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기억

by 유이정

사람의 살 껍데기가 그렇게 무르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채혈을 할 때 움푹 파인 팔오금에 바늘이 파고드는 걸 보며, 바늘 쌈지에 바늘을 찔러넣는 것과 별 다를 게 없구나 여겼던 적은 있었다. 반짓고리를 꺼낼 일이 있으면 손에 쥔 옷가지들를 눈 앞까지 들이대 정교하게 교차된 섬유의 행렬을 확인하고는 했다. 아주 가느다란 실이 길게 이어지고, 그게 다른 실들과 땋아져 굵은 실을 하나 이루고, 또 그게 다른 실들과 엮이며... 색이 다른 실을 늘어트린 바늘은 그저 그 사이를 헤집을 뿐. 살갗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았을 때는 뻣뻣하니 매끈하게 휘어있는 플라스틱 실이 달린 굵은 바늘이 살 껍데기를 깊게 찔렀을 때였다. 마취를 했으나 그저 살갗 겉부분을 저리게 할 뿐, 파고드는 통증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선혈을 알콜에 푹 젖은 거즈가 계속해서 닦아냈다. 바늘이 보여야 한다며 살갗 안쪽을 후벼내듯.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맑은 눈물만 흘렸다. 이미 부어오른지 오래인 눈두덩에 눈물이 닿자 뜨거움이 느껴졌다. 처지대 옆 적갈색 말통엔 핏물과 정제수가 출렁이며 차올랐고 뻘겋게 젖은 거즈들이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후벼내는 순간 핏물이 가시며 살갗과 살갗 사이 또다시 피가 차오르는 연분홍 조직과 샛노랗고 동그란 요철들이 눈에 들어왔다.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멈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눈 앞을 흐리게 하고, 거친 호흡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단단한 내력벽을 찾아 수 없이 머리를 부딪히면서도 흐르는 침을 삼킬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커다란 진공 청소기로 빨아들인 듯 순식간에 뜨거운 감정이 사라지는 그 방법. 마침 몇 시간 전 무슨 놀이를 한다고 몇 가지 문구를 사둔 터였다. 눈을 감았다. 시리고 뜨거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해야했다. 내가 생갇했던 것보다 감정이 깊었던 듯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욕조에 이불을 담갔다. 밟을 때마다 탁한 연홍색의 구정물이 배어나왔다. 몇 번이고 헹구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짓밟기를 반복했다. 구급함에서 꺼낸 붕대로 손등이 암자색이 될 때까지 팔을 감아두었다. 세탁기에서 탈수를 하고 건조기에 넣어 이불을 말리고 나서야 붕대를 풀었다. 이미 번져나온 핏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물티슈로 마루의 결대로 고인 핏방울을 닦아내고, 또 그새 흐른 핏물을 닦아내길 반복하다 다시 욕실에 들어갔다. 바지를 벗어 다시 욕조에 담갔다. 세면대 수전을 돌려 팔 위에 수돗물을 틀었다. 거즈를 수없이 겹쳐 팔을 압박하고 넓적한 반창고를 붙이고 붕대를 감았다. 바지 역시 탈수 후 세탁물 통에 넣었다. 이불이 없는 빈 침대에 멍하니 누웠다. 열이 오르는 듯 했다. 6일을 내리 쉬는 명절 대목이었다. 일어나 반팔 티셔츠를 입고, 소매를 걷기 쉬운 커다란 스웻셔츠를 입고, 얇은 후드집업과 패딩을 걸쳤다. 현관문을 나서자 써늘한 공기가 열로 상기된 뺨을 찢듯이 스쳤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가장 세게 틀었다. 왼 팔을 엉거주춤하게 든 채로 오른손으로만 운전을 했다. 가장 가까운 응급실은 15분 정도 거리였다.


접수대에 가서 말했다. 8cm 정도 열상이고 지혈은 됐어요. 환자는요? 제가 환자에요. 보호자는 안오셨고요? 네. 일단 저기서 대기하시다가 한 번 볼 게요. 얼마 기다리지 않아 간호사 앞에 불려가 앉았다. 붕대를 풀고 큼직한 반창고를 떼자 반창고 안쪽이 온통 붉게 젖어있는 게 보였다. 거즈로 닦아내었다. 벌어진 살갗이 희게 질려있었다. 혼자 한 거에요? 질문을 건너편 간호사가 받았다. 그러네, 흉터도 있잖아. 겹겹의 거즈와 의료용 테이프를 붙인 채 엑스레이를 찍었고 손가락을 움직여 신경이 상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하고서야 처치대에 올랐다. 겨우내 햇빛을 받지 않아 허옇게 바랜 무른 살껍데기에 번들거리는 검정색 봉합사가 1cm 간격으로 일곱 땀씩 두번 엮였다. 처치를 맡은 이는 내 또래일까, 아직 얼굴에 세월의 흔적은 패여있지 않았다. 서툰 바느질을 끝내고 정제수를 뿌리고 포비돈 요오드를 넓게 펴바르고... 거즈와 반창고와 붕대를 요란하게 감았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겨운 20여분이 지나서야 파리한 얼굴의, 마찬가지로 내 또래쯤 될까, 세월이 아니라 피로에 할퀴어진 인상의 마른 이가 내 앞에 와 섰다. 대강의 자초지종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명절이라 연 데 없는 거 아는데, 다음에는, 다음은 없어야겠지만 어쨌든 또 이런 일 있으면 정신과 진료 안하는 병원 가세요. 원래는 바로 입원 해야하거든요? 진료 기록 있고 그러니까 보내드리는데... 보호자는 와야해요. 나는 보호자가 없다고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올 수 있는 사람도 차로 한 시간은 걸리고, 그나마도 가족은 아니라고. 또다시 긴 한숨과 함께, 기다릴테니 부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보호자가 연락을 받고 출발도 하기 전에 나는 석방되었다. 장기 진료 기록이 있는 병원이니 주치의에게 맡겨도 된다고 판단한 듯 했다. 나는 집업의 후드를 눌러쓰고, 추위를 견딜 자신 없이 응급실 자동문을 나섰다. 주차장 앞 흡연 구역에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늘고 흰 연기를 연거푸 흘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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