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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패왕 Sep 18. 2022

서편제-사회를 초월하여 아름다움(美)의 나라로

구조를 넘어 노마드 주체로!

서편제     

이 영화는 1993년 임권택 감독 작품으로 이청준의 단편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다.      


1.줄거리 요약

서울에서 창극단원으로 활동하는 유봉(김명곤)은 단장이자 자신의 스승의 애첩인 추월이와 스캔들에 휩싸여 극단으로 파문을 당하고 낙향하여 소릿꾼 생활을 이어간다. 총각의 몸으로 부모를 잃은 송화(오정해)를 키우면서, 아들 딸린 과부인 금산댁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금산댁은 유봉의 아기를 출산하다 그만 태아와 함께 사망해 버린다. 유봉은 남의 자식인 송화와 동호를 친자식처럼 키우며 그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친다. 해방전후 서양의 악기와 음악이 들어오고 판소리는 사람들에 외면당한다. 유봉은 조선 7대 천민인 재인이라 천시당하고 송화도 기생취급을 당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의 성격인 유봉은 그 어느곳에서도 어울리지도 못하고 환영 받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양아들인 동호는 더 이상 희망 없는 소리꾼 생화을 저주하며 서울도 떠나 버린다. 동생을 잃은 송화도 식음을 전폐하고 판소리도 거부한다. 이에 송화도 자신을 버릴 것이 걱정된 유봉은 한약에 부자라는 약초를 넣어 송화의 눈을 멀게 해 버린다. 한이 쌓여야 득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서... 봉사가 되어 버린 송화는 결국 다시 판소리를 이어가고 점차 유봉의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병든 유봉은 죽고 송화는 주막과 술집 이집 저집  전전하며 판소리를 이어간다. 누나를 찾아 나선 동호는 영광 근처에서 송화를 만난다. 둘은 서로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판소리 심청가로 밤새 회포를 풀고 헤어진다. 송화도 3년간 머물렀던 술집을 떠난다. 어린 꼬맹이 딸이 이끄는 줄을 잡고 송화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머나먼 길을 떠난다.       



2. 이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영화는 서양의 팝 문화에 의해 죽어가는 한국의 판소리를 살리고 보존하기 위한 유봉의 고난에 찬 일생을 표현한 영화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판소리라는 난파선을 붙잡고 발버둥 치는  어리석은 한 가족의 고난의 행군을 그린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라는 것에 초점을 두면 자신의 욕심을 자식에게 투사하고 이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만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영화로 볼수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처한 상황과 인간의 주체적 자유를 긍정하고 개별적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면 이 영화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비 본래적인 기계적 삶을 거부하고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 하려고 분투하는 니체적 위버맨쉬(초인)으로서  유봉과 송화를 그린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예술인 가족의 삶을 그리고 있다. 즉 영화라는 예술작품이 예술인(소리꾼)을 주인공으로 삼아 예술(판소리)의 완성을 향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즉 예술이라는 액자(영화)안에 예술이 담겨있는 구조인 것이다. 영화속 소리꾼 가족은 예술의 완성, 즉 아름다움(美)의 완성을 위해 뼈를 깍는 아픔을 감수하고 있고

액자에 해당하는 영화(감독)은 가난하고 떠도는 그들의 삶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영화속 예술인의 삶에 대하여는 그들이(유봉과 송화)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영화로, 액자 밖은 후기 실존의 회복을 외치기 보다는 후기구조주의 입장에서 일체의 자리와 이름을 거부하고 유목민처럼 떠도는 노마드적 주체인 유봉과 송화를 그려 낸 영화로 읽고자 한다. 



3.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유봉과 송화의 꿈은 한(恨)을 승화하여 넘어서면 동편제도 없고 서편제도 없는 득음의 경지만 존재하는 그러한 목소리를 얻는 것이다. 이는 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아름다움을 완성한다는 의미가 무엇이길래 이 가족은 이를 위해 모진 고통을 겪는 것일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1) 미(美)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어 kalom는 아름답다는 의미인바, 음악에서는 적절한 비율, 건축에서는 대칭등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는 질서 비례 조화가 이루어진 것을 아름다움이라 정의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러한 정의에 대체로 동의한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는 영원하고 불변한 참된 실재로서 미(美)가 객관적으로 실제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칸트는 미와 숭고는 인간 내부의 쾌의 감정이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의 성질과는 무관하다고주장하여 주관적인 미 개념을 주장하였다. 

