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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날들 Jul 12. 2024

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열일곱이었던 빅토리아는 단 한 번의 사랑을 시작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녀가 살아왔던 터전이 무너졌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됐고, 혼자 엄마가 되었으며,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바라는 유순한 모습으로만 살아왔던 작고 여린 소녀는 삶을 뿌리째 뽑고 뒤흔드는 커다란 상실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더 강인하고 단단한 엄마가 되었고 자신의 삶을 기어이 회복시키고 개척해냈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 분노를 흘려보내고, 더 깊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으며 무너진 삶을 일으켰다. 


폭풍우가 휩쓸고 황폐해진 숲이 스스로의 상처를 회복하듯, 자신의 삶을 회복시키는 그녀를 보면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릿했다. 운명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슬픔과 상실이 모든 것을 망가뜨려도 결국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이 이야기는 1896년 거니슨강을 따라 형성되기 시작한 콜로라도주 아이올라에서 시작된다. 주민 대부분은 목축업과 농업, 흘리아 낚시 관광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미국 정부가 마을을 댐과 저수지로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저수지 아래 마을이 잠기게 된다. 당시 주민들이 겪었던 삶과 상실에 대해, 콜로라도 강의 지류가 흐르는 자연과 숲에 대해,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을 만나 소녀에서 엄마가 되는 폭풍 같은 과정을 견뎌낸 한 여자의 삶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


작가는 50세가 되어 이 책을 집필했고, 숲에서 작고 여린 새끼를 돌보는 어미 사슴을 보면서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숲과 인생에 대한 은유와 소녀에서 엄마가 되는 과정을 꿰뚫어 묘사하는 필력에 경탄하게 되는 책.  마지막에 뭉글하게 남는 여운에 오랫동안 울컥했던 책.


* 느리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고 나면,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광대한 황무지에 찍힌 점 하나로, 오롯이 혼자가 될 것이었다.(p.162)


*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셸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p.164)


* 세상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심장에서 시작되어 모든 세포로, 모든 혈관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한번 덮치고 가면 모든 게 달라진다. 땅도, 하늘도, 심지어 자기 손바닥마저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꿔버리는 슬픔이다.(p.209)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닥에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흙 두 줌을 퍼 올렸다. 퍼 올린 흙에는 시커먼 흙, 솔잎, 조약돌, 잔가지, 나뭇잎, 자그마한 달팽이 껍데기, 솜처럼 하얀 깃털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쓰러진 나무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모든 굴곡을 이겨내고 틈을 뚫고 빛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간 생명들을 둘러보았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p.405)


*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p.416)


* 아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뭐라고 얘기할지 마음먹었다. 내게 닥친 일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며 살아왔다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떤 존재가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라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윌이 가르쳐주었듯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얘기할 것이다. 물론 걸림돌을 무릅쓰며 멈추지 않고 흘러왔다는 게 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강물처럼 나 역시 나를 다른 존재들과 이어주는 작은 조각들을 모으며 살아왔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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