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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패왕 Sep 03. 2022

태극기 휘날리며- 가족이 먼저다

가족이 먼저다 VS 사람이 먼저다

태극기 휘날리며

가족이 먼저다 VS 사람이 먼저다

상황앞에 장사 없다 VS 상황은 핑계의 다른 말이다. 

상황이 먼저다 VS 한결이 먼저다.      


1.이 영화를 보는 시각


1) 이 영화를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일단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린 사람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파시스트 국가의 위험성에 관한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충성했으나 국가권력의 약속파기와 배신에 의해 가족이 총살당하고 파멸하는 가족이야기라 평가하는 경우 이에 해당할 것이다. 세 번째로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여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반전영화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광기의 사회에서 탈주하려는 형제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읽으려 한다.   

2)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라는 광기로 뒤덮인 전쟁터에서 가족 또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형제의 지옥 탈주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형은 가족주의라는 무기를 들고, 동생은 보편적 이성이라는 무기를 쥐고 지옥 탈주에 나선다.      

3) 이 영화가 전쟁에 의해 파괴되는 한 가족을 그리고, 국가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추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점차 악마화 되어가는 인간성을 고발함으로써 반전사상에 기여한 것도 나름 의미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미덕은 소시민적 가족주의를 극단으로 끌고 간다는 점이다.  6.25라는 이데올로기 전쟁 상황에서 국가나 민족등의 거대 담론을 배격하면서 말이다. 탈주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형제는 방법론에 있어서 가족이 먼저냐? VS 사람이 먼저냐? 달리 말하면, 상황이 먼저냐? VS 보편이 먼저냐로 갈등하고 대립한다. 이러한 형제간의 철학적인 갈등은 이 영화를 재미만 추구하는 단순 오락영화로 치부되는 것을 거부한다. 재미와 예술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라는 평가에 옹색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2. 타 영화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1) 이 영화는 전쟁을 소재로 한다. 

 보통 전쟁을 소재로 삼는 영화는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고취하거나 (명량, 한산등) 또는 이데올로기 대립을 그리거나 (태백산맥) 아니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함으로써 반전주의의 입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남부군/ 디어헌터/ 플래툰)에 서는 영화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와는 결이 다른 영화이다. 애국심을 강조하거나 국가 민족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데올로기 대립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반전메시지가 분명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도 가족주의 또는 가족 이기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구분된다. 


2) 이 영화는 형제의 우애와 갈등을 축으로 전개된다. 

형제간의 갈등을 다룬 영화는 보통 여자나 재산을 두고 형제간의 욕망을 다투는 (가을의 전설) 것이나, 부모의 전통 질서 강요에 대해 순종이냐 반항이냐(에덴의 동쪽)를 다루는 것이나, 형제간의 사상대립(태백산맥)을 다루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쟁의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자세를 취할 것인가? 즉, 상황윤리가 타당한가가? 아니면 전쟁상황에도 반드시 지켜야할 보편윤리가 있으며 이를 지켜야 할것인가? 두고 극심한 가치관의 갈등을 보여준다.  상황론자(실존주의)대 보편론자(칸트의 의무론자)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며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기본 축이다. 이는  다소 저급한 욕망의 갈등이 아닌 윤리적 철학적 갈등으로서 이 영화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3) 이 영화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동생을 군대서 제대시키려고 고군분투한다는 점에서 역시 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적진에 투입되는 군인들 이야기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구하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는 가문을 이을 유일한 남자인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다수의 군인이 희생을 감수하는 영화이다. 이는 공리주의를 맹신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수를 죽여 한사람을 구한다니!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럼으로써 가정의 수호라는 국가의 의무를 지켜낸 미국정부. 이처럼 이영화는 공리주의 VS 의무주의의 대립에서 피어난 감동적인 명작이다.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공리주의나 국가의 의무와는 관계없고 가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는 점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차이가 있다.     