현대의 보들레르는 덧없고 추하고 불완전한것도 미속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자들은 탈도덕을 주장하며 상스러운 것들속에서 급진적인 미학의 요소를 발견하자고 주장한다.

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유봉은 좋은 소리를 위해 배우고 또 노력한다. 최고의 소리꾼이 되고 싶은 것이다. 최고의 소리꾼은 최고의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유봉과 송화는 극치의 아름다움에 도전하는 것이다. 

위 어느견해에 의하더라도 유봉과 송화가 도전하는  한국의 판소리가 아름답지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아름다움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유봉은 자신이 죽기전에 고백을 한다.

"내가 니 눈을 그렇게 만들었다...... 니가 나를 원수로 알았다면 니 소리에 원한이 사무쳤을 텐데 그런 흔적이 없구나. .... 이제 부터 니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

이러한 유봉의 말은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객관주의 

아름다움은 대상인 작품속에 내재한다는 견해이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비율이다"라고 주장하여 아름다움은 작품속에 들어 있는 객관적인 속성이라 주장한다. 


2) 주관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미감이다. 즉 아름다움이란 작품이 가지는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라 이 작품을 보고 있는 나의 주관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미적판단은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 필연성을 띤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론에 비추어 보면 유봉은 객관주의 입장인 듯 하다. 송화에게 한을 심어주어야 한을 승화한 목소리가 나와 진정한 소리꾼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송화의 목소리는 작품과는 불가분의 관련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예술의 본질과 음악의 본질

<1> 예술의 본질

플라톤은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라 주장한다. 그는 현실세계와 이데아세계를 양분하여 현실은 이데아계를 모방한것이므로 이데아는 진짜 현실은 가짜라 주장한다.  이에 의하며 예술은 현실의 모방이므로 가짜의 가짜가 된다. 그는 호메로스의 작품의 예를 들면서, 신은 부도덕하고 영웅은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불한당이라 비난하며 예술작품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주장하고는 예술가를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현실의 모방은 맞지만 플라톤 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모방하고 있다고 본다. 즉 대상이 가지는 본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중 유봉과 송화는 기존의 춘향가와 심청가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판소리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의 입장에 기운듯 보인다. 


<2> 음악의 본질(유튜브 5분 뚝딱철학 참고함)

판소리도 음악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의 본질은 무엇일까?

1)관련주의

음악은 음악밖의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입장이다. 화사한 느낌의 음악은 봄을 지시하고 슬픈음악은 누군가의 죽음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음악에 감동을 받는 이유는 그 음악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이 지시하는 어떤 이미지나 정서 혹은 사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백남준이 악기를 부수는 소음도 지시체가 있기때문에 음악이 된다. 영화 서편제에서는 춘향가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지시하고 심청가는 심청전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2) 형식주의

음악은 음악외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것이 아니라 음악 자체내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체내의 음계의 특징이 화사하거나 슬프거나 활기차거나 하다는 것이다.  이를 영화에 대입하연 송화의 목소리에 슬픔과 기쁨,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3)절대표현주의

위 두이론을 절충한 이론인데, 음악은 음악속의 특징(형식주의 요소)과 음악외의 일상의 감정(관련주의)을 표현(지시와 다른개념)한다고 한다. 지시는 사진 처럼 사실 그대로 이지만 표현이란 작가의 창의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를 테면 전자는 소의 실제 사진이고 후자는 이중섭의 소의 그림이 될것이다. 예술은 지시가 아니라 표현이다. 우리의 희노애락을 표현해 준다는 점에 음악의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에의하면 송화의 한이 서려있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형식주의)가 음악 외의 심청천과 춘향전을 잘 표현했기에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4)칸트의 미학이론과 송화의 판소리

칸트는 그 대상이 아름다움을 내뿜어서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객관주의 부인)내가 그렇게 느끼고 인식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인식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마치 우리의 인식작용에 시간 공간이라는 감성형식과 오성의 12범주가 선험적인 틀로서 구비되어 있듯이 다음과 같은 4가지가 우리의 판단력에 선험적인 틀로서 장착되어있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미란 모든 사람들이 형식의 경험으로 부터 당연히 도출해 내는 쾌에 관한 무관심적 보편적 필연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알아보고 영화속의 송화의 판소리 예술이 이에 부합하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1> 미적판단의 4가지 요소


1) 무관심적 관심

여기서 무관심은 사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이 그림은 내가 그렸으므로, 이 조각은 팔면 큰 돈이 되므로, 이그림은 정의를 표현했으므로, 등등, 감각적이나 도덕적인 관심이 넘치는 예술품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적인 관심이 사라자면 아름답다는 판단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관심성은 예술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하는 거고, 예술애호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감상하는 거라는 식의 예술지상론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미적 판단은 정치나 경제 등 다른 어떤 요소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무관심인 것은 아니다. 오로지 예술이 좋아서, 비율이 아름다워서,  표현이 뛰어나서 정도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 이를 무관심적 관심이라 한다. 


