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색 바다색깔과 바람이 불어 춤추는 파도를 보며 1주일간의 여행을 마무리한다. 글이란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때 살아있는 것 같아, 통창 너머 보이는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짧은 여행을 생각해 본다.
처음 서귀포에 숙소를 정하고 5일을 보내며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중산간 도로를 지나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근래에 제주 올 때마다 불편을 느끼는 것이 날씨이다. 청명한 파란 하늘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흐리고 구름 낀 날씨가 계속되고 중산간 도로는 짙은 안개로 오전은 물론 오후에도 앞 차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여서 힘든 운전을 3번이나 해야 했다. 이 도로는 다시 오고 싶지 않아를 외치며 다녔다.
그런데도 제주에서 만난 사람은 따뜻한 기억을 남긴다. 1인카페 할머니를 만나 노년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본 시간, 이른 아침 손님이 없는 카페에서 사장과 나눈 대화도흥미로웠다. 제주는 4월이면 고사리를 따는 적기여서 많은 제주할머니들이 새벽에 고사리를 찾아다닌다고 한다. 새벽이 위험하지 않은 지 물으니 뱀은 새벽에 별로 돌아다니지 않고 오히려 오후 날씨 맑은 날에 자주 보인단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너무 달랐다. 그는 카페 주변 돌담장 부근에서 많은 뱀을 보았다고 한다.흙과 맞닿아 있고 적당한 습기가 있어서 제주의 흙담이 뱀이 서식하기 좋단다. 뱀은 새벽이나 흐린 날 보다 화창한 날 몸을 말리기 위해 담장 밖으로 나온단다.예전에 근무했던 학교 교정에서 오후 맑은 날 뱀이 허물을 벗고 뱀껍질만 남긴 채 사라진 걸 본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뱀이야기를 들으며 하루를 조심스럽게 다녔다. 특히 그날 흐린 오후 비자림에 가서 1189년에 태어나 올해 835살의 비자나무를 보고 왔다.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게자란 할아버지 비자나무를 보며 세상 살기 괜찮은지 물어본다.
비자림은 내게는 좀 특별하다. 몇 년 전 이곳에 와서 보았던 천년비자나무나 연리지나무에 관한 내용을 시로 남겨두어서 의미가 깊었다. 특히 숲 해설사의 해설을 듣다가 잘못된 부분을 발견해 해설사에게 말했더니 관리실에 건의를 하라고 함께 가서 말해주셨다. 그 부분도 수정이 되었는지 궁금하여 비자림에 들어가 보니 의견을 수렴하여 산뜻하게수정해 놓으셨다.비자림을 나오며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의 즐거움으로 마음이 흐뭇했다.
제주에 올 때마다 마지막여정은 한담해변 쪽으로 숙소를 잡는다. 제주의 고향 같은 예쁜 바다를 볼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예쁜 카페에 앉아 있으면 우울하던 감정도 사라지고 마음도 청록으로 물든다. 관광객이 없는 아침 한담해변산책과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 앉아 한동안 바다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나의 여행의 가장 하이라이트이다.
오늘 아침 책을 한 손에 쥐고 걷고 있던 20대의 예쁜 아가씨도 기억에 남는다. 독립책방에서 우울하다고 하니 주인장이 추천해 줬다는 책을 한 손에 들고, 나머지 손에 커피 한잔 든 채 책은 아직 읽지 않았다고 수줍어한다. 아니다. 그녀가 아침에 책을 들고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50프로 책을 읽은 것과 같다. 모처럼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만난 게 나를 설레게 한다. 핸드폰만 들고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다가, 책을 읽기 위해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이 아가씨는 얼마나 멋진 청춘을 보내고 있는가?
어느 가을날 낙엽이 쌓여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시던 한라산 절의 스님도 생각난다 그분이 읽던 책에 대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이야기도 한 편의 영화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1일 투어패스로 돌아다니다 우연히 말타기 체험을 했는데 내가 탄 잘생긴 하얀 말이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7인의 탈출>에 나온 말이었다고 자랑하며 들려주던 아저씨, 그리고 모로코를 기억하며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낙타타기체험을 했던것도 예정에 없던 나의 시간들이었다.
인생이 내가 의도하지 않게 흘러가듯이 특히 여행은 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앞에 놓여있어 흥미롭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눈앞에는 파도가 사정없이 바위에 부딪치고 있다. 마치 더 놀다 가라고 소리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