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살상과 병원등 시설물 파괴를 일삼으며 고담시를 패닉으로 몰아 부친 조커는 기자등에 최후의 경고를 한다.
“오늘 밤 고담시와 시민들은 내 소유가 된다. 싫으면 도시를 떠나라 특히 교량과 터널을 지날 때 조심하라”
이에 패닉에 휩싸인 고담시민들은 대피를 하게 된다. 급기애 대형 선박 두척이 동원된다, 한 척에는 고담시의 죄수들을 잔뜩 태우고, 또 다른 배에는 일반시민들을 실는다. 배가 출항하자 조커가 전화를 걸어 게임을 제안한다.
“지금부터 사회실험을 하겠다. 배에서 내리면 다 죽는다. 자정이 되면 두 배 모두 폭파된다. 살고 싶으면 자정이 되기 전에 기폭장치를 눌러라. 그러면 상대방 배가 폭파된다. 기폭장치를 누르면 산다.”
그럼 이 게임의 성격은 무엇일가? 제로섬게임인가?, 죄수의 딜레마 같은 논제로섬게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치킨게임인가?
다수는 제로섬게임이나 죄수의 딜레마로 보지만 필자는 치킨게임으로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는 치킨게임이었으나 조커의 거짓말에 의해 죄수의 딜레마게임으로 전환된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익과 손해를 전부 합산하면 반드시 제로(0)가 되는 게임이다. 즉, 누가 얻는 만큼 반드시 누가 잃는 게임을 말한다. 이 게임은 좋은 협상으로는 파이를 확대할 수 없다.
대부분의 스포츠나 체스, 장기 같은 게임들은 모두 제로섬 게임이다. 누가 1승을 얻기는 위해서 누구는 1패를 해야 한다. 경마나 슬롯 머신과 같은 도박은 주최 측의 몫을 제외하고 패자로부터 모은 돈을 우승자에게 나누는 장치이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외환거래(선물거래)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제로섬 게임의 당사자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어떠한 고려도 없이 열심히 경쟁하여 상대를 이기는 수 밖에 없다. 얼핏 보면 조커의 제 3게임도 이와 비슷하나 둘은 다르다.(후술)
제로섬게임과 는 달리 득, 실의 합이 0이 아닌 경우이다. 둘 다 이득이 되는 '윈윈(win-win) 효과'가 나올 수도 있고, 둘 다 손해가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승패가 갈린다고 해도 이득과 손해의 합이 0이 아닌 경우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게임이다.
대표적으로 죄수의 딜레마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주식도 이 게임에 포함된다. 시장 전체로 보아 전체 주가가 오르면 시가 총액이 증가해 그 늘어난 만큼 가치가 생겨난다. 즉, 상승 추세에서는 시가 총액이 늘어난 만큼 모두가 이익(win-win)이 되고, 하락세에서는 시가 총액이 줄어든 만큼 모두가 손해를 본다.
치킨게임은 제로섬도 논제로섬도 아닌 게임이다. 여기서 치킨은 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를 의미하는 영어의 속어다. 유래는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놀이로, 두 명의 운전자가 서로 정면충돌하는 코스로 질주를 하여 먼저 피하는 쪽이 지는 게임이다. 이 때 먼저 회피한 사람을 치킨(겁쟁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둘 모두 피한다면 둘 다 겁쟁이라는 오명을 쓴다.
이 게임은 보통 양쪽 모두 손해를 보고 자멸하는 상처뿐인 영광으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이판사판게임이다. 이는 상대보다 무작정 가격을 낮추는 출혈경쟁등에서 볼수 있다. 가장 근래에 유명했던 사례로는 2007년부터 2009년 6월까지 계속됐던 반도체 D램 분야의 치킨 게임이 있다. 한동안 RAM값이 똥값이라 부를 정도로 떨어졌던 원인이었는데, 그 결과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다른 반도체 기업들을 압도하였고 점유율 5위였던 독일의 퀴몬다는 파산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최고의 기업이 되는 발판이 되었던 사건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대표적인 비 제로섬게임(Non Zero Sum Game)이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두 명의 사건 용의자가 체포되어 서로 다른 취조실에서 격리되어 심문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 자백여부에 따라 다음의 결과가 기다린다.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둘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을 복역한다.
죄수 B의 침묵 죄수 B의 자백
죄수A 의침묵 죄수 A.B 각자 6개월씩 복역 죄수 A 10년 복역 죄수 B 석방
죄수 A의 자백 죄수 A 석방, 죄수 B 10년 복역 죄수 B 각자 5년씩 복역
이러한 죄수의 딜레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견해를 취하는 가에 따라, 즉 인간의 본질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인간의 본질을 이기적이고 이 이익을 위해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하면, 상대방이 취하는 행동과 무관하게 자신이 자백하는 것이 이득이므로 둘 다 자백을 택하게 된다. 그 결과 둘 다 3년의 징역을 살게 된다는 이론이다. 각자가 최선의 이익을 보려는 행동으로 인해서 모두가 오히려 큰 손해를 본다. 이는 개인의 이기성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이론이다.
인간의 본질을 이타적이면서 이를 위해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하면, 은 상대방를 위해 자백을 하지 않고 모두 침묵을 할 것이다. 그럼 둘다 6개월만 살고 끝날 것이다. 반드시 이타성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두 죄수가 우애가 좋은 형제나 친구, 깊이 사랑하는 연인 부부인 경우 또 양심범, 확신범의 경우는 상대를 위해 상대가 자백하고 자신은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 양쪽 모두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1)처럼 인간의 본질을 이기적으로 전제한다. 따라서 둘은 상대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자백을 선택한다.
이제 영화로 돌아와서 조커의 제 3게임을 분석해 본다.
