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 축제를 알리는 플랭카드가 유난히 싱그럽다. 배를 예약하려니 이미 거의 만석이어서 마지막 배 3시 50분으로 간신히 예약했다. 2시간 동안 섬을 돌아보고 가파도 마지막배 5시 50분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가파도 선착장으로 네비를 맞추어서 가니 횟집이 밀집된 곳이 나온다. 여러 번 마라도, 가파도를 다녀왔는데 장소가 아닌 것 같다. 헤매다가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운진항을 찍고 가란다. 아.. 역시 나이가 들었구나. 항상 모슬포항을 네비에 찍고 도착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선착장을 찍었을꼬.. 운진항과 모슬포항이 같은 장소로 네비에 찍으면 승선 티켓을 구하는 곳으로 안내한다. 간신히 도착하여 예약줄에 서서 보니 이미 현장 구매는 매진이고 전화예약자만 받고 있었다. 제주에서 잘 보지 않은 많은 인파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를 데리고 갈 배가 화려하게 등대를 가로질러 들어온다. 배의 색상마저 경쾌하게 치장된 듯하다. 배에 승선한 후 2층으로 올라가니 빨간 하트 형상이 배 뒷머리에 있어서 시원한 바닷물이 하트 사이에서 출렁거린다.
비록 10분의 짧은 승선이지만 모처럼 바다 향기를 맡으니 더 상큼하다. 드디어 가파도에 도착, 누가 부르는지 유행가를 구성지게 부르는 소리가 우리를 맞이한다.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 본섬의 사이에 있는 섬이다. 제주도 부속섬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를 헤엄치는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가파도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일까? 낮은 언덕이나 산이 보이지 않고 평평하여, 바다로 둘러싸인 온 섬이 청보리의 초록빛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우리나라 남단에 위치해 있어서, 봄소식을 알리는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사이, 청보리잎의 푸릇한 생명력으로 이 섬이 되살아난다. 시간이 멈춘듯한 이 고요의 섬에 청보리가 바람에 휘청거리는 소리와 먹이를 얻기 위한 새들의 분주한 소리가 이 섬을 살아있게 한다.
특히 허름한 벽 위에 장식된 벽화는 벽화마을답게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으며, 예쁜 소라와 조개로 장식된 돌담은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하다. 마을은 스스로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서 주민들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는듯하다. 가파도의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담긴 담장 위 예쁘게 색칠한 소라껍데기는 초록빛 들판과 어우러져 한층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며, 상점이나 카페들은 제주의 섬다운 모습으로 아기자기하게 장식되어 관광객들에게 저절로 포근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것 같다.
청보리 사이에 우뚝 솟은 풍차는 불어오는 바람에 빙글빙글 움직이고 있고, 그 아래의 청보리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섬을 에워싼 바다는 뜨거운 햇살에 바다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으며, 고양이는 담장 위에 누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잠에 취해있다. 얼마나 평화스러운 모습인가?
섬을 둘러보니 벽화마을답게 담장에 예쁜 그림과 더불어 써놓은 글들이 정겹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높은 소망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바다를 배경으로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특히 청보리를 마주한 색색깔의 벤치는 푸른색을 배경으로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이곳에 숙소를 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시끄러운 관광객이 떠나고 오로지 바람과 청보리와 햇살이 있는 섬과 마주하고 싶다. 마라도는 짜장이고 가파도는 짬뽕이라는데 먹지도 못하고, 봄날 같은 카페에 앉아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허겁지겁 다시 배에 타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도 잠시나마 청보리가 넘실대는 이 광활한 모습을 영화의 한편처럼 머릿속에 저장하며 위안을 삼는다. 언젠가 다시 온다면 가파도의 이 평화로움을 맛보기 위해 숙소를 잡으리라 생각하며 배에 오른다. (24.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