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만 원, 앰뷸런스 라이드

by 에포트리슬리

11차 입원 직전 (2025년 8월)


2주일 동안 감기에 시달리며 차도가 없자 로컬 준종합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로컬 병원에서 1주일 정도 치료를 받았으나 크게 호전되지 않았고, 악성 종양 두 개를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어 원래 진료를 받던 서울 병원으로 모셔 오기로 결정했다. 부랴부랴 월차를 내고 기차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지역 번호가 찍힌 전화가 들어온다. 로컬 병원에서 산소 포화도가 낮아 산소 주입 장치가 있는 앰뷸런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이건 무슨 또 청천벽력인가! 부랴부랴 기차에서 내려 병원에 들러 병원 원장과 면담을 마치고, 사설 앰뷸런스를 불러 아빠를 보쌈해 서울 병원으로 향한다. 다행히 부친의 상태가 아주 나쁘지는 않아 안심하고 출발한다. 처음에는 환자가 탄 뒷자리의 사이드 좌석에 앉았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1시간쯤 이동했는데 환자는 누워서 가도 보호자는 사이드 벤치에 앉아 정면이 아닌 옆을 응시하며 가야 하는데 도저히 멀미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환자 상태도 양호해 옆에 앉아 손을 잡아줘야 하는 상태까지는 아닌지라, 한 앞자리로 옮겨 탔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였어. 앞 좌석과 뒷좌석 사이에는 유리 창문이 있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목이 꺾여 담이 오는 것만 제외하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더구나 뒷자리에는 응급구조사 선생님이 계셔 그나마 안심이 된다.


운전하시는 응급구조사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항상 긴급한 상황인지라 겪어야 하는 긴장감에 관한 이야기. 특히 이식할 장기를 이송하시는 경우에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빨라 이동 수단을 교차로 활용하시기도 한다고 한다. 하루 중 왕복을 이동하셔야 하니 힘드시겠다고 물으니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하신다.


잠시 휴게소에 들르자 하셔서 깜짝 놀랐다. 앰뷸런스는 휴게소에 들르지 않는 줄 알았다. 구조사님 왈, 환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아니면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도 된다 하신다. 마음은 급하지만 응급구조사님들과 나 자신의 바이오리듬도 존중해야 하므로 그렇게 휴게소에 들른다.


휴게소에 들러 응급구조사님들께 드릴 핫도그와 커피를 산다. 나도 핫도그를 함께 먹는다. 휴게소의 꽃, 버터를 바른 구운 감자도 사드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나친 여유와 쿨함은 사양한다. 환자는 검사 때문에 금식하는 게 나을 듯싶어 “아빠는 비싼 택시 타고 가니까 안 먹어도 괜찮아”라며 어색한 우스갯소리를 던지고 우리끼리만 냠냠 먹고 다시 출발한다.


길이 잘 뚫릴 때는 그냥 죽 운전해서 가시더니 서울에 근접하면서 길이 막히기 시작하니 사이렌을 울리며 차선을 종횡무진, 갓길도 타고, 신호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하신다. 아, 이것이 진정한 앰뷸런스 바이브구나! 심장이 덩달아 쫄깃하다. 뒷좌석의 응급구조사님에 따르면 이 정도 과속이나 곡예 운전은 약과이고, 특히 심할 때는 앞 좌석에 타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라 하신다.


중간에 부동산 사장님과, 임대인과 전화 통화를 한다. 이 난리인 시국에도 나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프로젝트 때문에 부산에 체류하다가 서울에 일정보다 빨리 올라왔다. 1월까지 계약한 아파트를 일찍 빼게 되었는데, 나와 친한 부동산 사장님께서 주인에게 말하면 난리를 칠 테니 들어올 사람을 구해놓고 말하자 하셔 그리하마 했다. 그런데 사정이 꼬인 것이, 이 사정보다 백배는 베베 꼬인 그 집주인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라, 갑질을 하고 싶은 것이구나. 그래서 내 사과를 직접 받고 싶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 성정상 계약 만기 때까지 월세를 다 물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한바탕 퍼부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깊은숨을 쉬며, 다시 상황을 판단해 본다. 원래 삶은 죽어라 죽어라 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또 다른 힘든 일이 엎친데 덮쳐 그나마 겨우 지탱하고 있는 무릎을 꺾어 놓는다.


그러나 나는 어른이다. 몇 달 월세를 절약하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자본주의 어른이다. 한 달 월세를 절약하면 이 호화스러운 앰뷸런스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아빠의 병환이라는 굉장히 드라마틱하면서도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상황이 아닌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역겨운 마음을 깊이 누르고 심호흡을 한 후 전화를 건다. 보통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나긋한 음성과 예의 바른 톤으로 사과의 뜻을 전한다. 지금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중이라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먼저 말하고, 필요하면 영상통화로 확인시켜 주겠다고 당당히 밝힌다. 집주인이 펄쩍 뛰며 그런 상황까지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10분 여를 통화했을까?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집주인은 많이 누구러졌으나, 여전히 부동산이 맞춰 둔 세입자는 받지 않겠다 한다. 개인이 아닌 월세 미납 부담이 없는 기업 세입자를 들이겠다고 한다. 오호라, 1월까지는 돈이 들어온다 이거지…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지만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게 급해, 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쏟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속으로 욕은 살벌하게 해 준다. 나는 욕을 할 권리가 있다. 나는 아픈 아빠를 앰뷸런스에 싣고 가는 가련한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도어 투 도어로 이동한 덕에 생각보다 빨리 3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감탄스럽다. 기차로 이동할 때 출발지-기차 이동-목적지까지의 모든 소요시간을 합친 것에 필적한다. 긴장한 탓인지 좁디좁고 답답한 앰뷸런스 앞자리 승차 경험은 그리 최악은 아니다. 뒷좌석의 응급구조사 선생님이 환자를 내리는 사이 결제를 한다. 결제 금액은 더더욱 감탄스럽다. 47만 원... 쿨하게 일시불을 외친다. 할부해 봤자 깎아주는 거 아니다. 어차피 낼 돈 다음 달에 빈궁해지나, 그다음 달에 빈궁해지나 도찐개찐이다. 벌기는 어려운 남의 돈이 쓸 때는 피 같은 내 돈으로 순식간에 날아간다.


항공사 마일리지는 많이 쌓이겠네… 좋은 점이 하나는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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