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향한 발걸음은 두동교회였다. 처음 들어본 생소한 교회다. 그러나 이 교회는 1929년에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의 교회로 기독교 초창기의 전파과정에서 남녀유별의 관습이 그대로 건축에 남아있는 초기 교회 중 하나이다.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남녀가 함께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없어서 전형적인 기억자 예배당으로 남자석과 여자석을 분리하여 남녀가 서로를 쳐다볼 수 없게끔 설계되어 있어서 대단히 흥미로웠다.
요즘 사람들이 보면 웃겠지만 그 당시에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출입문이 3개 여서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 나머지 하나는 성직자들이 들어오는 문이었다. 여자 쪽에 앉으니 남자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억자예배당은 동양과 서양의 만남의 건축물이었다. 교회는 홑처마에 양철지붕을 올렸으며 지금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지만 허물지 않고 잘 보존하고 있다. 기억자예배당은 처음으로 기독교 문화재로 지정된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와 더불어 이곳 두동교회가 남아있다고 한다. 초창기의 교회 안에서의 결혼식이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고 그 당시 사용하던 피아노나 단상들이 그대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동교회를 지키는 목사님은 지붕 위로 계속 자라고 있는 소나무가 양철지붕 위를 덮고 있어 눈 오는 날 소나무가 양철지붕을 무너뜨릴 것 같아 고심하고 있다고 말한다. 2023년에 백주년이 된 두동교회, 초창기 교회를 보는 건 잠시 과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바위성당>
다음 발걸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신부의 이야기와 관련된 천주교 성지 나바위성당이다. 익산시 성당면 화산리에 위치한 천주교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다. 처음에는 화산 이름을 따 화산성당이라고 했다가 완주군 화산면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나바위성당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는 마카오에서 사제수업을 마치고 선교사를 모셔오기 위해 라파엘로라는 목선을 타고 죽을 고비를 거치며 황산포 나바위 화산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도 목선을 재현하여 김대건신부를 기리고 있다.
나바위 성당은 서구식과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초기 성당으로 사적 318호로 지정된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성당 내부 중앙에 기둥을 연달아 세워 남녀의 자리를 구별시켰다. 유교의 문화 속에 지워진 근대 성당 건축양식이다.
나바위성당의 치유의 경당에 있는 첨탑에 십자가 대신 닭을 형상화시킨 것이 특이하였다. 이 닭은 베드로의 배신과 회심(죄를 뉘우치고 돌아옴)을 상징하며 이 닭을 보고 그때의 교훈을 삼도록 설치해 놓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하여 기도문이 탁자 위에 놓여있고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간다고 한다.
나도 조용히 기도문을 읽어본다.
성당 뒤편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이 있고 더 올라가면 금강이 보이는 망금정이라는 탁 트인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 주변에는 바위로 예수님의 행적을 조각해 놓아서 인상적이었다.
전망대 아래로 내려오면 십자가의 길이 나와 기도를 하며 길을 걷는다고 한다. 특히 바위가 십자가 모양이 있어 십자바위라 칭하며 십자가의 길이라 한다. 이 길을 걸으니 제주도의 이시돌 목장옆에 위치한 수도원이 떠오른다. 제주도처럼 정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길을 따라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인 것 같다.
종교란 뭘까? 인간이 평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 종교인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인간이 선해지려고 노력하기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종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전쟁을 겪는 것은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인류가 지금까지 오면서 겪은 수많은 종교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럼에도 종교는 인류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는 존재로 남아있어야 된다고 어설픈 사고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