이를 영화에 비추어 보면, 아들 동호가 "이젠 소리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여. 그깟 소리하면 쌀이 나와 밥이 나와"하자 유봉이 소리친다."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나와야만 소리하느냐? 지소리에 지가 미쳐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 더 좋고 황금보다 더 좋은 것이여"

여기서 유봉은 예술가 이면서도 자신의 판소리 와 송화의 판소리에 대해서는 감상자의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유봉의 위와 같은 태도는 무관심적 관심의 신봉자인 것처럼 보인다.



2) 주관적 보편성

개개인의 주관적 감상이지만 그것은 보편성을 지녀야 참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먼저 주관적 이라함은 아름다움은 대상에 있지 않고 감상자의 마음속에 미적 쾌감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주관적이면 보편성이 인정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보편성은 객관성과 짝을 이루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미적 판단에서는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이 가능하다고. 감상자들의 무관심성 으로 인하여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아름답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상호주관의 합의인 셈이다.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판소리는 이 요건을 충족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명창들의 판소리는  온 백성이 감탄해 마지 않는 예술이었고 현재에도  서양음악에 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보편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이는 유행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3) 목적없는 합목적성

 여기서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란 내용의 목적을 배제한 작품의 형식적인 합목적성을 의미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것은 내용이 아니라 오직 형식이다. 조각이나 미술 꽃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 표현 내용이 아니라 형식, 즉 비율, 조화등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변하고 사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란 형식적인 합목적성을 의미한다.  칸트에 있어서 예술작품의 형식은인간의 합목적적인 활동의 결과이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영화속 판소리 역시 목적없는 합목적성, 즉 형식적 합목적성에 부합하는 예술양식이다. 



4)주관적 필연성

미의 판단들에 있어서 어느 한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할때 모든 사람들이 이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래야만 개인의 헛소리가 아니라 진정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필연적으로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저것은 아름답다는데 동의하는 공통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우리모두가 도덕감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판단력 비판에서 우리가 공통감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영화속 판소리는 칸트의 위 4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참 예술로 판단할 수있다. 


<2> 칸트의 미학이론의 의미와 서편제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으로 현상의 세계를 규명하고, 실천이성 비판으로 초월세계인 당위의 세게를 해명했으나 이 두세계의 간극은 넓었다. 바로 이 둘을 매개하는 세계가 바로  미의 세계이다. 칸트는 예술적 상상력으로 사실의 세계에서 초월의 세계로 가로질러 3개의 세계를 통합하려는 것이다. 

상상력이란 개별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것에 포섭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은 합목적성 개념과 연결된다. 어떤 대상이 합목적적이라는 것은 그 대상이 신이 그것을 창조한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결국 신의 목적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서 대상의 합목적성을 보는 것을 뜻한다이것은 신의 목적 신의 계획을 힐끔이나마 보는 것과 같다이로써 우리는 신의 세계 초월적 세계 당위의 세계 도덕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유봉과 송화가 그 험난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득음의 경지를 얻으려 하는지 칸트의 미학이론이 해명해주고 있다. 유봉과 송화는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고통스런 세상을 초월하고,  신의 나라에 귀의하여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 구조에 갇힌 수인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은 구조속에 갇힌 수인(죄수)라고 규정한다. 위 영화에서도 유봉가족은 사회구조에 갇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갇힌 곳은 과연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가?


1) 구조란?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는 관습, 법규, 담론, 도덕, 권력-지식(푸코), 사건(들뢰즈)등으로 그물망처럼 구조화, 법규화, 코드화 되어 있다. 모두 언어로 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해하기 쉽게 이를 눈에 보이는 건물의 구조로 비유해 보자. 계단과 평지는 없고 오로지 엘리베이터만 가득 찬 건물을 생각해 보자. 거기서 우리는 엘리베이터만 탈 수 있을 뿐 계단이나 평지를 걸을 자유는 없다. 롤러코스터만 설치되어 있는 건물은 어떨까? 물만 가득찬 건물은?  이런 곳에서 걷거나 눕거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즉 구조화 되어 있는 곳에 자유나 개성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건물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수동적으로 자유나 주체성이 인정될 것이다. 이는 참 자유도 참 주체성도 아닌 건물이 부여하는 종속적 특성일 뿐이다. 