4) 형제는 이기기 위해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탈출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거대 명분도, 계급을 위한다는 이념도 없기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둘은 적군과의 전쟁이 아니라 전쟁과 전쟁을 한다는 점, 전쟁에서 탈주하기 위해 전쟁한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고도 역설적인 영화이다.      


3.형식적인 특성

 전쟁 블록버스터로 제작한 이 영화는 두 가지의 형식적 특성을 지닌다.

 먼저, 노년의 진석이 6.25전쟁을 회고하는 액자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즉 진석의 주관식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이러한 시점은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 하지않았던간에 세계는 객관적 으로 존재하며 절대 진리가 존재하는 세상이라기보다는 상호주관 진리가 있을 뿐인 주관적 세계라는 가치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장소이동으로 인한 공간의 변화가 두드러 진다, 이는 후퇴(서울에서 낙동강 전선), 전진(평양 혜산진)과 후퇴(파주 서울), 전진(두밀령 전투), 후퇴(서울)를 반복하며 제자리로 회귀한다. 이러한 전개는 어쩌면 우리의 삶은 발전과 후퇴를 반복하며 때로는 제자리 걸음 뿐이라는 은유로 볼 수 있다.      


4. 이 영화에 나타난 사회의 구조

 진태와 진석이 마주한 전쟁터는 이성은 사라지고 고통과 증오 광기만 번득인다. 대전차 지뢰매설에 나섰던 중학생 학도병 승철(엄성모)는 부상을 당하고 몸에서 구더기가 끓자 막사안에 있던 다른 부상병에 총기를 난사하고 자신의 턱에 총구를 대고 자살해버린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정면충돌하면서 무차별 살상이 각지에서 벌어지지만 이는 이데올로기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념이 먼저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광기의 소굴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권력이 되어 민초를 억압한다. 반공청년단은 인민군에 티끌만큼이라도 협력했던 자들을 색출해 집단 총살 암매장해 버린다. 이처럼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권력으로 구조화 된 곳에서 진태와 진석은 자유와 행복을 찾기 위해 몸부림 친다. 그들은 어떤 무기로 무장하여 이 광기 덮인 사회를 탈출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진정한 자유인, 노마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의 메인 테마라 할 수 있다. 진태가 잡은 무기는 가족주의 이고 진석이 부여안은 무기는 보편적 이성이라 할 수 있다.   

   

5.  국가의 모습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 가던 중  18살 중학생인 진석은 국군에 의해 강제 징집당한다. 이에 격렬히 항의하던 진태도 역시 강제 징집 당한다.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의 의사는 무시되고 자유와 인권은 유린된다. 

  9.28 서울 수복후 이승만 정부의 앞잡이 반공청년단은 인민군과 공산당 조력자들을 색출에 나선다. 반공청년단 단장(김수로)은 진태의 약혼녀 명신(이은주)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체포한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명신은 먹고살기 위해 인민군 간부 집안일을 해주고 쌀 좀 받은 것 뿐이었는데  “인민군 새끼들 한테 아랫도리 돌린 년이 누군데?” “저년 화냥질 한거 동네 사람이 다 알고 있어”하며 끌려가서 총살을 당하고야 만다. 

 이처럼 진태와 진석은 국가 권력에 의해 자신의 가족이 해체되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는 커녕 국민의 생명을 너무 쉽게 살상하는 모습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 영화는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영화속에 나타난 국가는 플라톤, 칸트등의 이상국가, 도덕국가 와는 거리가 멀다. 민주국가나 복지국가의 모습도 아니다. 계급국가나 파쇼국가, 또는 전체주의 국가가 어울린다.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며 특정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민초에게는 가혹한 권력을 행사한다.     


6. 실존적 인간 VS 이성적 인간

이 영화는 국가에 의해 전쟁터에 내던져진 두 형제의 이야기이다, 우애가 깊었던 두 형제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간다. 진태는 상황이 변할 때마다 그에 맞게 변신한다. 이는 상황에 따라 알맞은 결단으로 참 자유와 행복을 찾으려 하는 실존주의적 인간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생 진석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한결같은 원칙과 규범에 맞는 행동을 한다. 고전적이며 이성적인 인간형의 표본이다.      


