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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패왕 Sep 15. 2022

모비 딕-광기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정열과 광기 사이



모비 딕(MOBY DICK)          

1. 작가- 하먼 멜빌

1956년 제작된 이 영화는 하먼 멜빌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가는 원양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31살에 이 작품을 출간하였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 그가 72살에 사망하기까지 40년 동안 고작 3천 여부가 팔렸을 뿐이었다. 그의 사후 유명 작가 서머셋 몸의 극찬을 시작으로 멜빌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마침내 이소설은 재평가 받게 되었다. 현재는 미국 소설의 고전 중의 고전이자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위대한 명작으로 추앙받는 작품이 되었다.       


2. 줄거리 요약     

 껍질을 벗겨 등불이나 시계의 윤활유로 쓰이는 기름을 채취할 목적으로 향유고래 잡이에 나선 피쿼드호. 이 배는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하얀 고래에 의해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그레고리 팩)이 지휘하는데, 그는 많은 고래를 잡는 등 돈벌이 보다는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자 악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모비딕을 포획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대서양에서부터 케이프타운을 거쳐 인도양 벵갈만을 도는 길고 긴 추격전 끝에 선장과 선원들은 태평양에서 모비딕과 조우하고 3일간의 잠적 끝에 나타난 모비딕과 사투를 벌인다. 결국 거대하고 난폭한 모비딕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3. 이 영화를 보는 다양한 시각

  이 영화는 거대한 고래 모비딕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따라, 또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가능하다는 것은  명작만이 줄수 있는 기쁨이다. 

모비딕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따라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이 6가지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돈벌이 수단 

모비딕은 일반 고래와 마찬가지로 기름을 얻는 수단일뿐 어떤 의미나 상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이는 부선장과 일반 선원이 모비딕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생계유지를 위해 고래잡이에 나선 선원들의 모험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1840년대의 열악한 조건에서 험난한 파도에 돛단배를 띄우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선원들의 헌신과 용감무쌍함을 그려냈다고보는 것이다.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진취적 기상과 용기, 그리고 모험심의 끝은 어디인지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2) 인간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

모비딕은 고래잡이에 나선 많은 선원들을 죽이거나 상해를 가했으면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에이허브 선장도 왼쪽 다리를 잃고 고래뼈로 의족을 하고 있으며 사무엘 엔더호의 부어 선장도 한쪽 팔을 잃고 갈고리를 하고 있다. 모비딕을 이처럼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본다면 이 영화는 모비딕에 의해 심신이 피폐해져 버린 선장의 복수극이자 정의의 심판을 그린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악인이 아닌 자연의 동물이라는 점, 장소가 위험한 바다라는 점, 대응할 무기가 고작 작살이라는 점에서 무모한 복수극이라 비판 받을 소지가 있다.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주관적인 복수의 광기만으로는 정의가 승리하기는 어렵다.

결국 선장과 선원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 선장과 일부 선원은 정의감의 표출이라 하겠지만 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허망한 일인가? 감독은 이를 통해 복수라는 감정의 덧없음을 표현한 셈이다.      


2) 거대 악(惡) 또는 악(惡)의 근원으로 보는 경우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딕이 거대한 악을 숨기고 있는 악의 근원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주장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거짓 가면일 뿐이다. 그 어떤 불가사의도 마찬가지다. 놈은 날 괴롭히고 있어. 내 영혼을 가만두질 않아 그것 역시 가면일 뿐이야. 난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걸 증오하네. 태초이래 인간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사악함으로 인간을 불구로 만들곤 하지.”

이렇게 보는 경우 모비딕을 쫓는 선장의 행위는 단순히 자신의 사적 복수를 위한 행위라는 비난을 피하게 되며 이 영화는 악을 절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장과 선원의 이야기가 된다. 즉 선장 VS 모비딕, 선 VS 악의 대립구도가 성립하고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에이허브 선장은 자신이 던진 작살의 밧줄에 몸이 감겨 모비딕의 몸에 달라 붙어 버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모비딕을 포획하기는커녕 선장과 선원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결국 패배하고야 만다. 근본악을 제거하는데 실패하고야만 것이다. 

