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 영화는 1958년,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 존 스터지스 감독 작품인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참전용사이자 종군기자 그리고 소설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저자다. 그의 작품에는 실존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앙가즈망(참여주의)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20세기에는 헤밍웨이와 포크너가 꼽힌다.
쿠바의 어느 어촌. 80이 넘은 산티아고(스펜서 트레이시 )는 조각배 낚시로 삶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유일한 친구라고는 마놀린이라는 어린 소년 뿐이다.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던 그 노인은 85일째에 홀로 바다에 나가 청새치를 낚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워낙 대어였기에 노인은 조각배와 함께 3일 동안 끌려다닌다. 그는 허기지고 피곤하고 손에 피가나는등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결코 낚시줄을 놓지 않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노인은 결국 스스로 지쳐서 뛰어 오르는 청새치의 심장을 찔러 죽이는데 성공한다. 청새치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코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또 다른 상어떼 공격으로 뼈만 남은 청새치와 함께 노인은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파멸 될 수는 있어도 패배 할 수는 없어. 라고 되뇌이며.
이 영화는 각각의 관점에 따라, 어느 쿠바 노인의 특별한 고기 낚시를 그린 해양 모험 영화라거나, 인간의 절대 고독을 그린 영화로 읽거나, 가난한 노인의 삶의 고통을 이야기한 영화라거나, 대어를 잡았으나 살점은 모두 빼앗겨 버리고 뼈만 가지고 돌아 왔다는 점에 주목하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의 허무를 그린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견해들도 소중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노인이 처한 상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에 중점을 두어, 이 영화는 실존주의 사상을 저변에 깔고서 삶의 고통, 불안, 허무, 무의미를 이겨내고 자신의 자아의 지평을 넓힌 위버맨쉬(초인)의 경지에 오른 어느 노인 어부의 이야기로 읽으려 한다.
1)“실존은 본질에 앞 선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이 명제에 실존주의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사물과는 달리 본질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주장은 오랜 세기 유럽을 지배해 왔던 사조인, 인간의 본질이 있으며 그 본질은 이성이므로 인간은 이성의 지시대로 살아야 한다는 기존의 이성론적, 합리주의 세계관을 거부한다.
2) 실존(exist)은 존재(be)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추상적 보편적 인간을 전제하는 전통 이성 철학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존재를 다루지만, 이를 부인하는 실존주의에서 “지금 여기에..”있는 존재, 즉 현실적 개별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한다. 기존 이성론이 다룬 인간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모두 동일하지만(보편성, 보편도덕) 실존주의하의 개별적 구체적 인간은 각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다.(개별성, 상황윤리) 기존 이성론은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도덕률을 주장하지만 실존주의는 각 개인이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도덕률도 개별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개별적 구체적으로 있는,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실존(exist)이라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신 앞에 선 단독자”라 표현한다.
3) 인간은 그 자체가 자유이다.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면 그 본질에 구속되기에 자유는 없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부인하기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갖는다. 당연 이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선천적인 본질은 없으나 인간은 후천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나간다. 그 수단이 바로 양심적 결단의 자유인 것이다.
인간이 자유가 있다는 실존주의 주장은 구조주의나 결정론과는 배치된다. 초기 구조주의는 인간을 “구조속에 갇힌 수인”이라 주장하며, 인간이 구조를 뛰어넘을 자유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4) 위버맨쉬(초인- 니체의 초인사상)
세상은 의지와 욕망이 서로 대립 투쟁하는 곳(쇼팬하우어) 권력의지(니체)가 범람하는 곳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노예도덕(가난한 사람이 복받고 천국간다)을 버리고 주인 도덕(강하고 아름다운 것이 선이다.)을 가꾸고 지켜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현실을 긍정하고 강하고 아름답게 살아라(니체).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라, 반항하라(까뮈)라고 주장한다. 즉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고 부조리한 상황을 돌파하면 그것이 위버맨쉬라는 것이다.
5) 평가
추상적 보편인간의 존재를 전제로 이성적 질서와 윤리도덕을 강조하여 세운 나라가 오늘날의 유럽제국이다. 이성중심주의, 서양 백인 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구축하는데 그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성론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식을 근거로 실존주의는 기존 주류철학과 과감히 결별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권위에 맞서 지식인의 참여를 독려하며 현실세계의 불의와 불법에 적극 저항하는 실천적 지식인상을 정립한 것도 지울 수 없는 공적이다. .