(1)  세계- 내 – 존재로서의 진태(실존적 인간)

  진태는 자신이 처한 엄중한 실존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받는다.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세계내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진태(장동건)와 진석은 6.26전쟁 속으로 던져진다.(피투성) 선택의 여지는 없다. 피난의 자유(?)는 누릴 수 있기에 그들은 피난을 선택한다. 삼촌댁이 있는 밀양으로 가던 도중 대구에서 국군에 의해 그들은 강제 징집당한다.  국군이 강제 징집한다니? 70 80년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있을 수 없는 영화적 표현이다. 이렇게 둘은 전쟁터로 던져진다. 이러한 기투성을 우리는 운명이라 표현하곤 한다. 

비록 수동적으로 전쟁터에 내던져진 진태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죽음의 선구를 경험한 그는 더욱 치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는 최고의 선을 가족의 행복으로 정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동생을 제대시키거나 후방으로 이송할 목표를 세우고는 진태는 드디어 능동적인 전사로 변신한다.(기투성). 오로지 무공훈장을 받아 동생을 제대시킬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      


(2)보편적 세계 시민으로서의 진석(이성적 인간)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형 진태와는 달리 진석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한다.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전쟁상황이라도 포로에 관한 국제법은 존중되어야 한다며 포로들을 학살하려는 동료들을 제지한다. 가족인 자신만을 구하려는 형의 태도가 못마땅하다. 다른 사람의 생명은 경시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위해 돌진하는 진태가 혐오스럽기만 하다. 특혜를 거부하며 누구도 동등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킨다. 한때 가족처럼 데리고 있었으나 인민군에 끌려온 용석을 빨갱이라 죽이려는 진태와 달리 진석은 용석의 목숨을 살려주는 따스한 휴머니스트이다.      

7. 광기로부터의 부터의 탈주


(1) 동일한 목적

이 광기의 사회에서 탈주해야만 형제는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둘은 안다.  진태는 어머니를 모시고 명신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는 것이고 진석은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둘의 목적은 동일하다.      


(2). 상이한 수단- 형제간의 갈등(상황윤리 VS 의무론적 윤리)

 둘의 목적은 동일하지만 그 탈주를 실행하는 데 있어 둘은 서로 다른 무기를 집어든다.       

1) 진태- 가족이 먼저다. 상황이 먼저다

초기 진태의 행위는 소박한 가족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강제 징집된 진태는 상관들에게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으며, 심장병을 앓고 있는 동생 진석의 제대를 시켜 주거나 후방 병원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대대장은 멀쩡한 놈이 하루아침에 병신되고 비실비실 다 죽어가는 놈이 멀쩡해 지는 곳이 전쟁터라며 거절하면서 넌지시 옆 연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강제징집 되었는데 아버지가 무공훈장을 받아 아들을 전역시켜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날 이후 진태는 무공훈장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때론 무리수를 두고 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진태는 대전차 지뢰매설 작전을 자원해나가는등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한다. 그 무슨 국가를 위하거나 공산주의를 척결한다는 거대한 명분은 그에게 없다. 단지 무공훈장을 받아 동생을 살리기 위해 고군 분투할 뿐이다. 식량은 다떨어져 가고 인민군의 기세에 극단에 몰리자 진태는 이판사판이라며 오히려 기습하자고 주장을 한다. 이에 상당수가 동조하고 진태는 선두에 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작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진태는 영웅취급을 받으며  중사로 진급하고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다. 결국 그는 평양 진격중 북한군 거물(최민식)을 생포함으로써 무공훈장을 받게 된다.      


2) 진석- 사람이 먼저다. 한결이 먼저다. 