건물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담론과 권력지식 사건등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 살인 절도등 법으로 구조화 되거나, 교회, 정당처럼 신앙, 정치  담론으로 구조화 되거나, 스승이나 부모를 욕하는 것 금지, 동성애 금지등 도덕으로 구조화 되거나, 북한 백두혈통을 찬양금지, 공산주의 찬양금지등 권력 지식에 의해 절대금지 되어 있는 것, 또는 죽다라는 사건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사건으로 구조화(들뢰즈)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가족에는 가족이 지켜야할 것이 있고, 교회에는 교회의 담론이, 학교에는 학교 담론, 직장에는 직장의 담론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담론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버림받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거나 소외되고야 만다. 이과정에서 주체(=자아=정체성)이 형성된다. 즉 인간에게 본래 고유한 자아(=주체 =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교회등 사회가 주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에서 자유는 거의 없다. 자유가 없기에 주체가 강제로 형성된다. . 그가 위치한 자리와 이름이 그의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2) 이름과 자리가 주체를 만든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의 주체성을 부인한다. 주체가 자유롭게 결단하는 실존주의와는 달리 구조속에서 자리와 위치가 주체를 만든다. 가정에서 아들과 딸의 역할은 그가 속한 가족이 부여한다. 회사에서 과장의 역할은 그 회사가 결정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인간은 구조속에 갇힌 죄인이기에 인간이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인간을 결정하게 된다.     


3) 노마드적 주체-후기구조주의

노마드는 유목민을 뜻하는데  정착하는 농경민과 달리 자리와 위치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자아 실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일체의 인간 자유와 행복을 가로 막는 경계와 벽을 뛰어 넘으려는 새로운 인간상을 지칭한다. 

 전기 구조주의는 인간의 주체나 자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기계적 결정론이었기에 노마드 주체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기 구조주의에서는 구조도 변한다는 푸코의 역사적 구조주의를 이어받아 들뢰즈는 노마드적 주체를 인정한다. 이는 여전히 수동적 주체라는 점에서 실존주의의 주체와는 다르다. 

기존의 세계에서는 이름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주체는  자리 이름의 체계를 벗어나는 주체, 그런 체계의 격자를 가로지르는 주체, 즉 노마드적 주체가 바람직한 인간상이다.  등에 기타 메고 돌아다니는 짚시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격자를 가로지른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낭만적 열정이 있어야 한다. 노마드적인 주체 가로지르는 주체는 영원히 젊은이로써 살아가는 그러한 주체이다.     


4. 유봉이 마주한 세상


 1) 세상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시점의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밀물듯이 밀려오고, 서양의 대중문화가 쏟아져 들어온다. 유교적 전통농업사회가 서구식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를 푸코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에피스테메(사고체계) 변동기, 즉 구조의 격변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은 가부장제가 여전하고 , 학교는 있는자의 전유물이고,  사회는 지주중심의 농업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서양의 자본주의가 밀물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시대에 발맞추어 자본주의 정신을 익히고 서양 대중문화에 자신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사회는 기존 봉건질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 질서와 서양문화 담론으로 법제화, 도덕화, 코드화, 되어 한국 사회는 구조화를 공고히 한다.  코드화로 겹겹이 사람을 옥죄어 온다. 모두가 이 구조에 맞추어야만 한다. 이 사회 구조를 거스르고 대항한 자는 감옥가거나 추방당하거나 고난의 행군을 해야만 한다.   유봉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구조속의 안주냐? 구조로 부터의 탈주냐?   


2) 유봉의 인간형

유봉은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가는 곳마다 쌈박질 하고 사람들의 천시와 외면을 받는다. 모두가 새로운 에피스테메에 자신을 엮어넣을 준비로 모두가 여념이 없는데 유봉은 이를 거부한다. 다수가 판소리를  구시대 유물 취급하고 외면하지만 유봉은 판소리를 통한 자기 완성의 길을 택한다.  그는 오로지 득음의 경지에 도달할 목표밖에 없다. 물질적 욕심이나 행복에의 갈망도 없다. 오로지 그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유봉은 전통의 인간형( 이성적 인간형, 욕망적 인간)으로도 분류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모든 장애물과 경계를 뛰어 넘어 자아 실현을 하려는 노마드적 주체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5. 유봉, 경계에 서다. 