노인이 마주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1) 영겁회귀의 세상
노인은 84일 동안 바다에서 어떤 고기도 잡지 못했다. 그는 84일 동안 매일 매일 다른 듯 동일한 일을 반복했다, 동일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동일한 일들이 무의미하게 반복한다. 조각배를 출항시키고, 정어리 미끼를 끼고, 낚시줄을 바다에 내리고, 들어 올리고, 태양도 뜨고 지고, 바다도 , 바람도.. 매일 매일 변화하면서도 동일한 것이 반복된다. 이것이 니체의 “영겁회귀”이다. 즉 노인이 마주한 세상은 이성론자들이 주장하는 영원 불변의 세상이 아니다.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며 동일한 반복이 거듭되는 세계에 노인은 던져진 것이다.
2) 비합리적 부조리한 세계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은 “85는 행운이 깃든 숫자야”라고 자위한다. 불행중 최악의 상태라는 “살라도”에 빠져 버린 그 노인은 그 이유를 ‘운이 없는 탓’이라 주장한다. 그는 습관적으로 “오늘은 운이 따를지 몰라” 라고 되뇌인다.
운이란 주사위 놀이처럼 필연성이 없는 자의적 즉자적인 것이다. 인과 필연적 기계적인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모든 것은 신의 뜻도 자연의 이치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저 세계와 인간의 존재는 그저 우연한 사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노인에게 있어서 바다는 이해할 듯 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노인은 바다가 여인 같이 항상 미덕을 베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어부는 바다를 경쟁자 또는 심지어 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알베를 까뮈는 부조리한 세상이라 한다.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부조리한 상태인 것이다.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노인의 바다 이해에 들어 맞는 해석이다.
이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이라며 모든 것은 “이성의 간계”라는 헤겔의 합리주의 세계와는 구별된다. 헤겔의 세계는 필연적인 세계이고 모든 것은 이성 자체인 신의 뜻인 세계이다. 이처럼 노인은 뉴턴이나 라플라스,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결정론적 예측가능한, 인과관계가 결정된 세상, 즉 합리적인 세상이 아닌 비합리적인 세상, 부조리한 세상, 훗설이 주장하는 현상학적 생활세계와 마주한 것이다.
3) 의지(본능, 욕망) 세계, 권력의지가 충만한 세계
노인은 동료 어부와 경쟁하며 태양, 바람, 바다, 물고기와 때론 협력하고 때론 사투를 벌인다. 이것들은 삶을 보전하는 수단이자 생명을 앗아가는 흉기가 될 수 있다. 바다는 그 어느 곳보다 생존 본능, 삶의 의지, 그리고 욕망이 원초적으로 발산 되는 곳이다. 거기서 욕망과 욕망이 경쟁 투쟁하고 삶의 의지, 생존 본능이 무한대로 발산한다. 즉 쇼팬하우어의 의지가 충돌하는 세상이자 니체의 권력의지가 충만하여 대립 갈등하는 세상이 바로 노인이 마주한 세상이다. 한마디로 노인이 마주한 세계는 이성적 질서가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노인이 40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자 소년은 자신의 부모의 명령에 따라 딴 배로 가버린다. 출항 할 때는 많은 어부들이 동시에 나가지만 조업지에서는 각자가 홀로다.
소년과 있을 때는 혼잣말을 하지 않지만 소년이 없는 지금 그는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한다. 바다에서 쓸데 없는 말을 안하는게 미덕이라 여겨왔고 이를 지켜 왔으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고 누군가 미쳤다고 생각할 테지만 미친 것이 아니니 상관 안한다.
이처럼 노인은 단독자로서 세상을 마주한다. 소년과 다른 어부와 노인이 마주치는 상황이 모두 다른 것이다. 모두가 개별적 주체적 현실적 존재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소년과 어부와 노인은 각자 나름의 원칙과 행동원리가 있을 뿐이다. 도덕률도 진리도 개별적 상대적으로 판별해야만 하는 것이다.
