)들이(국내에서 술탄은 보통 왕(王)으로, 아미르는 토후(土侯)라고 번역되는데, 초창기에 술탄은 칼리파가 책봉한 번왕(藩王)을, 아미르는 스스로 군주라 칭하는 지방 호족(豪族)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명칭이었으나 칼리파의 권위가 무너진 이후로는 둘 사이의 의미 차이가 거의 없이 그저 이슬람의 세속 군주 가리키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독립하면서 영토가 줄어들고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칼리파의 권위가 점점 추락하면서 압바스 제국(Abbasid Caliphate)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빈껍데기만 남은 압바스 왕조는 당대 이슬람 사가(史家)들에게 ‘신이 내린 재앙’이라는 평가를 받은 125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1227)에서 시작해 훌라구(旭烈兀, 1218~1265)代에까지 이어진 몽골의 서방원정은 아랍인 중심의 이슬람 세계를 완전히 끝장내 버렸다.
몽골의 기마병들은 중국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실크로드 상의 주요 거점 도시들을 철저히 파괴해 폐허로 만들고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하면서(당대 이슬람 사가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 그리고 러시아와 동유럽을 통틀어 몽골의 서방원정에 따른 사망자 숫자는 무려 2,500만 명에서 3,000만 명에 이른다.) 이슬람 세계를 휩쓸었다.
이로 인한 급속한 인구 감소로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아랍인들은 이후 일한국(Ilkhanate, 1259~1336), 티무르 제국(Timurid Empire, 1370~1507), 오스만 튀르크 제국(Ottoman Empire, 1299~1922)으로 이어지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해 버렸다. 아랍인들은 20세기 초입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서야 겨우 서아시아 지역에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
<제 3 장 현대 순니파와 쉬아파의 세력 분포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