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23년전 취득한 자동차 운전면허를 국제 운전면허로 바꾼 2014년 봄, 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F 10구역의 차 안에서 서툰 차 운전과 방향치로 고전을 치르고 있었다.4월, 5월에섭씨 40도 이상 쉽게 올라가는 파키스탄에선 차 에어컨은쉽게 무용지물이 되었다. 땀은 계속 옷 속으로 흘러내렸고 땀으로 옷들이 몸에착착달라붙기시작했다.
대학생 때 아버지가 운전면허 따야 한다는 말에 한 번에(정말 신기하고 놀랍게) 합격했으나 그 후 23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결혼 전엔 남자 형제들과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되는 상황이었고 또 결혼 후엔 전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 해서 운전할 필요도 없었고 난 내가 기계치라고 생각했었던 같다. 비용절감이란 이유도 있었다.
근데 피할 수 없이 내가 내 인생을 운전해야 시기가 왔다.파키스탄엔 나의 아이 교육 때문에 갔고 여러 일이 있은 후 이혼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법정 이혼 신청을 내 변호사를 통해 내고 다시 파키스탄에 돌아간 상태였다. 이젠 나 스스로 내 인생을 운전해야 한다는 생각했다. 한국 집은 임대를 줬고 아이는 영국학제식 교육을 받아야 했고 난 파키스탄 어린이들에게 음악교육을 하길20년 넘게 원했기에 이혼 결정후에도 몇 년이라도 파키스탄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아열심히 하기로 했다.그동안한국의 찌들었던바쁜 삶을 얼마 정도 벗어나 나 자신을 치유하고 싶기도 했다.
해서 차 운전을 하는 것은 나에게 두 가지 의미였다. 23년 동안 방치한 나 자신 찾기와 내가 갈 길을 정하고 내가 정한 인생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겁이 나고 장애물들이 앞에 있어도 전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땀이 몸에서 흘러내리는 순간, 길 위에서 운전 중 좀 이상해 보이는 소년들 무리를 우연히 며칠 반복해서 봤다. 돌길에 고무 슬리퍼를 신은 남자아이는 6명 중 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맨발이었다. 많이 구겨진 실바 슈트를 입고 있었고(일상복, 외출복, 잠옷 겸용처럼 보였다)한눈에 봐도 싼 면처럼 보이는 짙은 다양한색상의 실바 슈트를입은 아이들이었다. 대충 5세부터 십 대처럼 보이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아이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니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들이라고 했다. 세계의 난민 수가 6천8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난 난민은 아니지만 희망을 쫒아 하루하루 사는 인간인것은 그들과 같다고 생각했다.
문화 배경이 비슷한 파키스탄 사람들조차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첫째 그들은 불법 움집 같은 것을 지어 살고 주민증이 없기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파키스탄 사람들이 하는 정해진 학교 교육이나 안정된 생활을 안 따른다는것이 그이유들이었다.안 하는 건지,하기싫은 건지,못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여러 번 그들을 차를 운전하며 길 위에서 지나쳤다. 그들은 정말 부지런했다. 내가 학교에 오전 7시 15분까지 도착해야 했는데이른 아침 7시쯤에 벌써 일을 시작하는 그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히 모든 남자아이들은 큰 면자루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걸었다. 면자루 길이가 그들의 키보다 길었고 키가 작은 아이들은 면자루를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 걸었다. 잔 나뭇가지나 플라스틱은 분리해서 모았고 그들은 어느 지역에 그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지 아주 잘 안다는 얼굴과 바쁜 걸음으로 바쁘게 그날도 길위를 걷고 있었다. 분명 아침에 그들의 엄마에 의해 잘 구워진 밀가루 빵, 로띠를 몇 장 먹었는지 그들의 얼굴들은 밝아보였고발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6명의 소년 무리가 한 줄로 재빠르게 걸을 때 뒤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신속했다. 꼭 한국의 바쁜 아침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신속히 움직이는 것 같은 신속함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들의 바람에 날리는 팔랑거리는 그들의 다양한 색의 면 옷자락의 움직임이었다.
