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달로 만난 서부 호주 (세 번째)

퍼스(Perth)에서 올버니(Albany)까지

by Gajaz Club
자연 속, 야생동물과 마주한 호주의 숨결..


오거스타(Augusta)에서 펨버튼(Pemberton)까지는 약 120km 거리라 새벽부터 출발해야 저녁쯤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오거스타(Augusta)까지는 메인 도로를 이용했기에 가끔 주유소나 로드하우스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Brockman Hwy와 Stuart Rd를 지나야 하는데, 이런 도로에는 그런 편의시설이 없다. 자전거 여행 초보자인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출발하기 전에 물, 타이어, 생필품 등을 여러 번 체크했다. 다행히 그날은 구름이 많아 자외선 걱정은 덜었지만, 많은 짐을 싣고 하루 종일 120km를 달리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달리는 동안 야생 캥거루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동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퍼스(Perth)에서는 캥거루를 보려면 동물원에 가야 했지만, 도시를 벗어나니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교외를 달리며 자연 속에서 이 신기한 동물을 가까이 관찰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제야 진정으로 호주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주 작은 녀석들부터 나보다 덩치가 큰 녀석들까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작은 녀석들은 캥거루인지 월러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반면 덩치가 크고 근육질이며 귀가 쫑긋한 녀석들은 확실히 캥거루였다. 가끔 덩치 큰 캥거루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면, 캥거루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기에 겁이 날 때도 있었지만, 이런 순간조차도 나에겐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The red kangaroo is the largest of all kangaroos, a terrestrial mammal native to Australia.


하지만 아무리 신기한 캥거루도 자전거로 80km 이상을 달리며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체력이 바닥나다 보니, 신기함은 점점 지겨움으로 변했다. 대략 100km를 달렸을 즈음에는 마실 물도 거의 떨어지고, 자전거 기어까지 고장이 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차가 내 앞에서 멈추었고, 할아버지 한 분이 내려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셨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펨버튼까지 태워줄 수 있는지 여쭤보았으나, 차에 짐이 많아 태워줄 수는 없다고 하셨다. 대신 자전거 기어를 고쳐주시겠다고 했다.


친절한 할아버지 덕분에 뒷바퀴 기어는 고쳤지만, 자전거 수리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해가 지고 말았다. 결국 그날의 목적지인 펨버튼(Pemberton)까지 가지 못하고 숲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인적이 없는 숲 속에서 야영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다소 불안했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야간에 손전등에 의지해 자전거를 타는 것이 더 위험해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도로를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 적당한 장소를 찾아 텐트를 쳤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 멋진 추억거리가 되었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정말 무섭고 싫었다. 특히, 퀸즈랜드(Queensland)에서 일어났던 "배낭 여행자 살인사건" 이야기가 떠올라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잠을 잤다기보다, 밤새 동이 트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해가 뜨자마자 잽싸게 텐트를 걷고 펨버튼(Pemberton)으로 향했다. 중간에 발견한 작은 주유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열심히 달려 점심 무렵 펨버튼에 도착했다. 펨버튼은 울창한 삼림으로 유명한 곳이다. 'Karri Forest'라 불리는 이 지역은 고층 빌딩을 연상시킬 만큼 높은 나무들이 자생하는 곳으로, 서부 호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특히 Gloucester Tree라 불리는 높이 40미터의 거대한 나무는 예전에는 산불 발생 지역을 감시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관광용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 전에 이곳에 와서 나무에 올라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워낙 작은 동네라서 한 시간도 안 걸려 돌아볼 수 있었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근처 상점에서 저녁거리와 맥주 몇 병을 사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노스클리프(Northcliff)까지의 여정은 약간의 언덕 외에는 특별히 어려운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숲 속으로 간간히 스며드는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몸과 마음을 한층 가볍게 해 주었다. 노스클리프(Northcliff)는 'Shire of Manjimup' 지역에서 생산된 목재를 저장하기 위해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마을이 너무 작아 숙소를 찾기가 어려워, 결국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윈디 하버(Windy Harbour)까지 내려가야 했다. 이름 그대로 바람이 무척 강해서 텐트를 치는 데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강한 바람에 맞서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라면을 끓여 먹은 후, 지쳐서 곯아떨어졌다.


from augustatoalbany .png From Augusta to Albany


다음 날 아침, 윈디 하버(Windy Harbour)를 떠나면서 우연히 10여 명의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났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A.O.A. (Action Outdoor Association)'라는 친목 단체의 회원으로, 연말을 맞아 자전거로 Manjimup에서 윈디 하버(Windy Harbour)까지 여행하고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서 노스클리프(Northcliff)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노스클리프(Northcliff)에 거의 다다르자, 자전거가 또다시 말썽을 일으켰다. 기어를 바꿀 때마다 체인이 빠지는 것이었다. 다행히 A.O.A. 일행 중 Sandy라는 여성 분이 자전거 수리에 자신이 있다며, 2시간 동안 고생 끝에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시골 인심은 후한 것 같다.


