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은 가르침보다 강하다

엄마가 계획하지 않았던 교육, 발레가 열어준 세계

by 고요한 빛

우리 아이는 발레를 참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얼마나 빠져 있는지 그림을 그릴 때도 커튼이 옆으로 내려와 있는 발레 무대 위에, 빳빳하게 옆으로 짧게 퍼진 튜튜, 긴 샤스커트처럼 생긴 로맨틱튜튜 등 다양한 스타일과 색깔의 발레복을 입고 있는, 그리고 깔끔한 올림머리를 한 발레리나들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 아빠와 함께 그린 발레복으로 종이 인형 놀이를 만들기도 한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 때도 발레 공연 놀이를 하고, 집에서도 발레 학원 놀이를 하자고 조른다. 유튜브를 볼 때도 발레 영상을 보여달라고 한다. 발레 전공생처럼 머리를 올린 언니들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한다. 티니핑 영화는 무서워서 중간에 나와도, 90분짜리 발레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에서 본다. 요즘 유일하게 다니는 학원도 발레 학원이다.

나와 남편은 발레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어린 시절에도 발레를 배운 적도 없고 발레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없을 만큼 발레에 대해 문외한이다. 하지만 지금은 발레에 대한 상식이 상당히 많이 늘었다. 어디에서 발레 국제 콩쿨이 열리는지, 어느 발레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지, 발레리나들의 일상이 어떤지, 기본적인 발레 동작의 이름이 뭔지, 고전적인 발레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것들 모두 아직 말도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유치원생을 통해 얻은 지식들이다. 이 작은 아이는 그 작은 몸으로 어떻게 이렇게 맹렬하게 발레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만 3살이 되었을 즈음 백화점 문화센터 창문을 통해 언니들이 배우는 것을 본 것이 다였는데, 그 이후부터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종종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모인 우리의 계획이나 관심이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운명처럼 아이는 발레와 사랑에 빠졌다.


아이가 배우고 싶다고 하니 기특해서 만 3살 반정도 되었을 무렵부터 문화센터 발레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정도 문화센터를 다니고 나서는 발레 학원으로 옮겨 계속 발레를 하고 있다. 계속 발레 생각을 하고 관련 영상을 보고 동작을 반복하니 당연히 발레를 잘하게 되었고, 발레를 잘하니 또 더 재밌어지는 듯했다. 발레 학원에서도 칭찬 스티커를 항상 꽉 채워오고, 내가 가끔 선생님과 마주칠 때면 아이가 발레를 정말 잘 한다며 따로 얘기하실 정도이다. 아이의 정체성에서 발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좋아하고 잘하게 되는 선순환 속에서 긍정적인 자의식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단순히 자신감을 얻는 것 이외에도, 나는 아이의 활활 타오르는 관심사의 강력한 파급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 내면의 ‘발레 세상’은 그 저변을 주변부로 끊임없이 확장하였다. 발레 실력의 성장 뿐만 아니라 어려운 도전을 해보는 경험의 축적, 외국어, 독서, 음악에 대한 관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아이는 처음인 것에 대해 불안도와 경계가 높은 편이어서, 스스로 새로운 것을 잘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린이집에서도 오감 놀이 선생님이 오시는 날엔 커다랗게 펼쳐놓는 파란색 비닐이 무서워 몇 주 동안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아이가 먼저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 의사를 표현했다. 발레에 대한 호기심이 불편함과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물론 첫 수업 전날 갑자기 안 가겠다며 엉엉 울며 불안감이 극도로 올라가긴 했지만, 그것이 진짜 배우기 싫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렇게 힘든 마음을 극복하며 아이는 문화센터에서 즐겁게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집에서 항상 배웠던 동작을 복습했다. 만 4살이 되어서는 발레를 배우기 위해 그렇게 싫어하는 분리수업도 하기 시작했고, 만 5살이 되어서는 셔틀을 타고 가서 스스로 옷을 입고 벗어야 하는 발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향상의 예민함으로 인해 엄마가 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극도로 어려워하는 아이가 그 불편감을 감수하고 발레를 배우고 싶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하루에 한번 30분동안 허용되는 영상 시청 시간에 발레 영상만 틀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유아용 발레 동작 영상만 반복해서 보더니 점차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발레리나들의 연습 영상, 발레 전공생들의 브이로그나 발레 연습 영상을 유심히 봤다. 어느새 우리나라 발레 영상은 볼 만큼 봤는지 세계적인 발레 아카데미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러시아, 미국의 발레 아카데미 소개 영상, 로잔, YAGP 같은 국제적인 콩쿨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다른 나라와 영어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길에서 보이는 외국인과 다른 나라 말에 관심을 갖고 물어보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특별활동으로 일주일에 2번, 30분씩 영어수업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왜 영어를 배우는지를 처음으로 제대로 인식하는 듯했다. 저 발레리나, 발레리노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뭐라고 말하는지를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종종 자기가 먼저 이제 영어로만 대화하자며 영어를 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영어로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외계어로 쏼라쏼라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엄마, 아빠가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먼저 역할 놀이하듯이 간단한 말을 걸면 즐겁게 서로 콩클리시를 주고받는다. 이전에는 유치원에서의 영어 시간이 그다지 재밌지 않는 듯했고, 영어에 대해 호기심이 있으면서도 그 배움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보이던 아이가 발레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어라는 도구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발레 세상’은 전혀 무관해보이는 독서의 영역으로도 손을 뻗쳐왔다. 점점 집에 있는 전집이 식상해져 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던 와중에, 아이에게 발레가 나오는 책을 찾아보자고 하니 눈이 반짝였다. 발레에 대한 갈증이 있는데 그림책으로 발레 동작이나 발레리나를 볼 수 있다니 정말 달콤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제목에 발레가 들어가는 책은 모두 빌려 보기 시작했다. 제목이 발레인 책은 다 보다보니, 발레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책, 예를 들어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도 너무 반가워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발레 옷, 역사, 동작 등등이 설명된, 나이 수준에 맞지 않는 그림이 있는 백과사전식의 책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졸랐다. 누군가가 보았을 때는 집중해서 끝까지 읽기 힘든 정보의 나열뿐인 그 긴 글이 아이에게는 보물 창고와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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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하는 음악의 폭도 매우 넓어졌다. 예전에는 동요나 KPOP을 틀어달라고 했다면, 이제는 노래가 없는 발레 음악, 클래식 음악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가끔 야외에서 공연하는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있으면 꼭 가자고 조르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공연을 직접 경험하다 보니, 또 공연 때 들은 곡을 함께 집에서도 찾아 들으면서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클라리넷 등의 소리를 구분하며 악기에도 관심을 가졌다. 물론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곡은 ‘케데헌’의 OST이지만, 아이는 클래식을 더 이상 따분한 음악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 안에 담았다.


