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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패왕 Sep 22. 2022

공동경비구역 JSA- 이익은 사실에 앞선다

사실은 이익과 진실 사이에 줄을 타는 존재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 사실은 이익과 진실사이에서 줄을 타는 존재이다.     

2000년 박찬욱 감독에 의해 연출된 이 영화는 작가 박상연의 <DMZ>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줄거리 요약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 인민군 초소에서 두 명의 북한군이 이수혁병장(이병헌)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남북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봉착했지만 가까스로 중립국감시위원회의 진상조사에 합의를 한다. 이에 따라 소피소령(이영애)이 진상조사단장으로 스위스에서 판문점으로 파견된다. 남북 당국과 당사자들의 거짓과 은폐속에서도 소피의 증거에 입각한 수사로 사건은 점차 전모를 드러낸다. 

 DMZ에서 작전 수행중 수혁은 용변을 보러 숲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를 모르고 소대원들은 전원 철수해 버린다. 홀로 헤매던 수혁은 지뢰를 밟고 송장처럼 서 있는데 북한군 오경필(송강호)과 정우진(신하균)이 수혁을 발견한다. 예상과 달리 그들은 수혁을 살해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지뢰를 해체해 수혁의 목숨을 살려준다. 셋은 돌아오지 않은 다리 사이를 두고 남북의 초소에서 각각 근무하고 있었는데, 수혁은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점차 과감해진 수혁이 급기야 직분을 망각하고 북의 초소로 놀러 간다. 셋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우정을 쌓는다. 수혁은 같이 근무하던 남성식 일병(김태우)도 합류시키고 넷은 시간만 나면 북의 초소에서 어울린다. 나라의 주적도 이데올로기도 그들은 괘념치 않은 듯 했다. 위험속의 우정 놀이에 도취한 듯했다. 수혁의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 생일선물 주고 받고 흥겨워하던 그들의 모임은 북한군 장교 최상위(김명수)에게 들키고야 만다.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군 최상위와 정우진이 사망한다. 다행히 경필의 배려하에 수혁과 성식은 무사히 남의 초소로 돌아온다. 

한편 소피소령이 수사에 고군분투하는 데 그녀의 진실 추구에 탐탁치 않아 했던 중립국 감시위원장이 그녀를 해촉 해버린다.. 국군의 표장군이 소피의 아버지가 6.25당시 인민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핑계삼아 중립성을 걸고 넘어지자 이에 굴복해 버린 것이다. 스위스로 돌아가려 짐을 꾸리던 소피는 마지막으로 수혁을 불러 거래를 한다. 진실을 말해 주면 불리한 진술서는 제출하지 않겠다며. 그녀의 제의에 응답한 수혁은 마지막 진술을 하고 둘은 이별을 한다. 헌병에 의해 병원으로 호송중이던 수혁은 헌병의 권총을 빼앗고 자살해 버린다..      

      

2. 이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영화는 판문점 총격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쫒는 소피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어떤 이는 직분을 망각하고 철없는 우정 놀음을 벌인 남북의 병사들의 최후를 그린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적들 간에 우정은 가능한가를 묻는 영화로 우정과 이데올로기 어느 것이 우선인가를 묻는 영화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남북간의 우정과 사랑을 가로막는 남북 분단의 비극을 그림으로써 남북통일의 소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영화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울러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진실은 관심 없고 국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사실을 왜곡시키는 국가권력의 비호하에 이적행위를 하고 친구를 죽였지만 영웅이 되는 아이러니를 그린 영화 영화로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도 모두 의미가 있지만 필자는 이 영화는 총격사전 관하여 관련 당사자가 이를 읽고 해석하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과연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중립적으로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로 보고자 한다. 

이하에서 영화의 내용보다는 이점에 중점을 두고 감상해 보기로 한다.     


