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한국에서 출발해서 파키스탄에 도착했고 드디어 20년 동안 하고 싶어 준비했던 음악 선생님 일을 찾아 나섰다. 음악 과목 자체가 초등학교 수준부턴 없고 서양음악이 안 들어간 나라여서 학교 교장들을 만나서 내가 의도하는 것을 설명하는 게 면접이 되어버렸다. 유치부 학생들은 파키스탄 구전 유아 노래나 영어 라임 노래를 파키스탄 음계로 가르치는 게 전부인 환경이었다. 여러 학교 원장들을 만나며 내가 원하는 학교의 교장을 찾고 있었던 한 5월 초에 마침 내가 마음에 드는 학교의 음악 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다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일단 영어로 수업을 해야 하기에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기초생활영어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파키스탄 중상류층 지식인들의 영어 수준도 높았고 영어 말하는 속도 또한 빨랐다. 파키스탄 중상류층은 영국식 영어에 가깝고 한국인들이 콩글리시 하듯 그들은 파키스탄식 억양을 영어에 넣어 말하는 듯 느껴졌다. 파키스탄은 우르드가 표준어( 5개 이상의 지방언어들), 영어가 공용어였다. 영국식 학제 파키스탄 사립학교에서의 동료 선생님들이나 윗 교육자들과의 영어 대화에선 적응 시까지 긴장감을 가져야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학교의 젊은 여자 교장은 미국 유학파였고 이미 한국인 대학 동창 친구를 봤던 터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 날 뽑은 듯했다. 난 파키스탄 어린 학생들을 위한 음악교육 필요성에 대해 말했고 그녀는 그런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었다. 일단 상냥한 여자 젊은 교장이라 마음이 놓였다. 다른 학교 교장들을 만나 대화를 할 땐 전화예약 후 가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고 인상들이 너무 딱딱하고 무표정에 서양음악이라 하면 얼굴 표정부터 달라졌다(나중에 한 학교 교장한테 들은 내용인데 변질된 자칭 탈레반이란 무리들이 학교에 편지를 보내 서양음악 교육시 학교 폭발하겠다는). 일제히 교장들은 한국처럼 파키스탄도 진학률이 중요시되었기에 음악 과목은 중요과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국식 캠브리지 학제에는 음악 과목이 있으나 파키스탄에선 서양음악을 공부한선생님들이 없어 서양음악을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난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이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비롯 저임금 월급으로 일을 해야 했지만 한국에서부터 많이 고민했던 것이었고 죽기 전 꼭 하고 싶다는 나의 행복 찾기의 한 단추라고 생각하며 의지를 다졌다. 월급은 한국에서 벌던 것에 비하면 최대 순수입의 50배 적은 수입이었지만 교민들은 파키스탄에서 교수 수준 월급이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파키스탄 학교에서 파키스탄 선생님들과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는 이슬라마비드 중심지였는데 외국 대사관 임대용으로 나온 큰 건물을 임대해서 쓰고 있는 학교였다. 면접 본 G6 구역 작은 학교가 한 달 만인가 G6 구역의 비싼 곳으로 이사를 했기에 나도 학교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학교의 일들이 느릴 거라곤 예측했지만 정말 모든 게 느렸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럴 거야, 현지인에게 맞춰야 한다.."라고 매분 나를 통제하듯 수업을 했었다. 근데 5월부터 밖에선 가난한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도로를 점령하고.. 시위는 커져갔다. 좀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부는 학교들에게 휴교령이 내려졌고 그 후 몇 달이 흐르고 있었다. 원래 여름방학이 6월 초부터 8월 중순까지인데 시위로 5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휴교가 되었다. 시위하는 사람들은 대통령궁과 주요 관공서들이 있는 중요 도로들을 막으며 천막을 치며 몇 달을 머물렀다. 여름엔 43도까지 올라가는 이슬라마비드에서 가난한 시위자들이 젖먹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시위를 했다. 급기야 전투경찰에 의해 진압은 되었지만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이 생겼고 뉴스에선 짧게 처리되어 지나갔다. 다시 정상 학교 수업이 시작하는 데는 11월 초까지 걸렸다. 난 다시 분주히 수업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2014년엔 파키스탄에선 유튜브가 금지된 상태였고 급기야 시위 마지막 시기엔 일반인들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제한된 곳만 운전할 수 있었고 TV도 며칠 안 나오고 wifi도 안 들어왔다 ㅎㅎㅎㅎㅎ.
그러던 중 12월 중순에 파키스탄 북부 군 공무원 자녀가 다니는 한 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내 기억엔 146명 정도의 학생들이 피샤와 지역에서 이런 참사를 당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 내가 이슬라마비드에 온 후, 2014년 봄에 F8구역과 F10구역에서 폭탄 폭발이 있었고 사상자들이 있었다. 주변 선생님이 자기가 아는 친구가 영국 유학 후 온 지 1주일 만에 그 길을 지나가다 참사를 당했다고 말하며 슬퍼한 게 기억났다. 한국인으로 문화 충격과 더불어 파키스탄 현지인들이 인간으로 어떤 정신적 트라우마 상처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마음이 아팠는데 ...연이은 피샤워 학교 총기 난사사건은 내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외국 불법 이민자가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일로 또다시 학교들이 휴교령이 내렸다. 두 번째 휴교령이또 내려졌다. 난 지치고 정산적으로 있었다.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이미 이런 일들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본인들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 했다. 그들의 긴 한숨들을 들었다.