확실히 한국 학원에서 일하며 만났던 한국 학생들과는 다른 얼굴 표정을 가졌다.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은내가가르쳤던 한국 아이들과는비슷한 연령대였으나 이상하게 덜 난폭하고 덜 스트레스받는 삶을 산다고 느꼈고 확실한 건 충분한 햇빛을 쬐는(아마 넘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개의 학원 가방들을 메고 다니지는 않아도 되고 그날그날 땔감의 나뭇가지나 팔 수 있는 플라스틱을 모으는 게 그들의 일의전부였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들의 행렬을 뒤에서 볼 때면 내 눈을 의심했다. 그들의 작은 몸들은 안 보이고 나뭇가지와 플라스틱 통들이 면자루 밖으로 모양들이 튀여 나왔다. 꼭 큰 둥근 자루들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중엔 밝은 색의 머리카락과 피부, 눈동자들을 가진 남자아이들이 있어서 머리를 여러 일 못 감아 떡이 지고 빗질도 안 해 거의 아톰 만화 영화의 주인공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녀도 한 번에 여전히 귀여운 얼굴들이라고느낄 수 있었다.그들의두명 정도는 납작한 흰색 면모자를 썼었다.다들 짧은 머리였다.
근데 내가 그들을 원거리에서 여러 날 관찰하는 동안 점점 그들에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 그들의 하루 일과는?
2. 부모들은 누구?
3. 어떤 움집에 살까?
4. 대체 하루 얼마 벌고 뭐가 필요할까?
5. 나무는 땔감이고 플라스틱은 어디에서 팔까,
제대로 돈은 받나?
그들은 한국의많은 어린 학생들처럼 안경을 쓰지는 않았다.길위의 일열의 행렬에도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십 대가 맨 앞에 서서 걸었다.
하지만 곧 그들이 시력이아주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멀리서 내가 차 운전을 해도(외국인을 봐서)내게 시선을 주거나 내가 중국인인줄 알고 " 쫘이니~~ 즈, 쫘이니~~~ 즈"콧소리를 내며 무리로 웃곤 했다. 그런 그들의 이런 반복되는 세리머니가 그들의 하루 일과 중 몇 안 되는 유일한 오락거리 중 하나였을지도.
몸은 한국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게한국 아줌마 병인지... 그들이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을 붙여보고 싶은데문제는 그들은아프가니스탄 언어를 쓴다는 것과 그 땅에서 버벅 콩글리쉬만 할 줄 아는 내가 어떻게 그들과 의사소통하냐는 것이었다............. 근데그냥 부딪치면 된다는 한국 아줌마 방법을 선택했다.
런던 거리에서 영국 아이들이 엄마들한테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뭐라고 영어 표현을 쓰는지 20분 넘게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관찰한 적이 있었다. 내가 데려간 내 학원 초중생들이 나와 함께 앉아 관찰했다.
May I..., Can I, I would like to.., I want to..., I like to.., Would you..., Can you..,Please...뭐 이런 문장이 아닐까 추측을 하고 기대와 호기심으로 우린 관찰을 시작했다.
근데 정말웃기게도 반이상되는 유아나 아동들은 엄마와 짧은 시선만 주고받고아이스크림 가게로 엄마의 팔만 끌음으로써 아이스크림을 얻었다. 또는 " 으~~~ "뭐 이런의성어만 낸 후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든지 나머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플Please "이란 단 한 단어만 말하고 곧장 가게로 뛰면 그들의 엄마들은 그 뒤를 따라가 지갑을 열어 돈을 내는 일만 했다. 복잡한문장들을사용안 해도 아이스크림을먹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해서 나도 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눈빛으로 얘기하든, 좀 색다른 억양의 콩글리쉬든, 몇 가지 아는 우르드든 ...다 써보고 손짓발짓이라도 해보자는 ㅎㅎㅎ, 난 역시 거기서도 한국 아줌마였다.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1. 제발 고무 슬리퍼라도 사서 신어라. 위험하다.
2. 내가 주는 돈 똑같이 나눠 가져라.
준 돈 때문에 서로 싸우면 안 된다. 공정해라.
그 임무는 최고 연장자 십 대 한 소년에게 준다.
대신 어린아이들 돈 다시 뺐지 말아라.
3. 난 중국인 아니고 한국인이다.
4. 내가 준 돈으로 간식 사 먹어라
.. 였다.
난 아프카니스탄 난민 소년무리를 두 번 만났다.
첫 만남엔 좀 날 낯설어했다. 작은 눈에 노란 피부의 외국 여자가 그들의 신속한 걸음을 길 위에서 세웠으니.
