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래하는 한국 여자 Mar 02. 2021

4.  내가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난 미얀마 사람들

음악 선생님으로 만난 그들과의 인연

 

                                              사진 출처/ UNICEF 중



 내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국제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미얀마 학생들에게 관심이 가게 되는 일이 생겼다.


 2016년 말부터 2017년 사이 미얀마에선 영국인들이 오래전 미얀마 땅에 이주시킨 로힝야족과 미얀마인들 사이에 분쟁이 다시 일어났고 급기야 대규모 학살사건이 생겼다. 그로 인해 무슬림들의 심기가 안 좋아졌고 곧바로 그  사건은 파키스탄 무슬림들이 미얀마 외교관 건물 앞의 시위로 이어졌다. 이슬라마비드 시 안의 외교단지 enclave area에  미얀마 외교관들 사택들이 있었다. 미얀마인들이 거주하는 건물 밖에서 돌을 던지는 무리가 생겼고 파키스탄 정부는 미얀마인들에게 외출 금지 명령을 내렸다.


 해서 미얀마 학생들을 학교에서 볼 수 없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년 가까이 갔다.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학생들의 국적은 40개국 정도로 다양했다. 보통 외교관 자녀들, 다국적 기업에 다닌 사람들의 자녀들, 파키스탄  중상위층 자녀들이었다. 파키스탄 학생들이라고 해도 국토가 넓고 사회계층이나 지역이 한국보다 광범위해서 난 그때 각 학생들의 학습 적응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다. 특히 파키스탄 학생들은 내가 가르치는 서양음악무리 없이, 큰 문화 차이 없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일부  무슬림들은 서양음악 교육을 두려 하는 분위기여서), 또 외국 학생들 경우엔 그전에 어떤 학교 교육으로 음악 과목을 접했는지 배경과 각 학생들의 능력들을 파악해 재밌게 또 아카데믹하게 수업을 꾸리려 노력 중이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미얀마인들에 대한 시위가 약화되자 얼마 후 미얀마인들은 외교단지 안에서 이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일 년 후 즈음엔 자녀들을 학교에만 부모가 직접 운전해서 데려주고 데려오는 제한된 활동만 허락되었다. 그전에 내가 느낀 미얀마 학생들은 학교에선 얌전하고 좀 내성적이면서도 자기 일을 잘하고 남을 배려하며 선생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근데 그들의 외부 활동이 제약받고 있을 시기, 우연히 외교관 지역의 사적 작은 모임에서 그들의 가족을 만났고 내 친구의 한 명이 그 학생들의 학교 수업 공백을 채우기 위한 영어 과외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얼마 후 난 그들의 가정 피아노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었다. 피아노 선생님 제의는 그들 부모에게 내가 먼저 했지만 그들은 반년 이상 머뭇거렸다. 나중에 친해져서 그들이 나에게 말해 준 대답은 이러했다. 외교관 입장에 있는 그들에겐 쉬운 대답은 아니었다.  " 시키고 싶은데... 경제적 여유가 없다. " 였다. 난 그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난 지금 미얀마 학생들이 학교도 못 가고 이런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태로 집안에만 있는 게 마음 불편하고 학생들을 돕고 싶다."라고.

 여러 번 나의 노크에 마침내 그들이 응했다. 일단 그들이 마음을 열고 피아노 레슨을 원하면  내가 갖고 있는 디지털 피아노를 준다는 선조건이었다. 조금 어리 둥절한 그들에게 이런 상황을 인내하는 어린  미얀마 학생들에 대한 나의 선물이라고 내 마음을 말했다. 레슨비도 최대한 저렴하게 책정했다. 다른 학부모들에겐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ㅎㅎㅎㅎ, 그래도 학습자의 책임감은 잃지 않도록 했다. 진지한 수업과 적절한 연습량을 주면서 그들이 잘하고 있는지 신경 썼다.


  분명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우린 피해야 한다. 특히 무슨 이유에 건 누굴 살해하고 이런 일은 우린 피하려 노력해야 한다. 분명 아직도 이런 일들이 세상에선 일어나고 있지만.