내가 만약 의식적으로 아이가 재미없어 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게 하고, 책이 식상해진 아이에게 계속 내가 고른 책을 들이밀고, 학교 가서는 영어가 중요하다며 영어를 가르치려고 했다면, 아이는 지금처럼 순수하게 재밌어했을까? 자기가 먼저 듣자고, 읽자고, 얘기하자고 말했을까?

부모인 내가 먼저 계획하고 의도하고 이끌었다면, 아이의 순수한 관심과 흥미를 결코 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과 탐구심은 오롯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는 자극은 외부에서 주어질 수 있으나, 그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자극도 어떤 이에게는 호기심을, 어떤 이에게는 무관심을 불러온다. 우리 아이에게는 '발레 하는 언니들을 보는' 자극이 엄청난 호기심과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 호기심과 열정이 어디서, 어떻게 끝이 날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아니면 계속 자라날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엄마인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 이 소중한 호기심을, 아이가 마음껏 펼쳐 갈 수 있도록 곁에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과 이어지는 연구 함께 보기>


1. 호기심은 스스로 배우게 만드는 힘이다.

유아·아동의 호기심은 탐구 행동, 정보 찾기, 학습 몰입과 강하게 연결된다는 연구들이 있다. (Jirout & Klahr, 2012)

아이는 관심 있는 대상 앞에서 가장 적극적인 학습자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


2. 호기심은 학습 준비도로 이어진다.

어릴 때 형성된 탐구 성향과 호기심이 이후 학습 태도와 인지 발달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OECD, Starting Strong V, 2017)


3. 강한 흥미는 전혀 다른 배움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호기심이 높을 때, 그와 직접 관련 없는 정보까지 기억과 학습 효율이 함께 높아질 수 있다는 결과가 있다. (Gruber et al., Neuron, 2014)


4. ‘특정 관심사’는 아이의 학습 엔진이 되기도 한다.

공룡, 기차, 발레처럼 하나의 주제에 깊이 빠진 아이들은 관련 어휘, 배경지식, 읽기 지속력, 학습 자기효능감이 함께 자라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된다. (어린이의 intense interests 관련 연구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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