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를 통해 본 나의 좌표
나는 예전부터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을 살고 있는 나와 전혀 관련 없어보이는 사건들과 인물들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는다고 한들,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가끔 역사 속의 인물의 삶을 따라가며 그 인물의 아픔, 슬픔, 처절함, 투지, 의연함에 감동을 받기도, 눈시울을 붉히기도, 영감을 얻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사실 소설 속의 인물이나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가끔은 내 곁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감명이 역사적 사건 자체에 대한 나의 흥미에 불을 지피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몇 년 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책을 읽다가 수만 년 전 인류가 '인지혁명'을 겪게 되는 내용을 다루는 초반부에서 책 날개를 끼워 놓은 채 몇 년 동안 책꽂이에 방치해 두었었다.
그러다 지난 8월 제주도 한달살기를 하러 갈 때 현재의 내가 해야 할 과제나 평소의 일상과는 전혀 관계 없는 책도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읽다 만 <사피엔스>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달살기가 중반에 접어들 즈음 책을 펼쳤는데, 그대로 이 책에 빠져들어버렸다. 책을 읽지 않을 때도 책의 내용을 곱씹으며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역사를 현재의 우리와 엮고 또 미래로 확대해가는 이 책의 흐름은 역사가 현재의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뒷통수를 아주 세게 때렸다. 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집인으로서 진화해온 우리 종의 DNA, 과거의 선조들이 창조해온 가치, 신념,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보이지 않는 과거의 산물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도 그 즐거움은 잠깐일 뿐이며, 다시 내 삶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고 그것을 개선하기 전까지 만족할 줄 모른다. 내 생물학적 호르몬 체계가 생존을 위해 진화를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진정 관심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이것은 개인의 내면에 불가침의 신성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는 개인주의의 산물이다. 나는 나의 아이가 본인의 재능과 흥미를 살린 일을 찾길 바라며 그 일을 위해 끊임 없이 배우고자 하는 탐구심과 끈기를 갖길 원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서도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경쟁력을 가지며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단순한 소비자보다는 생산자의 위치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본인의 재능과 흥미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개인주의 가치에서 비롯된 사고이다.
이 책의 내용을 계속 나의 사고, 신념, 가치체계, 더 나아가 일상적인 의사결정, 느낌, 생각의 흐름에 대입하다보면, 나는 우리의 선조, 사회, 국가, 시장이 형성한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 자체도 자유주의의 산물이며, 내 삶의 의미를 정의할 때조차 자본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의 끝에 다다르면 꽤나 묵직한 허무함이 밀려온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종의 번식을 위해 자연선택된 진화의 결과(특히 개체의 행복과는 관련이 전혀 없는 진화의 결과)이거나 역사가 만들어놓은 허구(자본주의, 개인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모두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허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우연과 허구로 점철된 인간 역사와 삶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일종의 해방을 얻는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들(끊임 없는 자본 축적의 필요성, 육아와 교육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 자아 실현에 대한 강박, 사회적 인정 욕구,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압박,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분쟁 등)이 당연한 진리가 아니고 생물학적, 역사적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면, 우리가 그런 것들에 괴로울 정도로 얽매여야 하는 당연한 이유도 없다. 특히 좋은 집, 차, 옷, 명품과 같은 사회적 성공이나 인정에 대한 욕구와 그로 인한 결핍의 경우 우리가 섬기는 이데올로기(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소비지상주의) 신념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인해 크게 고통받고 있는 나 자신이 새롭게 조명된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그 믿음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겠지만) 그 믿음을 조금 느슨하게 조절할 여유가 생긴다. 사회에서 독립되어 살아갈 수는 없는 한 어떤 믿음은 품고 살아야겠지만, 그래도 더 넓은 시야에서 내가 어떤 종류의 허구를 믿으며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보는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인 유발 하라리도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다"라고 한 것 아닐까. (물론 이 해방 역시 개인이 사회의 가치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개인주의자인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아무리 사회의 획일화된 기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나는 부인할 수 없는 개인주의자이며 자본주의자구나'하고 깨달았는데, 이러한 자기객관화는 나를 조금아프고 허무하게 만들었지만, 개인주의, 자본주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갖지 못했던 해방감을 나에게 주었다. 비록 역사적 우연으로 만들어진 허구일지라도 나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가치를 추구할 것이며, 그 속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것이다. 이 책이 준 갑작스러운 '해방'으로 인해 꽤 혼란스러웠으나, 그에 비례하여 유연하고 가벼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