 끝없는 인종, 종교 갈등이니 뭐니... 근데 그 결과로 이유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교육권을 박탈되결과낳았고 계속 볼 수만은 없었다.


 예상대로 반년 넘게 학교를 안 가게 된 학생들의 상태는 좀 늘어져 있었다.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사춘기 도입 여학생들이었다.  미얀마 외교관들의 사택에 출입할 때도 Enclave area 출입 때처럼  지역 출입 허가증과 차량에 대한 무기 센서 검열을 통과해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다행히 미얀마 학생들은 예의 바르게 나를 대했다. 두 미얀마 외교관 가정집 학생들, 3명이었다. 착실하고 성실한 학생들이라 다른 학생들에 비해 실력들은 눈에 띄게 빨리 늘었다.

 

 특히 한 미얀마 외교관 아내 되시는 분은 그들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나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시는 것에 대해 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당시 몇 년 전 필리핀 음악 선생님들에게 어떤 이유를 만들어 그다음 날 추방시킨 일이 있었던 나라여서 난 내가 가르치는 서양음악 과목이 학생들에게나 학부모들에게나 어떤 불만이 안 나오기를 기도하며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음악교재를 좀 버릇없는 남학생들이  수업 후 교실 바닥에 던지고 교실을 나가는 일이 생겼다. 처음엔 교재를 만들어 학년별, 학생별로 줬는데 교재를 안 갖고 오는 학생들 수가 너무 많아 수업 후 항상 교재를 교실 탁자 위 바구니에 놓고 나가게 했다. 그즈음 수업 시간에 계속 떠들고 수업 방해하는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는 일이 있었다. 국제학교라 해도 파키스탄 선생님들은 교사의 위치가 한국보다 훨씬 낮았다. 교무 회의도 없고 교사들의 처우는 열악했다. 사춘기 학생들 중 좀 버릇없는 학생들을 관리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수업이 방해될 만큼 계속적으로 산만한 학생들에 대해  충고를 줘야 했다. 이미 약속했던 수업 시간의 많은 선들을 넘었었다.  근데 충고를 들은 몇 남학생들의 말이 꼬리를 이어 진화되고 있었다.  내가 음악교재를 이렇게 교실 바닥에 던지지 말고 바구니에 넣어야 한다고 행동을 보이며 지도를 했었는데 몇 학생들이 음악 선생님이 파키스탄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보였다는 말을 만들었다. 그 이유인 즉 그 음악 교과서에 파키스탄 애국가를 내가 넣어 가르쳤다. 애국 조회 때 보니 애국가를 제대로 음정을 잡거나 정확히 가사를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파키스탄에선 어떠한 반정부, 반이슬람에 대한 개인 의견을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게 불문율처럼 여겨진다. 특히 외국인인 경우 일은 심각해진다.



 근데  철부지 초등 4학년 남학생들은  내가 불순하게 파키스탄 애국가가 있는 음악 교과서를 일부러 바닥에 던져 국가에 대한 존엄성을 해쳤다며 정말 초등 개구쟁이들의 버릇없는 말을 지어냈고 그 말들이 일부 학부모들에게 옮겨지고 교장의 귀까지 갔다. 충분히 사춘기 버릇없는 학생들의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파키스탄 내에선 심각한 문제를 만들 수 있었다. 다른 학교의  필리핀 음악( 선교사 )선생님 두 명도 그런 이유를 달게 해서 확인 절차도 없이 추방한 일이 그 당시 몇 년 전 있었기에 결국 난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그 상태에선 최선이라 생각했다. 문제의 반은 학교의 문제 거리였고 담임교사가 음악 시간에 옆 교실에서 그 반 학생들의 태도를  창문 너머로 보곤 산만하고 버릇없는 행동을 보고 그 반 학생들에게 크게 호통을 쳤다.


 내가 거기선 파키스탄인이 아니라서 그 파키스탄 선생님처럼 매번 야단칠 순 없었다. 특히 음악과목은 재밌어야 하지 않은가.

