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잠그고 자면

처가살이의 서러움을 누가 알랴

by 세이스강 이윤재

문을 잠그고 자면
글: 세이스강(이윤재)


고아 출신 그러나 빛나는 인재

그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세상 어느 곳도 그를 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가슴을 파고들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울대 수석 입학과 졸업이라는 기적 같은 성취를 이뤄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하자마자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입지전적인 인물’, ‘고아 출신 신화’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그는 곧바로 전략기획실의 핵심 인재로 발탁됐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스펙을 가져도 사람은 결국 사랑과 가족이라는 따뜻한 온기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정을 꿈꿨다. 평범한 저녁 식사와 누군가 기다려주는 집 그리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삶을

운명처럼 만난 그녀

그는 회사의 갤러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그녀를 만났다.
이태리 유학파 출신의 무명화가이며 국내 대기업 임원의 외동딸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예술을 좇아 유럽으로 떠났던 여인
고고하고 섬세하며 세련된 감각과 우아한 태도를 지닌 그녀에게 그는 첫눈에 끌렸다. 그리고 그녀 역시 냉철하고 성실하며 인생의 고통을 꿋꿋이 버텨온 그에게 묘한 동경을 느꼈다.

사랑이었다.
처음엔 모든 게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느꼈고 그녀는 그에게서 세상의 무게를 버텨낼 단단함을 보았다.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었다

결혼은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녀의 집안은 큰 미술관을 통째로 빌려 두 사람의 결혼식을 기획했고 언론에까지 기사화됐다.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곧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아인 그에게는 돌아갈 친가가 없었고 장인은 “번듯한 집이라도 마련되면 나가 살라”는 말을 남기고 해외지사로 발령 나서 가버렸다.
그날부터 그의 삶은 ‘무형의 계약서’에 서명한 듯 집안의 투명인간이 되어갔다.

투명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위

아내는 그림을 그리며 하루 대부분을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가끔 나와도 감정이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수도 없었다.

“나, 지금 작업 몰입 중이야. 부정적인 기운은 그림에 안 좋아.”
그녀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장모는 기분이 들쑥날쑥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아들처럼’ 대하려 애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호칭은 '사위'에서 '너'로 바뀌었다.

방문은 늘 열려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문을 잠그면 장모는 곧바로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왜 문을 잠가? 이 집에서 뭐 숨길 거라도 있어?”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곤 했다.

프라이버시는 사치였다.
처남은 중소기업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퇴근하면 거실에서 늘 술을 마셨다.
“형, 와서 한잔 하지?”
그리고선 이내 그를 ‘거절도 못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처제는 아직 대학생이었지만 대놓고 그를 평가했다.
“형부, 그 양복 좀 바꾸시면 안 돼요? 아빠 회사 다니는데 스타일이 너무 올드하잖아요.”

아내, ‘제2의 피카소’를 꿈꾸다

아내는 정식 직업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준비하고 때로는 외국 큐레이터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바쁘게 살아갔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림이 그녀의 도피처처럼 보였다.

“내 그림은 아직 세상이 준비되지 않았어.”
“나, 언젠간 파리에서 개인전 열 거야. 그땐 우리, 거기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매번 전시회는 적자를 냈고 장모는 언제나 말했다.
“우리 딸, 예술가로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너라도 좀 받쳐줘야지.”

부서진 일상

그는 늘 체했다. 속이 아팠다. 현실이 아팠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 가정이 정말 자신이 꿈꿨던 따뜻한 집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내는 자주 그에게 말했다.
“너무 일찍 출근하지 마. 나, 새벽에 혼자 깰 때 기분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집에서 새벽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일찍 가고 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만이 유일하게 그의 방문이 잠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결정의 순간

그러던 어느 날 본사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글로벌 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해외 지사 부사장 직급 제안 연봉 두 배. 주거 지원. 자유로운 환경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문을 잠그고 잤다.

장모는 어김없이 방문을 열려 했다.
“문 좀 열어봐! 자고 있는데 왜 잠가?”
“너 이 집에서 뭘 그렇게 숨기는 거야? 내 딸이 불안해서 못 자잖아!”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문 뒤에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조용한 작별

다음 날 그는 조용히 짐을 쌌다.
여느 날처럼 새벽이었다. 집 안은 고요했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녀는 자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어쩌면 평화로운 표정
그가 알던 그 여자의 처음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야 했다.

그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닫는 소리도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이별은 종소리가 아닌 침묵으로 완성된다는 걸 그는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밤, 새로운 자신

그는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밤이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엔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 낯선 도시,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속에서도 그는 편안했다.

그는 미소지었다.
그의 밤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문을 잠근 밤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자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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