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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코코 Dec 3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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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이 잘 안 된다. 잘 안 된다기보다는 하기가 싫다.

그 일이 있었던 게 벌써 이틀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시간은 정말 잘 흘러서 난 벌써 두 번이나

내가 평소에 자던 침대에서 자고 일어났다.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던 그 시야는 평소에 보던 시야와 그대로다.


나에게는 너무 큰일이 있었고...

1억이라는 큰돈이 순식간에 없어졌는데..

사기라는 걸 당했는데...


자꾸 누구를 대상으로 할지 모를 원망과 화가 난다.


평소에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던 신분증과 OTP가 그날 왜 있어서

예전에 명의도용으로 경찰한테 연락받은 적은 왜 있어서

그날따라 왜 전화를 한 번에 받지 못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화를 걸게 되었는지

고속도로를 이미 탔으면 계속 전화를 받지 못했을 텐데

재택이 아니고 회사에 있었다면 막아줄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르게 이동하며 다니지 못했을 텐데

그럼 시키는대로 핸드폰을 사서 유심을 바꿔 끼는 걸 못했고,

그럼 금감원 번호로 전화를 했을 때 통화가 돼서 더욱 믿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왜 수사관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의심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조사가 장난이냐는 윽박에 겁을 먹었을까

왜 나는 은행의 보이스피싱 문답에서의 검찰 조사 문항을 보고도 오히려 은행이 나쁜 쪽이라고 나서서 생각했을까

왜 적극적으로 은행을 속이고 뿌듯해했을까

왜 그렇게 사기범이 실제 검찰일 거라고 철썩 같이 믿었을까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다해 소통했을까

왜 그렇게 순순히 어린양처럼 협조했을까


심지어 그 사기범에 대한 배신감이 들 정도로 그 사기범이라는 사람을 믿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걱정까지 해주는 느낌이었는데

그것도 다 교본이었겠지, 그것에 속은 내가 너무 바보 같다.


가만히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다운된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거기에 내 맘대로 살을 붙이는 게 강한 편인 걸까

게을러서 사람을 의심하기보다는 그냥 믿어버리는 걸까


부동산 강의 중, 부자가 되려면 실제로 부자가 된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의 행동을 완벽히 카피하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완전히 믿으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도 믿었는데, 그 말은 믿어도 되는 걸까


헬스 트레이너의 말도 너무 믿는 걸까

주변 사람들의 말도 내가 너무 믿는 걸까
 나는 너무 내 주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인가


전형적인 push over같기도 하다.


어제 보이스피싱 관련 유재석/조세호의 금감원 직원 인터뷰를 봤다.

금감원 직원이라고는 해도 그 사람도 유약해 보이고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똑똑하고, 그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그 정도면

내가 대비한다고 해도 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건 어려운 건가


표창원 같은 이미지의 사람이 되고 싶다

부드러움과 무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은 쉽게 속거나 멍청하게 당하지 않을 것 같다


인생의 기로에 있는 걸까,

내가 어떤 스탠스의 사람이 될지

사람 심리에 대한 책을 볼까

그럼 지금 이 마음이 소화가 될까


내가 대비가 되었고, 그때보다 나아졌고,

그로 인해 얻은 게 있다는 게 있다고 생각이 되면

마냥 잃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이 돼서 조금 나을 것도 같다.


“아직 젊은데, 앞으로 더 잘하면 되지.

주눅 들지 마!”라는 말을 아빠한테 듣고 싶다.


이런 아빠한테 영향받고 의존(?)하는 기질도 그만 버리고 싶다.

왜 이렇게 근본적으로 독립을 못하는 건지

자신이 없는 건지


회사 사람들한테도 업무 요청을 하는데 왜 이렇게 심기를 거슬리지 않게 하려는지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고


자존감과 연관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자존감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있으면 남의 시선과 평가에 대해 연연하지 않을 것 같다.

설사 남이 나를 안 좋게 평가하더라도 나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잃은 돈을 생각하면 정말 한숨이 나온다.

부동산 공부를 하며 내가 생각했던 나의 종잣돈이 더 이상 나의 돈이 아니다.

나름 든든했던 마음이 한껏 쪼그라들었고, 조급하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

빨리 이 손해를 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마법같이 어디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조급 해한들 뭐가 갑자기 달라지는 건 아니고, 오히려 안 좋아질 가능성도 크고.


그렇지만 그래도 해이해질 때 이 출발선을 떠올리며 정신을 바짝 차리기는 하자.

시간과 돈을 소중히 아껴 쓰고, 일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아빠가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화를 내면 아빠도 속상한 마음에 그러는 거라 생각하고 듣자.

그리고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신뢰는 다시 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에 대한 신뢰를 쌓자.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툴툴 털어버리기에는 아직 무거운 마음의 관성이 남아있고

아무래도 한동안은 계속 가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머리로는 생각하자.

“일상을 살자. 더욱더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보자. 나에 대한 신뢰를.”


#감사

: 손해 금액이 1억 3천이 아니라 1억에서 멈춘 것. 그래서 멘털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는 것

#너그러운 마음

: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고 있는 나, 올해 이래저래 힘들었던 걸 극복한 나

#행복했던 순간

: 일어났는데 주홍이가 날 보러 와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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