내가 학교를 떠나는 것에 대해 슬퍼하는 학부모들이나 학생들도 겼다. 어떤 학생은 음악 선생님이 학교 그만두면 학교 안 가겠다고 2주를 집에서 우는 학생도 생겼다. 가슴은 아프지만  신변 보호가 먼저라 그냥  음악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개인지도만 충실히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한국에선 어쨌든 내가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며 강사였는데 파키스탄은 상황이 달랐다. 교무회의 자체가 없었고 어떤 학교의 작은 문제들이 생겨도 회의가 아닌 위에서 명령이 일이 터진 후에 내려왔기에 난 지쳐가고 있었다. 어쨌든 학교 교사를 하며 개인지도를 병행했기에 학교를 그만 둔다고 해도 나에게 큰 문제는 없었다. 파키스탄에 있으면서 개인지도를 하면서 일곱번의 나의 제자 발표회가 있었다. 작은 음악 발표회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 성악, 다른 악기..로 솔로나 듀엣, 그룹 연주였다. 음악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가르치느니 음악 공부를 정말 원하는 학생들에게 개인지도하는 것에 더 보람을 느꼈다. 내가 한  개인지도 학생들은 원체 다양한 국적들을 가진 학생들이라 무대에 오르는 어린 학생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한국에선 여느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초중고 음악 학원 정도의 음악회였으나  파키스탄에선 보기 드문 일이라 텔레비젼 뉴스 방송까지 탔다.

 

  연주회에 미얀마 학생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을 가르치며 미얀마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미얀마에는 학교에 서양음악 과목도 없고 서양음악 가르치는 선생님조차 없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해서 오선지의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선생님이나 피아노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라고 했다.미얀마 사춘기 소녀들은 꼭 K- POP 걸그룹 같은 깜찍한 무대 의상으로 나와 두 곡의 명랑한 피아노 곡을 치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6개월마다 음악회를 했는데 처음 그들이 참석한 음악회에서 잘해서 다른 학부모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 때 내가 40대후반이었는데도 미얀마 사춘기 소녀들 눈엔 내가 K-POP과 뭔 관련이 있고 생동감있는 음악의 나라에서 온 여자라는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ㅎㅎㅎㅎㅎ.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는 게.  


 내가 파키스탄을 떠나야 하는 날 그 미얀마 학생의 아버지가 디지털 피아노 값이라며 얼마의 돈을 주셨다. 예상치 않은 일이었고 너무 예의 바르게 말씀하셔서 난 고맙게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나에겐 미얀마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님과 그런 인연이 있었다.


 지금은 내가 이탈리아에 있지만 아직도 가끔 안부 묻는 문자를 서로 주고받는다. 전에 한 가족은 2021년 3월에 미얀마로 돌아간다고 했었는데 지난달 2월 미얀마에서 시위가 터졌다는 뉴스에 걱정이 되어 안부 문자를 보냈다. 4월에 그들은 미얀마로 들어갔다. 그들이 미얀마에 들어가고 나선 서로 문자 주고 받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다. 미얀마 상황이 해결되길 하루 하루 기도할 뿐이다.


 요즘 미얀마의 하루하루 뉴스를 듣기가 마음 불편하다. 그들에게 좀 더 밝은 내일이 오기를 바란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의 미디어에서 봤던 사진과 영상들이 지금 미얀마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에게 너무도 생소했던 나라인  미얀마의 사람들과 가까이 있었던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지금의 뉴스 영상 속 총알 소리, 그들의 외침, 비명 소리가 더 내게 가깝게 느껴진다. 인간으로 참기 힘든 시간을 우린 같이 보내고 있다.


 지금의 미얀마 땅에서 반정부에 대해 싸우는 용감한 미얀마인들에게 큰 응원을 보낸다. 


 그들이 좀 더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럼 나도 좀 더 행복해질 것 같다.


  더 이상 많은 희생자들이 미얀마에서 안 나오길 기도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3. 내가 만난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