그전까지 나만 보면 무리로 중국인이라고 놀리다가 내가 차를 세우고 그들을 불러 세웠기에 그들은 좀움칙해 했다. 난 먼저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영어로 말했다. 손으로도 같이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인이며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코리아'... 란 단어를 난생처음 듣는 눈빛이어서 중국 아래 있는 나라라고 말해주며 손으로 지형을 설명했다.그래도 못알아듣는 것 같아 대충 어디가 아프가니스탄이고 어디가 파키스탄이고 어디가 중국이고 어디가 한국인지...땅에다 나뭇가지로 그리며 설명했다.
그들 중 십 대에 속하는 몇 명 얼굴에서 좀 이해 간다는 표정을 읽었다. 다행이었다. 확실히 한국에서 21년동안 학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던 습관이 나에게 남아있었다. 이해한 그 몇명이 나중에 아프가니스탄 언어로 나머지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면 되는 거였다.
미리 6명에게 나눠 줄 돈을 잔돈으로 준비해서줬다.큰 돈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며칠이라도 맘편하게 쉬게 했으면 했다.돈을 주며 나이 많은 아이가 다 갖지 말라고 했다. 다음에 내가 또 만나 확인한다고 했다. 그것도확실한 한국 아줌마 스타일이었다.
고무 슬리퍼마저못 신은 아이들 발들이 돌길 위의 깨진 병 조각 때문에 위험하니 제발 사서 신으라고 했다.그들의 맨발을 처음 본 후 며칠 편히 잠들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난 못 말리는 한국 아줌마다.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들의입장에선 좀 색다른 경험을 했을거라 생각한다. 한 외국인 여자가 그들이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로 뭐라 계속 떠들고 돈을 나눠 주고 손짓 발짓에 땅에 그림까지 나뭇가지로 그리며 뭔가 ...강조하며 ..설명하고 ...가르치고 뭐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정말 난 못말리는 한국 아줌마다.
그들은 처음엔 이해하는 눈빛보단 날 이상한 여자로 관찰하는 듯했다. 난 신경 안 쓰고 내 할 말을 다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땐 우린 좀 더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그들은 날 더이상 중국인이라고 놀리지 않았고 나에게 "헬로, 땡큐, 굿바이"... 뭐 이런 단어를 썼다. 다행이었다. 몇 가지 단어라도 서로에게 전달 가능한 단어를 가졌다는게기뻤다.더 이상 방어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뭔가 나한테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것과 좀 더 다정하게 부드럽게 날대한다는 것을 느꼈다.
항상 내가 그들을 만난 곳은 사람들이 없는 들판이었다. 작은 나뭇가지나 플라스틱을 줍기 편한 곳들이었는데 항상 그들은 일열 옆으로 서서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었다. 꼭 사운드 뮤직뮤지컬의 한 장면 같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솔라와 시도를 한명씩 부르면 한 음계를 채울 수 있는 인원이었다. 그 영화에선 화려한 커튼으로 수녀가 그들의 외출복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산 언덕에 세운 것이고 내가 한 것은 색상이 다른 실바 슈트 면옷을 입고 구름 위를 신속히 가듯 걷는 빠른 발들을 가진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들을 들판에 세운 것이었다. 다음 레슨으로 여기저기 차로 달려야 하는 바쁜 난 그들과 헤어질 때면 우린 서로 뭔가를 더얘기하고 싶었다. 우리의 언어는 눈빛이었다. 그들도 뭔가 얘기하고 싶었고 나도 또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우린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 행복을 좀 더 느끼기 위해서였을까....
그 후론 그들을 다신 만나지 못했다. 몇 년 계속 운전하며 찾았지만 내 생활 반경이 다른 지역 방향 쪽으로 달라지면서 다시 만날 기회를 잃었다. 아마 그들의 부모가 움막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지도
그들은 날 기억할까? 그들과의 만남은 7년 전 얘기다.
나에겐 내 인생에서 짧은 행복한 두 번의 만남이었는데 그들은 어땠을까..?
며칠이라도 내가 그들에게 삶의 즐거움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얼마나 컸고 코로나로 또 얼마나 더 힘든 삶을 살지 또 한국 전형적인 아줌마가 된다.
또 그들을 만나고 싶다. 똑같은 그들을 만나기는 힘들어도 아프가니스탄 난민 어린이들이나 파키스탄 하층민 어린이들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 이번엔 교육 관련 쪽이었으면 생각한다. 난 지금 이탈리아에 있지만 그 방법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