 이 악의 근본은 결코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 아니 뿌리 뽑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할는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 도대체가 선, 악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패해야만 했던 셈이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에 헛된 도전을 한 셈이다. 여기에 우리를 자조의 쓴웃음을 짓게 하는 점이 있다.  사소하고 작은 악은 응징하고 정의의 심판을 내릴 수는 있겠지만 근본 악은 뿌리 뽑을 수도, 뿌리 뽑아서도 안된다는 패러독스에 우리는 직면하게 된 것이다. 작가와 감독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닐는지....      

3) 선(善) 내지 신(神)으로 보는 경우

모비딕이 선 내지 신으로 상징된다고 보는 경우, 이 영화는 신의 뜻을 거역하고 이에 반항하는 선장과 선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본다. 

부선장 스타벅은 주장한다. 모비딕을 사적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며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니 당장 중지하라. 하지만 선장과 선원들은 그의 주장을 무시한다.  항상 이성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부선장은 신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자로 묘사된다. 신의 뜻을 몰라보는 인간의 우매함은 인간의 광기에 기인한다고 보는 듯 선장은 광기에 취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이 영화는 불경스런 인간들이 신에 의해 심판을 받는 과정을 은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자연 그 자체로 보는 경우

모비딕을 자연 그 자체로 보는 경우. 이 영화는 자연에 대해 무모한 도전을 일삼는 선장과 선원에 대한 심판으로 읽을 수 있다. 적정한 자연에 대한 이용은 허락하지만 한계를 넘는 자연 파괴행위에 대해서는 용서 할 수 없다는 자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라. 인간은 결코 자연을 초월할 수 없다. 분수를 모르는 무분별한 도전을 멈추어라.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자연에 순응하지 못하고 무모한 자연 파괴를 일삼는 자들의 비극을 다룬 영화로 읽혀 질 것이다.      


5) 근본 진리로 보는 경우

모비딕이 근본 진리로 상징된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민낯을 드러낸 영화로 볼 수 있다. 즉 이성과 욕망, 광기는 진리 탐구 방법의 하나로 인정되고 각각 그들의 한계를 노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진리 탐구 방법인 이성과 욕망, 광기의 한계를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진리에 도달 할수 있는가에 관해서, 이성으로 도달할수 있다는 이성론, 경험으로 도달 할 수 있다는 경험론, 이성과 경험의 합동작전이라는 칸트, 직관이라는 설, 예지 내지 광기라는 설등이 있다.  

영화에서 부선장은 이성적 태도를 한결같이 유지한다. 선장은 모비딕의 위치를 예상하고 쫒는데는 경험과 자료, 추정과 예측을 사용한다. 하지만 모비딕을 기어코 잡아겠다는 면에서는 집착과 광기로 얼룩진다. 즉 이성을 욕망의 노예로서 부린 것이다. 영화에서 이성과 경험, 욕망 광기를 내세워 진리 추구를 하지만 진리 그 자체인 모비딕을 포획하는데는 실패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가진 한계  때문에 인간은 결코 진리 그자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인한 우울한 영화인 셈이다.      


6) 외세의 위협으로 보는 경우

배는 국가, 모비딕은 외세의 위협으로 보는 경우, 이 영화는 지도자의 광기로 파멸하는 국가를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선장은 오로지 “하얀 고래를 찾아라” 명령한다. 눈 쌓인 산처럼 희고 커다란 고래, 모비딕을 찾는자 에게 스페인 금화를 현상금으로 내걸며 모비딕에 대한 분노를 선원들에 설파한다.

“분수구멍이 크고 꼬리는 부러진 삼각돛대 같은 놈, 그놈이 모비딕이다.” 그는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내 다리를 자른 놈, 내 육신과 영혼은 피가 흐르도록 갈기갈기 찢어 놓은 놈 기어이 잡을 것이다. 