1) 영화 속 조커의 게임은 제로섬게임인가? . 제로섬게임은 반드시 한쪽이 이익, 한쪽이 손해를 보는 경우를 말한다. 둘 모두 이익인 경우나 둘 모두 손해인 경우는 둘의 손익의 합이 0 이 아니므로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그런데 조커의 게임에서 죄수와 시민 모두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는 경우는 모두 폭파되어 죽게 되므로 둘 모두 손해여서 0 이 아니라 마이너스 이므로 제로섬게임이라 부를 수 없다.
2) 또 조커의 게임은 논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논제로섬게임은 양측 모두 이익이 되는 WIN-WIN의 방법이 있으나 원래 조커의 게임에는 양측 모두 죽거나 한쪽만 살아날 뿐이어서 모두가 이익이 되는 그런 경우는 없다.
3) 결론적으로 조커의 게임은 치킨게임적인 성격을 갖는다. 자폭장치를 눌러도 누르지 않아도 손해 뿐이다. 자신들이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대량학살을 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평생 시달릴 것이다. 이래도 손해 저래도 손해 이판사판 게임이 분명하므로 조커의 게임은 치킨게임 성격을 갖는다. 물론 두 당사자가 이게임을 스스로 원하지는 않았다는 측면에서 스스로 원하는 측면이 있는 출혈경쟁등 일반적인 치킨게임과 다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커의 제 3게임을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시민배 침묵 시민배 기폭장치 누름
죄수배 침묵 모두 사망 죄수배 폭발/ 시민배 생존
죄수배 기폭장치 누름 죄수배 생존/ 시민배 폭발 먼저 누른 배 생존
여기서도 죄수의 딜레마처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전제가 가능하다. 아니 시민들, 죄수들이므로 집단지성의 본질이라 해야 더 합당할 듯하다. 즉 집단지성의 본질을 공리성으로 규정하는 경우와 의무성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집단의 본질은 공리주의 원칙을 추구한다고 전제한다. 즉 그들은 집단 이익(행복, 쾌락)을 추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이러한 치킨게임에서는 양쪽 모두 먼저 기폭장치를 누름으로써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공리주의 원칙상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는 침묵을 선택할 수는 없다. 이처럼 공리성으로 규정하는 경우 경우 시민배가 폭파되거나 죄수배가 폭파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결과를 야기해야 한다.
집단지성은 그렇게 이기적 악마적인 성격이 아니며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는 성질을 가진다고 전제할 경우에는 전혀 다른 결과를 야기한다. 시민들도 죄수들도 의무를 준수하는 집단지성이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양쪽 다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결과로 자정이 넘으면 양쪽은 폭파되어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이처럼 의무주의는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한 결론에 도달하는 면이 없지 않다.
원래는 치킨게임적 성격을 가졌으나 조커의 거짓말 또는 배트맨의 저지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논제로섬게임으로 그 성격이 변화한다.
조커는 시민들 즉 집단지성의 이기성, 공리성을 전제로 한다. 이를 필연적 전제라 하면 두 집단은 서로 기폭장치를 누를 수 밖에 없다. 그중 먼저 누른 집단은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야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담시의 인간들은 자기만 살려는 이기주의자임을 폭로하고, 혹시 살아나더라도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려 도덕적 낭패감을 보려하는게 그의 목적이었다. 죄수의 딜레마도 그렇지만 조커의 게임도 인간의 이기성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게임이다.
2) 영화속에서 기폭장치를 눌러 상대방 배를 폭파 할 것인가를 두고 혼란에 휩싸인다. 보통 시민들은 투표로 결정을 한다. 시민들 투표결과는 찬성 396, 반대 140으로 기폭장치를 누르는 쪽을 선택한다. 그들은 조커가 예견했던 것처럼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집단이기주의를 거침없이 표명했던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결정으로 보인다. 오히려 반대 140이 위대해 보이기보다는 엉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죄수들은 그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보스인 듯한 사람의 결정을 숨죽여 기다리는 듯 하다.
비록 투표로 찬성 결정을 내렸지만 시민들은 누구도 앞장서서 기폭장치를 누르지 못한다.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자신이 기폭장치를 누르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포기하고야 만다. 고민을 거듭하던 죄수들의 보스도 기폭장치를 바다속에 던져버린다.
양측 모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써 조커의 의도는 빗나간다. 집단지성은 공리보다는 의무를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도 가능한 가는 의문이지만 영화는 이렇게 도덕적 엄숙주의로 맺는다.
3) 반전
조커의 장담과 달리 자정이 넘었지만 양쪽 배는 폭파하지 않는다. 이로서 이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논제로섬게임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버린다. 조커가 거짓말을 한 것인 것도 같고 배트맨에게 사로잡힌 조커가 포기한 것도 같다. 조커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조커는 시민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신봉했기에 이 경우를 대비하지 않은 지도 모른다. 이로써 양쪽은 모두 살아난다. 이로서 모두가 WIN- WIN 하게 된 것이다.
6. 맺으며
감독은 시민들의 이기성 악마성을 옹호하는 조커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는 집단지성의 본질을 공리성이 아닌 의무성에서 찾았다. 시민들과 죄수들은 자신들이 죽더라도 사람을 살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보편적 의무를 그야말로 목숨걸고 지켜 낸 것이다. 감독은 조커의 제 2사회 실험과 마찬가지로 또 한번 칸트의 의무주의의 편에 선 것이다. 감독의 칸트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고 이를 지지한다.
시민들의 이타성, 공감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만 우리는 건강한 사회 건설이 가능한 것이기에 감독이 그렇게 결론 내린 듯 하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 시민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길 기원한다. 아니 우리 위대한 우리 대한국민들은 반드시 그런 결정을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