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를 읽고
(이 글에는 책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스토너>를 마침내 다 읽었다. 묵직한 아픔과 연민과 감동이 내내 진하지만 은근하게 퍼지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주인공 스토너가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것 만큼이나 관조적으로 스토너라는 평범한 한 인간의 삶을 마치 자연 풍경을 담듯 담담히 써내려간다. 하지만 작가가 주인공과 두고 있는 듯한 거리감이 건조하지는 않다. 오히려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깊은 곳까지 너무 섬세하게 잘 이해하고 있기에 원색적이고 단순한 말로 옮길 수 없어서, 감히 그 감정에 쉽게 공감하듯 기술할 수가 없어서,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인물과 주변의 사건들을 최대한 세밀히 기술할 수밖에 없는 듯했다. 그 거리감엔 깊은 존경과 연민과 사랑이 담겨있었다.
이 소설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전개는 없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바라게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면도 없다. 우리가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평범한 인물들이 보편적인 삶의 흐름에 따라 그에 마땅한 감정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내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스토너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주어진 부모와 환경 밑에서 영문도 모른채 살아가는 어린 시절로 시작한다. 고된 농사에 일생을 바친 스토너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일구는 땅만큼이나 말이 없고 특별한 모양도 색도 없으며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스토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농부의 자식으로서, 학생으로서의 삶을 기쁨도 슬픔도 없이, 의미도 목적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뿐이다. 스토너는 후에 이 고향과 부모님과 농사와 땅에 어떤 그리움도 동질감도 느낄 수 없게 되지만, 스토너가 인생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태도- 관조적이고 끝내 인내하는 태도-는 이 시절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스토너 부모님은 농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아들을 농과 대학으로 진학시킨다. 하지만 대학에서 스토너는 농과 대학이 아닌 영문학에 강한 끌림과 감동을 느끼고, 문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비로소 인식되는 '살아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처음으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일을 발견한 후, 스토너는 맹목적인 열정을 갖게 되며 다른 세상이 없는 것처럼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스토너는 부모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 농부가 되는 대신, 영문학도, 강사, 그리고 교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으로 의미 없었던 주어진 삶을 벗어나, 자신이 발견한 의미로 가득찬 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강사로 활동할 무렵, 스토너는 첫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디스라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매우 즉각적이고 단순해서 그 이유는 설명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단순하고 강렬한 첫사랑은 이 서투른 젊은 청년을 황홀경 속에서 무모하도록 만들었다. 스토너는 황홀함에 눈이 먼 나머지, 이디스의 깊은 내면도, 이디스와의 미래도 볼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내 옆에 있기만 한다면 자신도 이 사람도 당연히 행복할 수 있다는 단순하고 무모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후회를 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였다. 실패한 결혼이될 것이라는 사실은 스토너가 덜 인내하는 성격이었다면 결혼 아주 초기부터, 아니 결혼을 하기 전부터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스토너가 적당히 인내해서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가 생기기 전에 이혼이라는 결정을 했다면, 그건 이미 스토너가 아닐 것이다.
스토너는 어느 순간 이디스의 사랑, 함께 하는 시간, 연결된 관계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실감을 자신의 딸, 그레이스의 존재와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나간다. 하지만 유일한 위로였던 딸과의 관계도 이디스로 인해 무너져간다. 그렇게 스토너에게 남은 것은 자신만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서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조용하고 빛이 나던 6살 그레이스의 모습이었다.
중년의 스토너에게 처음으로 온전한 사랑이 찾아왔다. 그 사람과의 시간과 공간만으로도 온 우주가 완성되는 말그대로 온전한 사랑이었다. 스토너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경험한 쌍방향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의 일부였던 스토너는 그녀와 1년 여만에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온전한 사랑도 그 완전한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연약했다.
스토너의 교수로서의 대학 생활도 녹록치는 않았다. 드물게 오는 시절에는 모든 열정을 쏟아 교육자로서, 학자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히 세상의 일부가 되어있는 것 같은 시간은 찰나에 가까웠다. 나머지의 시간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 타인들과 투쟁하는 인내의 시간들이었다. 세상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찰나의 순간들은 환영(幻影)에 가까웠으며, 인간의 숙명은 연결이 아닌 단절, 고독이었다. 스토너는 기대도 절망도 없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 고독도 아주 잘 인내했다.
스토너는 죽음을 앞둔 경계가 불명확한 시간 속에서 세상의 시선으로 자신의 인생을 관조해본다.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40년 가까이 자신의 삶을 바친 대학에서 조교수 이상은 될 수 없었고 변변한 저서도 남기지 못했으며 안락한 가정도 결코 이루지 못했다. 그는 생각한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을 원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누군가와 완전히 연결되지 못했다. 그가 대학생이 되어 정체성을 지닌 순간부터 부모나 고향은 이방인만큼이나 자신과는 괴리감이 큰 존재였다. 자신의 아내, 이디스와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상태가 가장 최선의 상태였다. 스토너에게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던 딸, 그레이스 역시 6살의 평화로운 어느 저녁을 마지막으로 스토너로부터 멀어져갔다. 스토너에게 유일한 친구가 두 명 있었지만, 그중 한 명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무의미하게 전사하고 말았으며, 다른 한 명은 죽음의 세상에 맞닿아 있는 스토너에서 멀어져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난 터였다. 진정한 사랑을 나눴던 연인, 캐서린과도 20여 년 전에 헤어진 후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스토너는 생의 마지막 무한한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스스로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순간 스토너에게는 기쁨 같은 것들이 몰려왔다.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썼던 유일한 책을 집어들었고 이 책이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의 설레던 순간에 고정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스토너가 겪는 계속된 좌절과 상실에 안타까워 눈시울을 몇 번이나 붉혔지만, 스토너의 좌절과 상실은 우리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겪게 되는 굉장히 보편적인 사건들이며, 오히려 스토너가 가졌던 열정은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갖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보지만,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음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고 그것을 위한 처절할 정도의 질긴 인내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담담한 문체로 공허로 가득 찬 인간의 삶에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찬사와 위로를 건넨다. 연약한 인간의 믿기 어려운 강인함을 연민과 존경의 마음으로 담아냈다.
나는 항상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나의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이 결정을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하고 자문하는 습관이 있다. 현재의 내가 가지지 못한 지혜를 미래의 나로부터 끌어오려는 (미래의 내가 봤을 때는) 귀여운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생하게 주인공의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이 책을 읽으며 죽음에 가까운 내가 하게 될 생각에 대해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그 때가 오면 지혜, 현명함, 의미 이런 것들의 가치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저 인고의 세월을 살아낸 나 자신이라는 인식, '나'라는 정체성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넌 무엇을 기대하나?' 무한한 시간 속에서 스토너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넌 무엇을 기대하나?' 죽음에 가까워진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생의 마지막 순간, 무한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게 될까. 그것은 적어도 내가 이루어온 업적의 목록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견디는 인고의 세월 속에서 잠깐씩 있었던 나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찰나의 모음집일까. 강렬히 느꼈던 감정과 연결의 흔적들일까.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지금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많은 것들 중 대부분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