노스클리프(Northcliff)에서 간단히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고 월폴(Walpole)로 향하던 중, 그날따라 유난히 힘들었다. 탈수 증세와 어지럼증까지 겹쳐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휴가 중인 중년 부부를 만났다. 내 자전거 여행이 고되게 보였는지, 그 부부는 덴마크(Denmark)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월폴에서 덴마크까지 픽업트럭 짐칸에 실려 이동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내가 자전거로 알바니(Albany)까지 완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자전거 완주를 기대했던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날의 상황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denmark-wa.jpg William Bay National Park sits between Denmark and Walpole in Western Australia.


호주에서 많은 카라반 파크(Caravan Park)를 이용해 봤지만, 덴마크(Denmark)에 있는 Denmark Rivermouth Caravan Park처럼 시설이 좋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은 없었다. 시내와 가까워 식료품 구입도 편하고, 야영장 안에서 낚시와 수영 등 다양한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야영장에서 시내까지 강둑을 따라 놓여 있는 아름다운 자전거 전용 도로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전거 취미 인구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고 들었는데, 각 도시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전거 도로를 설치한 호주 정부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덴마크에 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야영장에서 만난 노부부와의 교류다. 이분들은 동아시아 경제에 대한 관심이 많으셔서,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물어보셨다.


1997년 말에서 1998년 초, 한국은 외환 위기의 여파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국 원화는 급격히 평가절하 되었고, 국가가 국제 통화 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급증하며 경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노부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셨고, 짧은 영어로는 이 복잡한 경제 위기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분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금융 위기 상황에 대해 궁금해하셨던 것 같다.


드디어 나의 최종 목적지인 올버니(Albany)로 향하는 날이 밝았다. 여정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고, 1997년의 마지막 날인 그날은 구름이 많이 끼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줘서 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대략 40km 정도 달렸을 때, 뒷바퀴에 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자전거를 세우고 자세히 살펴보니, 타이어가 2cm 정도 찢어져 있는 것이었다. 스페어 튜브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지만, 워낙 시골이라 차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과 몰려드는 파리떼가 나를 더 짜증 나게 했다. 1시간 여를 기다린 끝에 결국 지나가는 픽업트럭의 도움을 받아 올버니(Albany)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Albany is a port city located 418km southeast of Perth, Western Australia.


올버니(Albany)는 서호주(Western Australia) 남부의 항구 도시로, 풍부한 해양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도시를 둘러싼 해안선과 국립공원들은 많은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마지막 몇 km를 남겨두고 자전거로 이곳에 입성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올버니 시내 표지판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그 짜릿함은 아마 호주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 탐험가들이 가졌던 감정도 이러했으리라.


지난 보름 동안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가슴에 새기고 온 것만은 틀림없다. 여행 중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곧 기억에서 사라지겠지만, 나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친절과 미소만큼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자전거 여행을 마칠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에필로그(Epilogue)


이 여행은 1997년 12월 19일 오후에 시작해 12월 31일에 마무리되었다. 여행기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1998년 2월 무렵으로 기억한다. 25년이 지난 지금, 많은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은 두 가지를 마지막으로 언급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자전거를 타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며 가장 부러웠던 점 중 하나는 잘 정비된 자전거 전용 도로였다. 무려 25년 전에도 호주의 지방 소도시들조차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갖춰져 있어 이동이 안전하고 편리했다.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는 자전거 이용자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교통수단으로써의 자전거 활용을 촉진하여 화석 연료 소비를 줄이고 국민 건강 증진에도 기여한다. 다행히 요즘 한국도 자전거 도로를 많이 만들어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둘째,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답답한 도시를 떠나 서부 호주의 끝없이 펼쳐진 해변, 하늘 높이 치솟은 장엄한 나무들로 빽빽한 숲, 때로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황량한 도로 위를 마음껏 즐겼다. 이른 아침부터 달리기 시작하면, 이슬을 머금은 새벽 공기의 청량함이 내 얼굴을 적셔 주는가 싶더니, 어느새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타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내 목을 타고 내려가기도 했으며, 늦은 밤 쏟아지는 별들의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텐트 밖 야생동물들의 소리로 인해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곤 했다.


그리고,,

대자연의 숨결에 귀 기울일 때, 나는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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