경계는 이쪽으로도 갈수 있고 저쪽으로도 갈 수 있는 특이점이자 한쪽 방향의 가치가 서려 있는 독사(doxa)가 아닌 아이러니하고 모순된 길이 양쪽으로 열려있는 패러독사(paradoxa)한 곳이다.  경계에 서서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새시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노마드의 사명이다.    


1) 도덕과 사랑의 경계

그는 극단에서 자신의 스승의 애첩 초월과 연애 사건에 휘말린다.  남의 여자는 넘보지 않는다는 도덕 담론에 대한 반항이자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그 탈주의 결과로 그는 극단에서 파문당한다. 그의 고행의 시발점이다.      

2) 가족과 남남과의 경계

유봉은 부모를 잃고 오갈 곳이 없는 송화를 수양딸 겸 제자로 삼아 기르고 가르친다. 또한 과부이자 동호 엄마인 금산댁과 살림을 차렸으나 출산중 그녀가 사망함에 따라 동호를 자신의 양아들 겸 제자로 삼아 기르고 가르친다.

 가족과 남남의 경계를 극복하고 뛰어넘은 참 노마드 정신으로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3) 물질적 부와 정신적 자아실현의 경계

동호가 반항한다. 

“이젠 소리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여. 그깟 소리하면 쌀이 나와 밥이 나와”

그러자 유봉이 소리친다.

“야 이놈이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 하는 줄 아냐? 지소리에 지가 미쳐 득음을 하면 부귀 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좋은 것이 소리여”

유봉은 물질 보다는 정신, 쾌락 보다는 자아실현의 가치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4) 생계와 도덕의 경계

소릿꾼으로 생계를 이어가려면 부잣집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 부잣집 도련님은 송화를 기생 취급하고 술을 따르라 한다. 유봉은 기생취급하는 양반집 도련님에 굴복하지 않는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생계보다는 자존심을 선택한다. 굶어 죽더라도 자존심은 굽히지 않는다. 그 댓가인 천대와 멸시 배고픔은 감당히기에 충분한 추위 같은 것에 불과하다.      

허약해진 송화의 몸보신을 위해  유봉은 닭을 도둑질한다. 생존을 위해 법을 침범한 것이다. 생존 앞에서 법은 그저 뛰어 넘어야 할 담 같은 것일 뿐이다.  결과는 몽둥이 찜질에 마을에서 쫒겨난다.     


6) 정착과 유목의 경계

득음을 위해 유봉은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선택을 한다. 각지를 돌며 판소리 가야금도 배우고 송화를 가르친다. 정착은 게으름과 나태를 야기하고 득음의 경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리와 이름뿐 아니라 무소유로 세상을 떠돌며 수양하고 배우는 것이야 말로 자아실현의 지름길인 법이다.     


7) 포기와 정진의 경계

동호가 떠나 버리자 송화는 식음을 전페하고 판소리도 거부한다. 갈림길에 선 유봉은 득음을 위한 정진의 길을 택하고 한약에 부자를 섞어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그의 성격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믿는 듯 하다. 수단의 정당성을 지키려다 목적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면하고 싶은 고육지책이다. 이또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제도나 법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노마드라서 정당화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8) 한길로의 매진

 아름다움을 완성하여 사회를 초월하고픈 유봉에게 지상의 법제도 헌신짝 만큼이나 불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극심한 가난이나 고통속에 한을 승화하여 소리의 완성만을 추구하는 유봉과 송화에게 있어서 현실의 삶이란 싸구려 자본 만큼이나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9. 맺으며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판소리를 지키려고 몸부림 치는 유봉과 송화 모녀를 통해 물질 보다는 정신을,, 행복추구나 의무이행 보다는 예술의 완성을 삶의 소중함을 그린 영화로 평가 할 수 있다. 현실의 초월하여 신의 경지까지 가로지르려는 유봉의 원대한 포부를 너무나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자아완성을 위해서 무소유, 이름과 자리를 버린 유랑, 한의 축척과 승화, 인간의 절대 고독을  감내해 내는 숭고미를 감동스럽게 잘 표현한 명작으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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