2014년은 한국에서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해였다. 파키스탄 TV에 해외 특보로 나왔다고 하며 파키스탄 사람들이 급하게 나에게 말해준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외국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을 보는 것은 정말 끔찍했다.
근데 파키스탄에서도 같은 해에 학생들이 학교에서 목숨을 잃는 피샤워 학교 난사 사건을 뉴스를 통해봐야 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총기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데 한국 뉴스와 달리 TV 뉴스 영상이나 사진, 신문사진들엔 모자이크 처리 없이 사망한 사람들 모습이 나온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나 잔인한 영화도 안 봤던 나여서 더욱더 힘들었다. 뉴스에선 왜 총기를 가진 외부인이 검열없이 학교를 들어갈 수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연일 방송이 되고 있었다.파키스탄은 치안이 안좋아 모든 공공건물을 센서 검열 또는 총기를 든 보안요원들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중상류층 대문엔 총을 든 사립경비가 지키는 나라다. 파키스탄은 공항 입국부터 모든 곳에서 총기 소지 검사를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백화점, 아파트, 학교, 호텔.. 출입 시에도 마찬가지이다. 해서 학교 경비원들도 총을 가지고 근무를 한다. 일반 단독주택 경비원도 총기를 가지고 보초를 서는 나라다. 총기 소유 유무에 대한 센서들이 있는 곳이 많다. 근데 그 피샤워 학교 경비서는 곳엔 없었는지 총기 든 그가 들어간 것이었다.
난 학교의 어린 학생들과 정이 들기 시작한 때라 그 뉴스를 듣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내가 일한 학교는 한 달 수업료만 한화로 50만원 안팎이었고 한 학생당 차량 기사가 따라다니는 파키스탄의 중상류층들의 자녀들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뉴스를 통해 알게 되는 일들 후의 그들의 정신적 충격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2015년 1월 초 무렵
파키스탄 교육부에서 각 학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새로운 담장의 높이 제한이었다. 내 기억엔 새 담장 제한이 3미터인가.. 정도로 기억한다. 그 담장은 철 가시넝쿨의 담장 높이까지 계산된 것이었다. 학교는 철 가시 담장을 올리느라1500만원 정도를 썼다고 했다.
며칠 후 교육부에 속한 한 담당자가 학교로 나와 선생님들을 모아 놓곤 이 사태 후에 비슷한 일이 생길 경우를 위해 선생님들이 할 수 있는 행동 요령 교육을 한다고 했다.
영어로 지시 사항을 말했기 때문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난 더 주의 깊게 들었다. 거기선 나만 외국인 교사였다.
근데 ....듣고 있는 중... 난 내 귀를 의심했다. 해서 주위 선생님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나처럼 긴장하는 모습이 없었다.
내가 들은 내용은 " 외부 침입자가 학교에 들어와 총기로 위협 시 신변보호를 위해 선생님들은 총기 휴대, 사용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까무러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1월 추운 날이어서 그런지 갑자기 더 많이 춥게 느껴졌다. 몸이 굳는다는 느낌과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슴도 뛰었고 그냥 한국이 그리웠다. 눈물도 날 것 같고 내 머리 속엔 맘 편하게 학교 공부 못받는 파키스탄 어린 학생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냥 그 때 한국 거리에서 파는 풀 붕어빵과 어묵이 그리웠다. 먹으면 정신도 차리고 몸도 따뜻해 질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땐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가몹시 힘들었다. 몸에서 소름 같은 것이 생겼다. 몸의 뼈가 다 굳는 것 같은 느낌을 며칠 동안 느껴야 했다. 한반도 북한 쪽에선 김정은이 가끔 공포 조장을 위해 뭘 쏘고 무슨 훈련하고 그러지만 대한민국에선 이런 일들이 없었는데...한국에선 빗나간 경쟁들이 좀 겁나지만....
그 교육부 담당자의 지시 내용을 들을 때난 옆 선생님들에게 물었다. "저런 말 들었는데 안 무서워요? 총 있어요? 총 사용할 줄 알아요? "
내주변에 있던 선생님들이 말했다. "우리에겐 생존을 위한 일상이며 총은 집에 있고 사용법 안다. 전에도 비슷한 일 있어서 우린 당황스럽지 않다"..
난 내 귀를 또 의심했다. 정말 한국가서 겨울에 파는 뜨거운 어묵 국물을 마시고 싶었다. 송송 썬 파 들어간.. 떡볶이도 곁들여서.....,몸의 온도가 쭉 떨어졌고 빨리 집에 가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오늘 들었던 모든 내용을 악몽이라 생각하고 꿈속에서 치유받고 싶었다.
다행히 내가 일했던 2018년 말까진 파키스탄 학교에선 다신 그런 참사는 없었다. 해서 내가 총기를 휴대, 사용할 일도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하지만 치안문제없이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한국의 나의 학창 시절과 파키스탄 어린 학생들을 비교 안 할 수 없었다. 제발 세계 어디서든 학교에서 학생들이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지금도 열악한 곳에서 공부하는 파키스탄 학생들, 특히 많은 인원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립학교 학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여전히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