3.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1)긍정하는 입장

1) 데카르트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의 물음은 다시 주관과 객관은 전혀 다른 실체인가의 물음으로 바꿀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 육체(물질)은 연장있는 실체라고 보아 정신과 물질, 즉 주관과 객관은 서로 독립되어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자연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근본 토대를 만들어 주는 이론적 근거가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은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뉴턴 아인슈타인등의 고전물리학자들은 주관과 객관의 철저한 분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2) 실증주의-랑케 

랑케는 인간의 역사적 사실 역시 자연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하며. 이러한 사실을 수집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주관적 해석이나 상상력에 의해 사실의 객관성이 주관화되는 입장을 거부한다. 요약하면 사실은 우리의 주관과는 별개로 독립하여 존재하며 인간은 사실을 중립적 객관적으로 이를 탐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논리실증주의- 비트겐슈타인

세계와 언어의 동형성을 주장하는 그림이론을 전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실에 대응하는 복합명제의 진위를 검증함으로써 세계의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사실의 객관성 중립성을 전제한 것이다. 


(2). 부정하는 입장- 사실은 주관적으로 존재한다.     

1) 현상학 – 객관적 진리에서 주관적 의미로

  훗설은 인간의 인식은 원래 제한 된 것이기 때문에 고전물리학의 주장처럼 객관세계를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후설은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나 의식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즉 진리란 객관물이 아니라 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돌멩이 자체를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돌멩이에 맞고 나서 아프다는 경험은 절대적으로 타당하게 기술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세계를 어떻게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세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기술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진리는 알 수 없지만 주관적 의미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객관은 주관과 분리 될 수 없으며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는 뚯이다.  

훗설의 이런 주관적 의미작용의 근거는 바로 의식의 지향성에 있다. 의식이 지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물끄러미 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는 사유작용이다. 의식은 대상을 지향할 때 마다 이미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는 훗설의 이러한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즉 객관은 주관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2) 양자역학

1)이중슬릿실험

전자 또는 아원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이다. 즉 전자는 관찰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나타나고 관찰하는 주관이 없는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이 있고 없고는 주관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일 뿐 실제로 무엇이 있다 없다를 객관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동일한 존재나 사건도 마음의 작용으로 다르게 인식한다. 이는 객관(전자 또는 아원자)은 주관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관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2) 양자 중첩

양자중첩은 여러 상태(입자, 파동, 양, 음)가 확률적으로 하나의 양자에 동시에 존재(입자와 파동, 양과 음이 동시 존재)하며, 측정하기 전까지는 양자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둘 이상의 양자 상태가 합쳐진 상태로, 측정하기 전까지는 측정에 의한 여러 결과 상태가 이미 확률적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삶과 죽음의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으로 비유되는 원자 이하의 양자 세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며, 양자는 여러 가지 상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측정하기 전까지는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또한 중첩된 양자는 관측하는 순간 중첩 상태가 붕괴하기 때문에 하나의 상태로 귀결된다. 이처럼 관측으로 중첩상태가 붕괴되어 하나의 상태로(입자면 입자, 파동이면 파동의 단 하나의 상태)정리된다. 즉 객관은 주관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주관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이다.      


3)니체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이 말은 고정된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근대 인식론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절대적 '사실'이 아닌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보편적 진리를 부인하고 개별적 주관적 진리를 인정하는 실존주의 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실이다.      


(3) 상호주관성

만약 사실의 객관성이 부인되고 각자 개인의 주관성만 인정된다면 학문이나 과학은 붕괴 될 것이다. 객관성을 확보해야할 필요성이 여기 있다. 그리하여 제기된 문제가 상호주관성이다. 

인간 사실의 객관성은 자연과학적 객관성과는 구분해야 한다. 주관성에 의존하면서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모순인가? 전통적인 주관-객관 이분법적 도식에 서면 분명 모순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를 지라도 상호 소통적 이해와 보편적 해석은 가능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상호 이해를 통해 공통적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상호주관성이란 주관적 자아이면서도 공통된 경험, 공동된 생활 의식, 공통가치에 구속되는 다수가 합의하는 주관성을 의미한다. 이는 역사학자 EH카와 하버마스등이 취하는 입장이다

   

   

4. 이 영화는 사실(fact)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사실의 객관성, 조사 관찰의 중립성 여부에 대해 이 영화에서 소피의 입장과 남북당국자와 사건 당사자의 입장이 갈린다. 두 입장을 살펴보고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어떤 입장에서 사건을 전개시키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소피 장소령(이영애)의 입장

 스위스에서 수사책임을 부여받고 판문점에 온 소피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장의 당부, (범인 잡혔으니 동기만 밝힐 것, 남북한 자극하지 말 것)에도 불구하고 의욕을 갖고 수사에 나선다. 