 진석은 형의 수단과 무기가 미덥지 않다. 형의 온갖 무리수가 자신을 전역시키기 위해 무공훈장을 받으려는 것임을 알고 그는 형에게 대항한다. 형의 목숨을 담보로 훈장을 받아 자신이집으로 돌아가면 엄마와 영신 누나를 무슨 낯짝으로 보냐며 따진다. 또한 진태가 인민군 총좌(최민식)를 사로잡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감행하는 도중 동료인 영만(공형진)이 사망했다며 그 책임을 지라며 언성을 높인다. 가족과도 같이 지냈는데 인민군에 끌려와 포로가 되어 버린 영석을 놓고도 둘은 치열한 대립을 한다. 가족이외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형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무공훈장을 받게 된 형을 두고도 영만을 죽임으로써 받게 된 것이라며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한다. 빨갱이 물이 든 그를 죽여야 한다는 진태와 그를 보호하려는 진석의 대립이 이어진다. 항상 한결같은 자세로 이성적 태도를 잃지 않는 진석은 보편적 휴머니즘을 무기로 형을 비판한다. 진석은 이성적 인간을 웅변하고 있다. 

진태와 진석처럼 실존주의자와 보편주의자의 대립은 영원한 우리의 과제 일 수 밖에 없다.      

8. 극단적 가족이기주의자의 행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린다. 

1)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던 진태는 점차 변해간다. 착하기만 했던 그가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진 놈은 이틀 동안 밥을 굶기는 등 비인도적인 학대를 즐긴다. 날로 포악해 지고 야만적이 된다. 괴물을 잡으려다 점차 자신도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2) 내 가족을 해친자 에게 자비는 없다. 

반공 청년단으로부터 약혼자 영신을 잃은 진태와 진석은 격분을 하여 그들과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형제는 청년단원들에게 제압당하고 청년단원들의 방첩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되고 북한군 포로들과 함게 창고에 갇히게 된다. 그 와중에도 영신의 죽음을 놓고 진석과 진태는 티격태격한다. 

 신임대대장이 진태를 심문하기 위해 그를 불러내자 진태는 전임 대대장과의 약속이니 자신이 무공훈장을 받았으니 동생을 제대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군대가 무슨 장사치 소굴인지 아느냐며 묵살해 버리며 진태를 다시 창고에 처넣으라 명령한다. 이때 중공군의 공격으로 창고가 폭파되고 진태는 동생의 이름이 적힌 만년필과 그 주위의 백골 시체를 보고 동생이 죽었다고 오해한다. 격분한 진태는 대대장의 머리를 돌머리로 쳐 죽이고 북한군에 사로잡혀 북으로 끌려가고 곧장 귀순해 버린다. 


 3)진태가 원래부터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관심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족만이 진리이고 구원이었기에 자신의 가족을 해하는 자는 공산주의거나 자유 자본주의거나 불문하고 적일 뿐이었다. 가족이기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갔기에 그의 적은 북한도 되었다가  남한도 되었다가 오락가락하지만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4) 인민의 영웅이 되다.

 대대장을 죽이고 귀순했다는 명분과 뛰어난 전투력으로 진태는 북한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다. 동시에 진태는 전쟁 미치광이가 되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국군은 진석을 보내 진태의 투항을 이끌어 내려고 작전을 펼친다. 결국 진석과 만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진태는 동생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 후 다시 총구를 북쪽으로 돌린다. 현실성은 떨어지는 듯한 결론이지만 가족이기주의에 충실한 결론이다. 

이처럼 가족이기주의를 끝까지 밀어 부치자 이데올로기나 국가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9. 형제의 탈주는 성공했는가?     

진태의 연인 명신도 죽고 이어 진태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음으로써 진석의 가족은 헤체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탈주는 실패했다. 이는 협소한 가족이기주의의 파산이기도 하다. 영화로서는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지만 냉정히 평가한다면 편협한 가족이기주의가 민주사회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 비추어 합당한 결론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보편적 이성을 강조한 동생 진석이 최후까지 살아 남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더 좋고 보람찬 사회 건설은 이성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는 영화의 의지로 보인다.       


 감독은 가족이기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한편의 장엄한 예술영화를 탄생시켰다. 블록버스터도 오락영화를 넘어 예술성이 충만한 작품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명작으로 평가된다. 천만 관객을 넘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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