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달로 만난 서부 호주 (두 번째)

퍼스(Perth)에서 올버니(Albany)까지

by Gajaz Club
1997년 12월 말 만두라(Mandurah) 외곽,
머리 위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발밑에서 솟아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 내뱉는 숨결마저 내 숨통을 조여오는 느낌은 마치 건식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았다.


만두라(Mandurah)에서 번버리(Bunbury)까지 가는 길에서 기억나는 건 지독한 더위뿐이다. 내리쬐는 햇빛도 힘들었지만,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여정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무사히 번버리(Bunbury)에 도착해 카라반 파크(Caravan Park)에 숙소를 잡았다. 자전거 안장에 문제가 생겨 잠시 시내로 나가 자전거를 수리했다. 그리고 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그 곳에서 신혼여행 중인 자전거 여행자 부부를 만났다. 함께 식사하고 시내 구경도 하면서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둘 다 피어싱을 정말 많이 하고 있었는데, 평소 문신이나 피어싱에 선입견이 없는 나조차도 그들의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조금 징그럽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버셀톤(Busselton)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아침에 여유 있게 출발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강한 햇빛과 싸우며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껴 자전거를 세웠다. 확인해 보니 양쪽 어깨에 물집이 여러 군데 생겨 있었다. 깜짝 놀랐고, 그 후로는 2시간마다 썬크림을 바르거나 아무리 더워도 긴팔 옷을 꼭 입고 다녔다. 5시간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7시간이나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Busselton Jetty, Queen Street, Busselton, WA


고생 끝에 버셀톤(Busselton) 해변에 도착했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햇빛이 모래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하얀 모래사장, 끝없이 이어진 바다가 햇살을 받아 파랗게 빛나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꿈 속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과 동떨어진 풍경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흔히 해변이라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파라솔과 텐트로 가득 찬 모습을 떠올리지만, 이곳에는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파도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고, 그 소리가 더욱 이곳의 고요함을 강조하는 듯했다. 바람에 실려오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오직 나만의 고요한 우주에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버셀톤(Busselton)에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낚시와 산책을 위해 보존된 2km짜리 나무 방파제(Jetty)가 있다. 그곳에 서서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은 듯한 묘한 고독감과 동시에 자연의 품 안에 안긴 듯한 따뜻함이 밀려왔다. 아무런 방해 없이 자연과 나만이 존재하는 순간, 이 고생스러운 여정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텐트로 돌아오니 배가 너무 고파서 가지고 있던 라면과 통조림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7일치 식량을 4일 만에 다 먹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버셀톤(Busselton) 시내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다시 구해야 했다.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얄링업(Yallingup)에서 오거스타(Augusta)까지 놓여 있는 Caves Rd가 굉장히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버셀톤(Busselton)에서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해변을 따라 던스보로(Dunsborough)까지 Caves Rd를 따라 달렸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약간 돌아가더라도 60km 정도라서 6~7시간이면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 예상은 큰 실수였다. 언덕을 고려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Caves Rd는 자동차로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자전거로는 지옥 같은 도로였다. 언덕을 넘어도 언덕, 또 언덕… 낙타등 같은 언덕들을 하나하나 넘으며 한참을 힘겹게 달렸을 때, 저 반대편에서 나와 비슷하게 자전거로 열심히 올라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사람의 이름은 Renny, 잉글랜드 태생으로 이틀 전에 오거스타(Augusta)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그는 매우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호주 북쪽에 땅을 사서 세금도 없고, 공해도 없으며, 경찰도 없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는 것이 꿈이라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더니, 덕분에 그곳에서 2시간이나 쉬게 되었다. 결국 저녁이 거의 다 된 시간에 목적지인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에 도착했다.


From Mandurah to Augusta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에서는 Inn Town Youth Hostel이라는 곳에서 이틀 동안 지냈는데, 호스텔 직원인 Brook이란 친구 덕분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Brook은 늘 눈이 반쯤 감긴 채, 멀대같이 큰 키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친구였다. 그는 언제나 새로 온 여행자들에게 먼저 말을 걸며, 호스텔 전체에 유쾌한 기운을 퍼뜨렸다. 늘 헐렁한 츄리닝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허리춤을 느슨하게 걸친 탓에 허리를 숙일 때마다 엉덩이 골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곤 했다.

Brook 덕분에 스웨덴에서 서핑 여행을 온 Mathias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그의 덕분에 근처 해변에서 공짜로 서핑을 즐길 수 있었다. 다행히 여행 전에 서핑을 조금 배워 둔 덕분에, 적어도 파도를 타는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저녁에는 호스텔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각자 5달러씩 모아 술과 고기를 사 와, 간단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저녁을 시작했지만, 알코올의 힘을 빌리자 각국에서 모인 여행자들이 하나둘 허물없이 어울리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금세 들뜬 축제로 변했다. 결국 모두가 함께 웃고 떠들며 크리스마스의 밤을 만끽했고, 그 덕분에 과음은 피할 수 없었다.


고백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뉴질랜드에서 온 한 여행자가 검은 비닐봉지에 말린 대마잎을 가지고 와 다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롤링페이퍼를 말기 시작했다. 이미 술에 취한 탓인지 첫 한 모금의 느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배가 고팠고, 새벽 내내 피자를 뜯어 먹으며 웃고 떠든 기억뿐이다. 그리고 그날 밤만큼은 영어가 나에겐 모국어처럼 유창했던 게 기억난다. 물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지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하하~!


다음 날 아침엔 그 여파로 끔찍한 숙취에 시달렸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바비큐 파티는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아마도 그날의 고통스러운 숙취와 함께 찾아온 첫 일탈의 짜릿함, 그리고 낯선 이들과 국적도 언어도 잊은 채 웃음을 나눴던 그 순간들 덕분이 아닐까.


Endless rows of vineyards stretch across the landscape in Margaret River.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는 와인으로 유명한 곳으로, 35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주변에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는 직접 와인을 구입하거나 무료로 시음할 수 있지만, 자전거로 모든 와이너리를 방문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시음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와인 생산은 196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불과 30년 만에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특히, 드라이한 백포도주인 샤르도네(Chardonnay)와 세미용(Semillon)이 대표적이다. 이곳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차를 몰고 와 각각의 와이너리를 둘러보며 한 잔씩 시음해보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또한 마가렛 리버(Margaret River)를 유명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매년 국제 서핑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데, 전세계 최고의 서퍼들이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다. 이곳의 서핑 대회는 서퍼들에게는 꿈의 무대, 관광객들에게는 멋진 구경거리가 되는 만큼, 혹시 기회가 된자면 서핑의 매력도 놓치지 말고 경험해보길 바란다.


OUT FRONT: Margaret River


Cave Rd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오거스타(Augusta)까지 갈 때는 언덕이 거의 없는 완만한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오거스타에 있는 Baywatch Youth Hostel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배낭 하나만 챙겨서 Cape Leeuwin에 있는 등대를 보기 위해 서둘러 갔다. 이곳이 바로 인도양(Indian Ocean)과 남극해(Southern Ocean)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 막상 도착했지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등대에 올라가보진 못했다. 그러나 인도양과 남극해를 양쪽에 두고 먼 바다를 바라보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바로 뒤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버티고 있는 Karri Forest가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두 대양과 보라빛으로 저물어가는 석양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 순간, 자연의 위대함과 내 존재의 작음을 깊이 느꼈다. 아쉽지만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오거스타 시내로 돌아왔지만, 그 감동적인 순간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세 번째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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