이러한 광기어린 선동에 선원들은 선장을 따른다. 이에 반대하는 부선장 스타벅의 주장은 외면해 버린다. 그는 선장을 암살할 결심도 하지만 선원들의지지 없이 단독으로 할 만한 기개는 없어 포기해 버리고 만다. 

결국 선장의 선동에 넘어가 우매한 국민으로 은유되는 선원들은 모비딕과 결사항전을 벌인다. 그들은 선장이 자신몫의 1/10을 주겠다는 말에 더욱 용기백배해 고래에 작살을 던지고 또 던진다. 결과는 파멸이다. 고래는 피쿼드호를 들이 받아 침몰 시켜 버린다. 이스마엘 만이 관을 붙잡고 살아난다.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고 지도자의 광기에 선동당한 나라가 어떻게 파멸하는지 영화는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참 지도자의 자격을 제시하는 영화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4. 기타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     


(1) 이성과 욕망의 갈등

선장 에이허브 VS 부선장 스타벅의 갈등     


(1) 부선장- 스타벅

모비딕에게 자신의 다리를 빼앗기고 심신이 피폐해진 선장은 오로지 복수의 칼날만 간다.  선장이 모비딕이 나타날 지점인 태평양의 비키니군도로 가자고 제안하자 부선장인 스타벅이 이에 반대를 한다. 

 “고래잡이는 복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런 복수심으로 기름을 얼마나 짜낼 수가 있겠습니까?”

 급기야 수천마리 고래떼를 앞에 놓고도 선장은 모비딕을 쫒기 위해 고래잡이를 포기해 버리고 태평양으로 돌진한다. 이에 부선장은 항해사를 모아놓고 대책을 논의한다. 그는 법규집을 읽어주며 선장이 개인적인 일을 할 때 선장의 명령권을 박탈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항해사들은 요지부동이다. 부선장은 선장을 죽이려 총구를 들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부선장은 본분을 지키자는 것이다. 기름을 위해 고래를 잡지 않고 복수를 위해 고래를 잡는 것은 본분에 어긋나며 이 것은 신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존질서와 신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한 모비딕을 만나 혼비백산한 레이첼호 선장이 아들 보트를 함께 찾자고 요청하는데 대해 에이허브 선장이 이를 거절하며 아들의 살인자인 모비딕을 찾겠다고 하자 

부선장은 이를 거절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며 만류하지만 선장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부선장은 이성적 인간을 대표한다.      


(2) 에이허브 선장     

1) 이성적인 면

이성이란 어떤 사건이나 사태를 통해 투명한 사고로 분석, 계획, 예측을 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선장은 40년간의 선원생활을 통해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고래잡이항해일지를 도표로 만든다. 고래의 크기와 색깔 숫자 방향을 표시해 놓는다. 이로써 혈관을 지나는 피처럼 뻔한 고래의 길을 예측해 내고 계획을 세운다. 모비딕은 무리짓지 않고 혼자 다닌다. 이 자료가 정확하고 내 계산이 틀림없다면 지금쯤 놈은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에 있을 것이다. 다음달, 4월 초순엔 벵갈만 지나 태평양 입구에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있어 이처럼 분석 계획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2) 광기

선장은 낮에는 문걸어 잠구고 나오지도 않는다. 달밤에만 나와 갑판을 거니는 괴짜이다. 고래의 아가리 뼈로 만든 하얀 의족에 거구의 몸을 의지한 채 바람이나 짠 내음도 못느끼듯 수평선을 노려 본다. 그는 오로지 하얀 고래를 찾는데 혈안이 된다.. 눈 쌓인 산처럼 희고 커다란 고래, 모비딕을 찾는자 에게 스페인 금화를 현상금으로 내건다. “분수구멍이 크고 꼬리는 부러진 삼각돛대 같은 놈, 그놈이 모비딕이다.” 그는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내 다리를 자른 놈, 내 육신과 영혼은 피가 흐르도록 갈기갈기 찢어 놓은 놈 기어이 잡을 것이다.” 

