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첫 항해. 누구든 처음.

이제 나만의 나침반을 꺼낼 차례.

by 달꼼

독립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나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거는 검사 전에 꼭 체크해야 돼요. 나중에 문제 생길 수 있어요.”

“이 약은 시간 맞춰야 하니까, 시간대 헷갈리지 않게 조심하고요.”

“그런 식으로 기록하면 나중에 문제가 되면 엮일 수 있으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써요.”


익숙한 말들이었지만, 하루 사이에 모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규 간호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왜 갑자기 이러세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막차 교육이야.”

“막차요?”

“응. 원래는 다 알려줬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곧 독립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다들 아쉬운 거지.

그래서 ‘이것도 알려줄걸’, ‘이건 몰라서 실수하면 어쩌지’ 하면서 몰아넣는 거야.”


사실, 솔직히 말하면 아쉬운 건 아니다. 독립을 했는데, 이것 마저 모르면 안될 것 같아서 어떻게든 더 주입시키려고 하는 소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 말에 신규 간호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많아요. 지금 것도 겨우 따라가고 있는데..”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교육은 일정에 따라 진행되지만, 사람의 학습은 일정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데, 말이 쏟아질수록 신규 간호사의 얼굴은 점점 복잡해졌다.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그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메모를 멈췄고,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이 어떤 건지 나도 안다. 도와주려는 마음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자꾸 혼나고 있는 기분이에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혼나는 게 아니라, 실수하면 어떡하지, 그 걱정 때문에 그래.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제 더는 옆에 없을지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 말에 그 친구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게 당연하다. 독립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은 커진다. '할 수 있을까' 보다는 '실수하면 어떡하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하는 날이 왔다. 무언가 특별할 것 같았지만, 실상은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더 복잡했다.


인계 시간, 신규 간호사의 말이 조금 어눌했다. 평소엔 깔끔하게 보고하던 부분에서 몇 번 멈칫했고, 말끝이 자꾸 내려갔다.


“오늘 상태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에요. 어제 새벽에 통증 스케일이 7이었고 아, 지금은 2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긴 했지만, 일부러 개입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 친구가 주인공인 날이니까.


업무 자체는 무난하게 시작되었다. 약도 제시간에 준비했고, 바이탈도 빠짐없이 체크했다. 하지만 문제는 기록이 밀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선생님. 이거 오더 변경된 거 반영 안 됐네요.”

“아.. 죄송해요. 방금 그거 하다가..”

“서명도 누락됐고요.”

“아… 이것도…”


문제는 눈앞의 처치가 아니라 그 뒷단이다. 이전에는 누군가가 빠진 부분을 메꿔주고, 체크해줬지만 이제는 그것까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기록과 행정 처리, 그것이 신규 간호사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눈앞의 환자 돌보는 건 어떻게든 하지만, 판단, 기록, 보고 체계는 경험 없이는 익숙해질 수 없는 영역이다.


선배들이 바쁘게 지적하는 사이, 신규 간호사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도와줄까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직접 부딪히게 두었다. 그건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야 다음에는 혼자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까.


오후가 되자, 신규 간호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기록 마무리도 밀렸고, 간단한 행정 등록도 하다 멈춰 섰다. 옆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동료 간호사가 장난처럼 말했다.


“오늘 야근도 독립하려고?”


신규 간호사는 웃지도 못하고 중얼거렸다.

“하.. 그냥 아무 데나 눕고 싶어요…”


다들 피식 웃었지만, 그 안엔 공감이 섞여 있었다. 누구나 독립 첫날은 버겁다.


결국 신규 간호사는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퇴근했다. 가방을 챙기는 손이 느렸고, 퇴근 복도에서 잠깐 멈춰 서더니 말했다.


“독립이라더니 저는 더 혼난 날 같아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원래 독립은 그런 거야."


독립은 완전한 자립이 아니다. 아직 서툴고, 아직 부족하고, 아직 자주 돌아보게 되는 길이다. 하지만 감시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판단을 해보는 순간, 조금씩 간호사로서의 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아직 모든 걸 알지 못해도, 이제는 내가 뭘 모르는지를 알게 된 사람이 되었기에.


그리고 그것이, 진짜 시작이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너를 보고 있는 것 같지? 근데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안 볼 거야. 그때, 네가 너를 어떻게 보는지가 제일 중요해.”


그 말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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