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변환은 항상 창의적이고 신선하다. 노후의 삶을 어떻게 보낼지 항상 걱정하며 살았다. 직장생활로 굳어진 일정한 시간의 패턴에서 갑자기 모든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들때의 당혹감과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두려웠었다. 취미 생활과 여행으로 그 시간을 메꾸기는 하지만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무렵 제주에서 42년생의 82살의 할머니를 만나면서 다시 한번 나의 노후를 들여다본다.
제주에 간다고 하니 지인이 소개해준 할머니, 그녀는 여행을 혼자 즐기며 제주에서 카페를 운영한다고 한번 대화를 해보라고 해 예약해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카페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카페가 아니라 그녀의 작은 거실의 공간에서 테이블 위에 찻잔을 마주하며 대화하는 1인 이색 카페였다. 그녀의 집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요양원이 근처에 있는 아주 시골스러운 조용한 동네였다.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보랏빛 야생화가 맞이해 주고 정원에 깔아놓은 돌틈 사이로 하얀 야생화들이 피어있었다. 문을 두드리니 야생화만큼 하얀 백발을 한 멋진 할망이 반갑게 맞아준다.
거실 한편에 놓인 찻잔과 따스한 햇살은 한순간 긴장을 늦추고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듯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그녀가 앞에서 따라주는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마치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우리의 대화는 시간과 더불어 무루익어갔다.
처음에 따라주는 진피차, 말린 귤껍질을 이용해 우려내 정성스럽게 내미는 조그만 유리잔이 더 향기롭다. 차와 더불어 온갖 견과류와 말린 과일들이 담긴 8첩 반상기가 인상적이다. 차를 마시며 안주를 먹는 기쁨을 처음으로 느낀다. 특히 가운데 놓인 금귤을 조려낸 과일과 연근을 말린 것이 맛이 있었으며 이름 모를 다른 말린 과일도 맛이 있었다.
두 번째 나온 청둥비트차는 비트의 색깔 때문인지 너무 예뻤다. 특히 청둥은 늙은 호박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늙은 호박을 일컫는 말은 청둥호박, 맷돌호박, 조선호박이 있는데 늙은 호박이라는 말이 호박에게 미안한 말인 것 같아 예쁜 청둥호박이라고 불러준다고 한다. 아, 이분은 대화가 통할 수 있는 분이 구 나하고 마음을 더 활짝 열어두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맛을 음미해 보니 예쁜 붉은색 사이로 호박의 맛이 느껴진다. 차를 따라주며 영어사전 한 권 들고 영국으로 홀로 훌쩍 떠난 여행담과 유럽 기차여행의 이야기는 혼자 여행을 즐기는 나에게 충분한 공감과 흥미를 끌 수 있는 주제였다.
마지막 목련꽃차를 우려내며 목련꽃이 찻잔에 활짝 피어날 즈음 왜 이런 1인 카페를 차렸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에 반해 올레길을 걸으며 제2의 삶을 사는 중 남편과 사별 후 심한 우울증에 빠져 방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사람과의 관계와 대화를 통해 우울증을 탈피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차에 대한 자격증을 얻고 거실에 차 공간을 마련해 하루에 2-3팀 예약으로 손님들을 맞이해 차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여행하고 싶을 때는 예약을 안 받고 훌쩍 떠나고 제주에 돌아오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지낸다고 한다.
마지막 딸기 샤베트를 와인잔으로 마시며 달콤함으로 혀를 녹인다.
제주 속에서의 삶은 이런 걸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제주 사람을 종종 만난 기억이 있다. 어느 오름길에서 만난 사람은 1년 정도 본인의 집을 렌트해 주고, 그 돈으로 외국에서 1년을 여행하며 온다고 말한다. 또 어느 분은 가정식 음식을 하는데 그날 영업을 하는지 확인하고 가라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분도 자기 생활을 즐기며 부캐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는 것 같다. 나의 부캐는 뭘까? 80살이 넘어도 저런 멋진 삶을 살 수 있을까? 조그만 발상의 전환이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멋지게 늙어가게 하는 (well-ageing)것이 아닐까? 정성 들여 만든 차를 대접하며 한편으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공감해 주고 힐링의 시간을 갖게 하는 제주 삶의 상담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녀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1시간 30분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넘기며 대화를 한 후 그녀의 집을 나오며 나의 노년의 시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 104살이 되셨을 연대 교수였던 김형석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강의를 이렇게 하며 다니는 이유는 젊은이들에게 강연을 통해 조금이라도 올바른 길을 가고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강단에 선다"는 말이 생각난다. 규칙적인 생활로 허리도 반듯하시고 100살이 넘은 연세에도 1시간 동안을 쉴 새 없이 강연하시던 모습이 존경심과 더불어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였다.
처음 본 사람과 단둘이 그녀의 집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실생각은 제주에 오기 전 상상을 하지 못한 일이다. 그녀와 우연의 만남을 그녀의 화단에 한송이 핀 매발톱 보라꽃과 더불어 아름다운 나의 소중한 시간의 한 페이지로 저장해 둔다. (24.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