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Perth)에서 올버니(Albany)까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당시 서부 호주의 한인 정보지였던 ‘KOKOS’에 실렸던 여행기를 일부 수정해 다시 여기에 옮겨 본다. 아쉽게도 카메라를 챙기지 못해 추억할 만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다.
정확히 12일과 2시간 만에 올버니(Albany)에 도착했다. 퍼스(Perth)에서 올버니(Albany)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00킬로미터로, 차로는 대략 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가면 거리가 대략 1000킬로미터로 늘어나 자전거로는 꼬박 13일이 걸린다. 그래도 젊음과 패기라는 훌륭한 재료에 무모함 한 스푼만 더하면, 언제나 괜찮은 요리가 뚝딱 완성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교 졸업을 반 학기 남겨둔 상태에서 휴학을 하고, 서부 호주의 주도이자 ‘빛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퍼스(Perth)에서 영어 어학연수를 받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자 영어 공부 외에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졌고, 2주간의 크리스마스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가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서부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해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오르내리는 매우 뜨겁고 건조한 지역이다. 이러한 땡볕 속에서 혼자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매우 보람 있고 오래 기억에 남을 도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결정이 다소 무모했다고 느끼지만, 철저한 준비만 하면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본격적인 준비는 일주일 전부터 시작했다. 텐트와 침낭 같은 캠핑 장비는 학교 선생님 Darren에게 빌렸고, 호주에서의 자전거 여행에 대한 모든 정보는 오후 수업 선생님 Vikki에게 얻었다. 준비 과정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지도였다. 자세한 지도가 필요했지만, 책으로 된 지도 외에는 적당한 것이 없었다. 모든 지역의 지도를 다 사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무게도 상당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은 도서관에서 지도책을 빌려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는 것이었다. 복사한 지도를 일일이 테이프로 연결하니 내 키만 한 거대한 지도가 완성되었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종이 지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보름 동안 내 눈이 되어준, 이제는 너덜너덜해지고 누렇게 변색된 지도를 아직도 작은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이 2주간의 자전거 여행은 나에게는 단순한 도전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당시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었고, 나 역시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으로서 불확실한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러한 시기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2주간의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당시의 위기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도전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여행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다.
12월 19일은 학교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파티가 열린 날이었다. 파티를 마친 후, 고속도로가 시작되는 프리맨틀(Fremantle)로 향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안에서 크리스마스 파티의 여운을 느끼며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이번 여정이 어떤 경험을 안겨줄지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렜다. 프리맨틀에 도착해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후, 본격적으로 Cockburn Hwy에 진입해 달리기 시작했다. 첫날이라 그런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3시간 반 만에 록킹햄(Rockingham)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끔씩 옆으로 지나가는 대형 트럭들이 만들어내는 강한 바람에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큰 문제없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록킹햄(Rockingham)에 도착해서 캠핑장에 텐트를 치고 난 후, 함께 시내에 나갈 친구를 찾으려 했지만 도착이 늦어서 그런지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록킹햄(Rockingham) 시내의 주류 매장에서 사 온 맥주 몇 병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피곤함이 몰려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라면과 커피 한 잔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마무리했다. 쌀도 5일 치나 가져갔는데, 밥을 하기가 왜 그렇게 귀찮은지... 그렇게 나의 다음 목적지인 만두라(Mandurah)로 출발했다. 만두라(Mandurah)는 서부 호주에서 퍼스(Perth)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아름다운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 덕분에 호주 전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로 손꼽힌다. 이곳은 특히 게잡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지역 특산물인 '게'를 뜰채나 게망으로 직접 잡아 요리해 먹는 것이 만두라(Mandurah)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만조 때 만두라(Mandurah) 앞바다의 물이 빠지면 바닷물 깊이가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때 뜰채를 이용해 기어가는 게 들을 쉽게 잡을 수 있다. 물론 게망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수심이 얕아 게들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잡은 게는 각자 취향대로 요리해 먹으면 되는데, 나는 특히 끓는 물에 익혀 살을 발라낸 뒤 크림치즈에 찍어 먹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짧은 기간 동안 잡아먹은 게의 숫자만 해도 적어도 30마리 이상은 되었을 거다.
만두라(Mandurah)는 게잡이로 유명하다 보니 캠핑장 숙박비가 무려 12불이나 했다. 로킹햄(Rockingham)에서 2불을 냈던 것을 생각하면, 바가지는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캠핑장에서 뜰채나 게망을 공짜로 빌려줘서 그나마 숙박비가 비싸게 느껴지진 않았다. 당시 서부 호주의 일반 캠핑장에서 2인용 텐트 자리를 빌리는 비용은 하루에 2불이었다. 물론 물과 전기는 무료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은 게를 짧은 기간에 게걸스럽게 먹은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단,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개인당 잡을 수 있는 게의 마리 수와 크기가 법으로 엄격히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을 품은 게는 잡으면 안 된다. 이를 어기고 마구잡이로 게를 잡다가 경찰에 적발되면 AU$ 2000불의 벌금을 물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가끔 돌고래들이 얕은 물가까지 올라와 게를 사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살을 가르며 드러나는 돌고래의 지느러미는 마치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보여 종종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나는 자전거 여행을 마친 이 후에도 퍼스에 머물던 한국 친구들과 함께 만두라(Mandurah)를 여러 번 찾아가 게잡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인기 있는 칠리크랩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때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걸까?
두 번째 글에서 계속
본 글 상단에 사용된 이미지는 무료 이미지 사이트 Pexels의 Juliana Mora Rangel 작가 사진입니다(https://www.pexels.com/photo/kangaroos-in-orange-sunset-by-the-water-34279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