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장마철인지 비가 유난스레 귀를 때린다. 갑자기 폭우처럼 쏟아지며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투명우산은 감당하기 버거워 휘청거리지만, 오랜만에 마음과 머리를 식혀주는 비를 맞으며 한강의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힘차게 떨어지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땅에 도착하자마자 높게 다시 튕겨져 오른다. 그러나 도도히 흐르는 한강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한강물에 떨어지자마자 금방 한강의 품 안에 안겨 조용해진다. 성난 아이를 달래듯 한강은 품 안에 억센 비를 끝없이 받아들인다.
며칠 전 나는 가족처럼 늘 따뜻하게 보살펴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이모님을 만났다. 이모님은 원불교 정녀로 세속적 집착을 벗어던지고 매일 법문과 기도의 시간 속에서 수도하시는 분이다. 정갈하게 쪽을 지어 빗은 뒷머리와 하나의 선으로 곱게 갈려진 가르마는 이모님의 정갈한 내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가르마를 맞추는 행위는 바로 자신을 다듬고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하나의 의식이리라 생각해 본다.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얼굴보다도 화사한 얼굴을 지니고 조심스럽게 가족의 안부를 물어보신다.
오랜만에 만난 이모님과 항상 이모님과 친형제처럼 지내시는 법사님을 만나니 내 마음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법사님은 때론 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옆에서 이모님을 보살펴 주시며, 더 나아가 우리 가족에게도 많은 따뜻한 손길과 기도를 해주신다. 두 분이 서로 힘이 되어 함께 수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저절로 숙연해진다.
요리를 잘못하는 나를 걱정하며 맛있는 점심을 사주시는 두 분께 미안했다. 수입도 거의 없는 두 분의 생활을 알기에 두 분 식사 대접하려고 만난 자리인데 오히려 나를 대접해 주는 그분들의 마음에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솟아오른다. 증손녀의 돌을 맞아 어느 해 부상으로 받았다는 금반지를 기꺼이 내주시며 꼭 간직하라고 전해주는 손길에 그분들의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 감동으로 밀려오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간 내 손이 부끄러웠다. 열심히 멸치를 까서 곱게 포장하시고 여름감자라고 맛있게 쪄서 봉투에 담아주시는 손길에 친정엄마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식사 후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서 예기치 않게 이모님 방에 들어가 보았다
오랫동안 만남을 가졌지만 처음으로 들어간 방이었다. 한쪽에 놓인 컴퓨터 책상을 제외하곤 침대하나 없는 조그만 공간이었다. 이렇게 산다고 수줍게 웃으며 너무 감사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헐렁하니 공간이 많은 옷장과, 침대 놓으면 생활하기 어려운 작은 공간에 너무 감사하다고 환하게 웃으신다. 그곳은 어쩌면 물건이 채워진 충만함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으로 채워진 충만함이 넘치는 이모님의 작은 우주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보자 평온해지고 저절로 겸손해지며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옷이 너무 많아 옷장이 닫히지 않고, 옷장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내 방이 생각났다. 그런데도 항상 입을 옷이 없다고 새로운 것을 찾아 눈 돌리는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가득 담고 살아가는 어수선한 삶이 영화처럼 흘러간다.
나는 내 삶의 어디쯤에 와 있을까? 거의 황혼이 지난 저녁 무렵이지 않을까? 아니 내일을 모르는 상황이니 한밤중에 다가가는 삶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짐을 트렁크에 가득 밀어 넣은 채, 무거워 들지 못하는 여행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어둠 속으로 힘겹게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를 비워야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텐데 아직도 수많은 생각으로 감정이 출렁거리며 빗속의 소란스러운 욕망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나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이제 여행가방을 가볍게 하고 머리를 조금 비운 채 여행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욕심과 집착을 떼어놓고 삶을 여행한다는 것이 왜 이리 힘들까? 결국엔 여행가방도 버린 채 떠나야 할 여정임을 아는데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갖지 않으면 돌볼 것도 없을 것이다. 많이 소유하지 않으면 쉽게 정돈되고 가벼운 마음으로 상처받지 않은 편안한 저녁을 즐길 것이다.
머리를 한 올 한 올 정갈하게 빗어 넘기며 삶의 영혼을 정돈하는 이모님의 삶을 보며, 나도 나의 삶을 빗질하며 정화된 마음으로 가볍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저녁을 맞이하고 싶다. 허겁지겁 떠밀려 사는 삶이 아니라 공간이 주는 여백의 시간을 즐기며 나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들을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이모님의 채색되지 않은 수묵화 같은 삶과 절제된 선율의 삶이 나의 마음에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나 보다. 아직 내리지 못한 먹구름이 한강 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잔잔하게 물결이 출렁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차 한잔을 손에 들고 잠시 빈 공간 여백의 평화를 느껴본다
(25.7.17-한강 물 위에 떠있는 별다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