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신이라 하면 MZ들은 모르려나? 식탐이 차서 먹고 또 먹으면 어르신들은 걸신이 들렸나 하셨다. 배에 그지 (거지)가 들어섰냐고도 하고. 먹방이 오랫동안 유행인 요즘에는 많이 먹는 것도 미덕이요, 짭짭한 돈벌이라지만 나의 어설픈 걸신은 육신만 살찌우고 배에 가스만 차게 해서 간병 생활에 도움이 될 리 만무하다. 다행히 하나님이 보우하사 오늘은 교대해 집에 가서 자니 그다지 시달일 일은 없어 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고팠지만, 너무 일찍 시작하면 하루가 너무 길다. 부친은 당연히 아침을 거부할 것이고, 기저귀도 갈았겠다, 느긋하게 늦잠을 청한다. 더구나 오늘은 회진도 없다. 10시쯤 일어나 주섬주섬 챙겨 입고 병원을 나선다. 유명한 외국 장군의 이름을 딴 베이커리에서 부친이 먹을 (엄밀히 말해, 먹을 가능성이 있는) 카스텔라를 계산한다. 계산이 끝난 후에도 냉장고에 있던 신선한 샌드위치가 눈에 아른거린다. 게살을 살까, 계란이 든 샌드위치를 살까, 아니면 세모 모양으로 먹기 좋게 썰어둔 토마토와 야채가 듬뿍 든 샌드위치를 살까 고민하다 계란 프라이가 탑재된 샌드위치를 고른다.
다음에는 부친이 먹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먹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은) 찹쌀 꽈배기 가게에 들른다. 문은 열려있으나 주인장은 말이 없다. 가려진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일부러 대꾸하지 않는 듯했다.
김밥집에 들러 묵은지 김밥과 콩나물 라면을 주문한다. 원래 식습관이 건강한 편인 나는 라면을 자주 먹지는 않지만, 오늘은 삐뚤어지기로 한다. 간병 스트레스는 모든 정크푸드의 섭취를 정당화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양이 많지 않아 이렇게 2인분을 시키면 반 정도는 남기지만 오늘은 걸신들린 날이다. 거의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묵은지의 상큼함, 참기름인지 들기름인지 모르는 고소함, 콩나물을 넣은 시원한 라면 국물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맛있으면 장땡이다. 예의상 단무지 두 쪽과 면 몇 가닥은 남겼다.
밥을 먹은 후 다시 꽈배기 집에 들른다. 오, 사장님이 계신다. 꽈배기 다섯 개와 팥이 듬뿍 든 도넛 1개를 주문하고, 부친이 좋아하는 식혜를 추가한다. 사장님이 전화했었냐고 물으셔서 전화는 하지 않고, 밥 먹기 전에 들렀었다고 말씀드리니 밥을 그새 먹었냐고 물으신다. 김밥을 먹었노라 하니, 왜 부실이 먹었냐 하신다. 병원에 있어 그렇다고 하니 병원에서 일하냐 물으신다. 부친이 아파 간병 중이라 하니, 본인도 부모님 간병하느라 고생했다 하시며 팥 도넛 하나를 더 챙겨주신다. 어차피 마음 편하려고 하는 거 좀 더 수고하라 하신다.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 마음에 연고가 발라진다.
10여 분을 걸어 죽집에 들른다. 쌀죽이 나을지, 잣이나 흑임자와 같은 견과류 죽이 나을지 고민한다. 그래도 환자에게는 짭조름하고 이런저런 재료가 섞인 쌀죽이 나을 것 같아 쌀죽으로 정한 후에도 다음 선택을 고민한다. 소고기는 입에 까슬하게 걸릴 것 같고. 게살은 감칠맛이 좋지만, 입자가 길어 목에 걸릴 것 같고. 고민고민하다 닭죽을 선택해 3개로 소분해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커피숍에 들른다. 위장장애와 목 이물감, 혓바늘이 자꾸 돋아 커피를 끊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마시는데 오늘은 마셔야 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폭식한 데가 라면을 먹은 후의 더부룩함은 커피밖에 해소할 수 없다. 한참을 걸어 나의 최애 커피숍에 들러 드립커피를 주문한다. 이곳에서는 원두를 고를 필요가 없다. 안 사장님이 알아서 맛난 것으로 골라 주시고 잔이 넘치도록 고봉으로 담아주신다.
주문하기 위해 계산대에 서니 바깥 사장님이 일요일에 이 동네는 어찌 출몰했냐며 놀라신다. 지난번 인사드린 날부터 죽 있었노라며 그동안의 스토리를 들려 드린다. 한 달 동안 여러 항생제를 써도 원 증상에 차도가 없어, 결국 암세포나 조직을 찾지는 못했지만, 항암을 시작했다고 했다. 역시 나는 요약의 달인이다.
사장님께 소분한 닭죽과 꽈배기를 나눠 드리고 커피를 들고 나온다. 어찌나 가득 담아 주셨는지, 초록색 신호등 신호에 급히 뛰다 보니 잔이 넘친다. 커피가 넘쳐 손가락에 따뜻한 기운이 적셔진다. 뚜껑 위로 흐른 커피를 주르륵 훑어 마신다. 아, 식도와 코로 전해지는 이 불량하면서도 황홀한 맛과 향.
병실로 돌아와 부친의 식사를 챙기고 - 챙기고 안에는 먹지 않겠다는 부친에게 시원한 샤우팅 한 판 날린 후 다섯 수저를 드시게 한 후, 식혜와 함께 약 세 알을 드시게 한 후, 꽈배기와 카스텔라를 거부당해 조금은 의기소침해진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 넘치는 커피를 절반쯤 따라 마신다.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는 풍미도, 각성 효과도 몇 배가 된다. 풍경이랄 것도 없지만, 창밖 풍경을 한 모금 먼저 마신 후 커피를 마시면 왠지 유명 커피 광고 속 모델 같은 짬과 바이브가 느껴진다.
창문 받침대를 식탁 삼아 넷플릭스 드라마를 틀어놓고 맛의 진리요 최고봉인 계란 프라이에, 살아서 농장으로 도망갈 것 같은 싱싱한 상추 몇 겹, 앒게 썬 슬라이스 햄을 켜켜이 쌓고, 양쪽에 곡물빵으로 마무리한 샌드위치의 양파를 아주 성가셔하며 골라 버린 후 한 입 베어 문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뇨기 4차 병원 간판이 생뚱맞지만 샌드위치 맛을 음미하는 데는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비뇨기과 뷰 맛집이다. 입을 쩍 벌려 샌드위치를 욱여넣는 내 모습이 참 이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커피는 나의 영혼의 치료제다. 클리셰 (Cliche) 같지만 정말 그렇다. 이토록 감미로운 나의 육신 (위장질환, 입병, 불면의 주범)의 파괴자이며, 영혼의 위로자여! 이렇게 교대 전까지 무료한 한나절을 더 버틸 수 있는 만큼의 힐링을 나에게 준다.
P.S. 나도 여기까지가 내 걸신 스토리의 끝인 줄 알았다. 그러고도 두 시간 후에 부친이 거부한 팥 도넛과 쌀 꽈배기를 마저 먹고, 부친이 고작 다섯 숟갈 먹고 남긴 닭죽을 먹는다. 엄마가 꼬막 무쳐 놓으신다고 밥은 집에서 먹으라신다. 시치미 뚝 떼고 꼬막까지 클리어해야겠다. 오늘은 걸신도 아닌 걸신 할아버지가 씐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