그녀는 진술서와 남북당국의 사실에 대한 견해에 구애받지 않고 남북을 오가며 증거에 입각한 수사를 진행한다. 이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누구의 유불리를 떠나 진실은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에 기인한 것이다. 그녀가 진실에 접근해 들어가자 표장군이 그녀의 자격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6.25당시 인민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들어 그녀의 중립성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수사책임자에서 해촉되지만 진실에의 열망은 거두지 않는다. 스위스로 떠나기 직전 그녀는 이 수혁 병장과 거래에 나선다. 

“나에겐 두 개의 디스켓, 즉 두 개의 수사보고서가 있다. 내가 이중 뭘 제출하느냐는 이병장 에 달렸다. 진실을 말해주면 난 후임자에게 어떠한 증거나 추리로 제공치 않겠다”

결국 이수혁은 오경필의 안전을 보호해 주겠다는 확약을 받고 현장상황을 이야기 해준다. 


 장소령의 이러한 입장은 사실의 문제에 대해 전통철학적 입장, 실증주의 입장을 대변한 것처럼 보인다. 즉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며 우리는 주관의 개입 없이 이를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이에 중립적으로 수사하면 순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 듯 하다.      


(2). 사건 당사자의 입장-  이익은 진실에 앞선다.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 초소에서 발생한 인민군 2명 살해사건이라는 사실을 두고 남북 당국, 당사자, 수사를 맡은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선다.     


<1> 남북 당국의 입장

 1)남한입장

남한측 표장군(기주봉)은 이 사건을 “DMZ에서 용변을 보던 이 수혁을 북한군이 자신들의 초소로 납치해 갔지만 이 병장이 기지와 용기로서 빨갱이 2명을 살상하고 돌아온 것이 팩트”라며 이수혁은 국군의 영웅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표장군은 수사담당 소피 소령(이 영애)에게 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조사는 인정할 수없다는 요지로 노골적으로 압박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빨갱이와 빨갱이들의 적이다. 중립이 설 자리는 없다” 

이는 어떤 사실도 빨갱이에게 이익되느냐 빨갱이의 적에게 이익되느냐 두가지중에 하나에만 봉사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유가 어떻든 빨갱이를 죽인 것은 영웅적 행위이며 객관적이라든지 중립적이라는 태도는 존재할 수도 옳지도 못하다는 의미이다. 


2) 북한입장

이에 반해 북한측 장군은 “남의 괴뢰 이수혁이  북한초소에 침입하여 인민군 두 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 이라며 소피소령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이를 위반하는 수사 결과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으름장에 다름없다.      

이처럼 이수혁병장이 북 초소에 있던 사실을 두고 남은 납치로, 북은 침입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규정한 것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남북은 진실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국익에 우선하는 입장을 노골적 으로 드러낸 셈이다.      


<2> 사건 당사자인 수혁과 경필의 입장

남의 수혁과 북의 경필 역시 고위 당국자가 요구하는대로 위와 같이 진술서를 작성한다. 이에 덧붙여 진실 보다는 자신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왜곡한다. 

경필은 최상위(김명수)와 정우진(신하균)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넋이 빠져 버린 신일병(김태우)의 총을 빼앗고 자신이 직접 아직 살아있는 정우진에 한발 쏘고는 총 닦고 돌려 주며 말한다. “잘 들어. 넌 여기 없었어. 그리고 수혁인 납치 되었다 탈출했다고 그래”

경필의 요청대로 신일병은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한다. 또한 이수혁은 자신이 정우진에 최후의 한발을 쏘았으면서도 신일병의 행위로 진술한다. 사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요리한 것이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을 왜곡하지만 수혁과 경필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남의 수혁은 북의 경필을 위해, 북의 경필은 남의 수혁을 위해 사실을 적극 왜곡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3> 중립국감독위원회 장