1) 실존적 인간형의 노인
노인은 84일간이나 고기를 잡지 못해도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동료들이 비난해도 흥분하거나 화도 내지 않는다. 무척 가난해도 재물에 대한 욕심도 없다. 즉 그는 이성적 인간도 이기적 인간도 아니다. 괴팍한 욕망의 소유자도 아니다. 85일은 운수가 있을 거야.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는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다. 그저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노인은 전통적 인간형을 거부하고 그저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고 성실할 뿐이다. 실존적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2
) 위버맨쉬(니체의 초인사상)
노인은 자신의 예견대로 85일째 운수가 대통한 것인지 낚시에 성공한다. 나머지 3개의 낚시줄을 끊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거대한 청새치가 잡힌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1인치도 끌어 올리지 못하고 북서방향으로 끌려간다. 아가미가 꿰인 청새치는 괴력으로 3일 밤낮을 끌고 다닌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육지가 보이지 않아도 노인은 두려워 하지 않고 하바나에서 나오는 빛으로 언제든 찾아 갈 수 있다는 낙천적 태도를 견지한다. 노인은 손바닥이 피로 점철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피곤하여 곧 쓰러질 지경이다. 낚시줄을 놓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낚시줄을 잡고 잔다. 고통스러울 때 마다 노인은 자신을 다독인다.
“아무리 힘이 쎄도 영원히 끌지는 못해.” “해가 뜨면 될거야 뭐든 하겠다.” “이따위 놈에게 질 수 없어.” “의미없는 일 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
노인은 아픔을 무릎쓰고 남은 힘과 이미 무너진 자존심을 지키려 애를 쓴다.
그는 결국 뛰어 오르는 청새치의 심장에 작살을 명중시킨다. 이로써 끌려가던 형세를 끌고 가는 국면으로 전환 시킨다. 노인은 초인적인 인내와 의지로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상황을 이겨낸다. 이것이야 말로 위버맨쉬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3) 파멸 될 수는 있어도 패배 할 수는 없어.
청새치를 배에 매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코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키와 칼을 들고 결사 항전하여 결국 그놈을 물리친다. 하지만 잠시 후 마코상어가 물어 뜯은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고 이번에는 상어가 떼로 몰려온다. 그는 되뇌인다.
“파멸 될 수는 있어도 패배 할 수는 없어.”
노인은 결사 저항해 보지만 청새치는 뼈만 남는다. 노인은 거대한 뼈 덩어리를 싣고 항구로 귀환한다. 그의 중얼거림처럼 자신의 육체가 썩어 파멸 될수는 있어도 노인은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결과물은 없지만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노인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 강하고 아름다운 초인, 위버맨쉬인 것이다.
4) 노인, 사자, 소년
이 영화에는 노인의 유일한 친구로 마놀린이라는 소년이 나온다. 마놀린은 노인을 사랑하고 극진히 챙긴다. 테라스에서 술도 사주고 밥도 챙겨 준다. 출어할 때 정어리 미끼도 구해 준다. 왜 하필 손자뻘도 안되는 소년이 친구일까?
또 노인은 사자 꿈을 꾼다. 청새치에 끌려 다니면서도 사자 꿈을 꾼다. 그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사자일까?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낙타, 사자, 소년의 3단계 이야기가 나온다. 낙타의 단계는 그저 복종하고 순응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사자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때로는 반항하기 시작한다. 사자는 이유 없는 강요, 강압에 맞서 부정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반항만 할 줄 알 뿐이어서 그것에 고통과 허무만을 느끼지, 그것을 긍정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마지막 아이의 단계 이르면 삶을 놀이로 파악하고 그것을 즐기게 된다. 끊임없는 놀이를 통해 질리지 않고 긍정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여기서 아이의 단계가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된다.
헤밍웨이는 사자와 소년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소설이 니체의 철학에 의지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즉 낙타 단계의 노인이 사자 단계를 거쳐 소년 단계의 위버맨쉬가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헤밍웨이와 감독의 의도 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한 노인의 조각배 낚시를 통해 고통과 허무를 이겨내고 자신을 위버맨쉬(초인) 의 경지까지 이끌어 올리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함께 또 하나의 실존주의 사상을 드러낸 명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노인과 바다가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으로 인정 받는 것과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한시대를 풍미했으나 실존주의의 한계가( 주체의 자유문제, 지나친 상대주의등) 명백해진 지금 헤밍웨이가 다시 부활한다면 실존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