수백마리의 고래떼를 발견하여 작업중 사무웰 언더호의 부머선장이 모비딕을 희망봉 근처 마다가스카르 근처에서 보았다고 하자 선장은 즉시 모든 고래 사냥을 중단하고 출항을 선언한다. 이에 부선장이 이건 사악한 행위라며 강력 항의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의 광기에대해 정당화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날 미치게 해, 인간에 대한 애정과 갈망을 무시하고 내 몸안에 가득 들어 앉아 날 끊임없이 밀어 부쳐. 감히 꿈도 못꾸던 일을 하라고 밀어 부치지. 신인지, 누구인지 이 에이허브의 팔을 자꾸만 들어 올려. 신의 권능이 없으면 태양이 움직일까? 신이 없었다면 이게 가능할까? 신의 권능으로 우린 세상을 떠돌 수 밖에 없어.저기 마냥 돌아가는 도르래처럼 그게 우리 운명이야. ”

선장은 자신의 광기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의 책임으로 돌려 놓는다. 

아니 광기야 말로 신이 부여해 준 것이기에 광기는 신의 뜻이라는 이론을 펼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행위는 신의 행위, 신의 명령으로 인한 행위로격상 시킨 것이다.       


3) 이성과 광기(욕망)의 관계

플라톤등 이성론자들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을 이기적 생존본능에서 찾는 경험론자들은 그것은 환상일 뿐 이성은 욕망의 노예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영화에서 이성론자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자가 부선장 스타벅이고 경험론자들의 표상이 바로 에이허브 선장인 셈이다. 

에이허브는 자신의 욕망, 즉 모비딕을 기어코 잡고야 말겠다는 목적을 위해 이성을 사용한다. 고래의 좌표를 그리고 예측하였고 그 예측은 4월 태평양 비키니 근처에서 실현되었다. 그는 이성을 욕망의 노예로 사용한 것이다.      


(2) 다문화 존중

온몸에 문신 투성이인 인디언 출신 퀴퀘크는 이스마일과 한방을 쓴 계기로 둘은 친구가 되고 피쿼트호에 오른다. 그는 작살잡이로 활동하는데 항해중 자신의 점괘를 보고 죽음을 예견하고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며 관을 마련한다. 이처럼 영화는 기독교 의식도 중요하지만 퀴퀘크의 의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한다.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아니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 것을 넌지시 제시한 셈이다.      


(3) 다인종 사회의 존중(용광로 VS 샐러드 볼)

선원들은 백인, 흑인, 인디언, 아이 노인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들 사이의 인종 갈등이나 세대 갈등은 영화에서 거의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다인종 사회를 어떻게 융합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용광로론과 샐러드 볼론이 있다. 용광로론은 개성을 죽이고 하나의 가치, 하나의 문화아래 스며들자는 것이고 샐러드론은 각자의 개성과 문화를 유지한 채 전체에 녹아 들자는 것이다. 

각지에서 모인 선원들은 용광로에 들어앉은 것처럼 그들은 잘 화합한다. 이 소설이 남북전쟁시기에 나온 것을 고려하면 이처럼 갈등 없는 인종을 그린 것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것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하나로 통일되고 모두를 녹여 버리는 용광로 보다는 자신들의 고유 특성을 간직한 채 서로 관용으로 융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5. 맺으며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와 모비딕과의 투쟁을 그려낸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최대의 미덕은 어떤 사상의 강요도 없고 독단도 배격한다. 다인종과 다문화의 관용을 강조하여 시대의 선구가 되었다.. 이 작품은 이성 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존중하는 낭만주의적 경향,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한 상징주의의 셰례를 받은 희대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 아울러 삶을 대하는 에이허브 선장의 정열과 열망은 깊은 울림으로 길이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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