 수사책임자로 부임해 온 소피에게 중감위 소장은 “범인은 잡혔고 자백도 했으므로 우리는 동기만 밝히면 된다. 결과보다는 절차가 중요하다. 지금 남북 관계는 건조한 마른 숲과 같다. 불씨 하나에도 몽땅 타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완벽한 중립을 지켜라. 남북을 자극치 말아라”

고 지시한다. 즉 자그마한 실수도 남북 간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실체적 진실에 집착하지 말고 양측 입장을 적당히 반영하는 수준에서 끝내라는 것이다. 정확한 진실이 규명되어 한쪽의 잘못으로 인정되면 이를 빌미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상유지와 평화를 원하는 입장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오히려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영화 말미에 한국군의 표장군의 항의를 받고 소피를 수사단장에서 배제하면서 

“자넨 남일병을 자살로 몰았어. 역시 자넨 판문점을 잘 몰라. 판문점은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 되는 곳이지. 각자의 주장이 끝나면 사건도 흐지부지 되고 말아.”

그것이 남북 당국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역시 진실보다는 전쟁 방지 현상유지가 좋다는 의미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아무 필요없다는 입장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오로지 상황과 이익에 맞게 재단되는 것일 뿐이라는 사고로 보인다.     

4)이러한 남북한의 입장, 수혁과 경필의 행위, 중감위장의 입장을 살펴보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 라는 니체와 훗설 양자역학의 입장에 선듯하다. . 훗설의 말처럼 그들에게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나에 의해 해석된 사실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이란 것은 당사자들이 사실을 의식으로 지향할 때 마다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의미만을 창출해 낼뿐이다.  이를 양자역학적으로 해석하면 중첩되어 있던 입자와 파동이 당사자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이 당사자의 입맛에 맞는 사실로 가공된 것으로 간주된다. 즉 사실이라는 것은 있는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대로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나 전통이성론자들은 진실은 존재하는데 당사자들이 왜곡한 것일뿐이므로  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변함없다고 항변할 것이다. 즉 당사자의 왜곡과 이기심이 문제이지 사실의 중립성과 객관성은 여전히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진실은 이익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사실은 왜곡의 위험이 없지만, 이익에 반하는 진실은 당사자 모두 적극 은폐하고 왜곡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3). 이 영화의 카메라 시점- 감독의 입장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감독은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이 영화는 객관적 시점인가? 주관적 시점인가? 이것이 감독이 사실에 대한 어떤 견해를가지고 있는지 판별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있다.. 영화의 카메라가 객관적 시점을 택했다면 이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랑케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주관적 시점을 택했다면 이는 사실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주관적 견해를 취한 훗설 니체 양자역학의 입장에 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중립국 감시위원회 소속 조사단장인 장 소피(이 영애)의 수사상황을 축으로 전개된다. 카메라도 그녀를 따라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즉 카메라는 이영애가 만난 참고인이나 피의자의 진술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런 전개방식은 수사상황에서는 중립적인 듯하나 사건의 진행에서는 관계자들의 진술에 의존하는 주관적 시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소피의 말에서 감독의 의도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중사 증언중 이수혁 병장과 다른 것이 있어요. 정우진이 남일병아닌 이병장 총에 죽었다는 거예요. 워낙 순식간이라 이 병장이 잘못 기억한 모양이죠. 아니면 오중사가 틀렸거나요 1초 먼저 쏘고 나중 쏘고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사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개인의 독단이 아닌 상호주관성으로 그 객관성을 확보해야한다는 것을 넌지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감독은 사실에 있어서 객관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상호주관성을 인정하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5. 맺으며     

당연히 이 영화의 주된 의도는 남북 병사의 훈훈한 우정을 갈라놓는 분단 조국의 현실을 그림으로써 남북 통일의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에 오염없는 착하고 선한 병사들과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밥줄인 고위층을 대비하여 대다수 국민들의 희망을 외면하고 남북 집권자들의 야욕이 분단의 원흉임을 보여 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이런 이야기 구조에 사실의 객관성 여부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화의 품격을 한층 높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칸 감독상을 수상한 한국이 낳은 천재감독 박찬욱 초기작품 답다는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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