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진리를 인식하는 수단이다.(귀납법)
이때의 경험은 순수 경험이다. 순수 경험이란 사물을 인식할 때 그 모습 그대로를 보고 듣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순수 경험을 부인한다. 경험도 왜곡된다. (게슈탈트이론)
아는 것이 힘이다. - 진리를 깨우쳐서 자연을 정복하자
그는 귀납법을 맹신하여 이를 사용하면 전 우주를 알 수 있고 인간에게 진정한 지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종족의 우상/동굴의 우상/시장의 우상/극장의 우상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설 부인하고 백지설 주장한다. 인간은 경험으로 백지를 채워가야 한다.
제1성질( 크기 형태 운동 정지 수)는 객관적이지만 제2성질(색 미 향 음 차가움 따뜻함)은 주관적이다. 따라서 제 1성질에 한해서 객관세계의 존재가 인정되며 객관적인 진리가 수립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3) 성선설- 사회계약설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과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 뿐이다. 사물은 모두 관념이며 지각되는 한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물리적 현상속에 있는 사물은 인간의 마음속의 지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2) 주관적 관념론
로크의 제1성질도 주관적일 뿐이다. 모양을 떠나서 색깔이 나타날 수 없다. 따라서 자연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객관성이 있어야 사물에 대한 진리가 성립하는데 모두 주관적이라 어떤 진리를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은 그 사물 내부로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객관세계는 부인된다. 모두가 주관 세계일 뿐이다.
진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경험론자) 그는 경험을 끝까지 밀고 나가 회의주의에 도달한다.
신은 경험해볼 수 없기에 존재치 않는다. 우리는 사과의 관념만 가지지 실제 사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물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정신적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버클리는 정신적 실체만은 존재한다고 했지만 흄은 이마저도 부인하였다. 사물들의 본질은 감각(경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관념이 있는가는 증명할 수 없다.버클리는 신 때문에 이런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도 감각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분 밖에 지각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의 다발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실체)를 부인한다.
3) 인과관계를 우리는 직관할 수 없다.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에서 불과 연기는 감각 경험할 수 있으나 나면...은 지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경험에 의해 인정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과 법칙은 필연법칙이 아닌 개연적 법칙이다. 인과관계라는 것은 습관에 의한 일종의 신념에 불과하다.
인식은 경험의 영역안에서 만 이루어져야 한다.(경험론) 세계는 물체, 운동, 수학 법칙으로 이루어 진다. 물체들은 물질(원자)로만 구성되어 있고 (유물론) 그것들은 기계적 형태 안에서 서로 작용 운동한다. 세계는 거대한 기계이다.(기계론) 우주의 모든 것은 신 조차 물체이고 물질적인 운동을 한다(유물론). 홉스는 이처럼 물체와 운동에 의해 전 우주를 파악하고 그들의 운동은 수학적 공식으로 진술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론자들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 감성적 육체적 존재(이기적 욕망적존재)라 규정한다. 또한 보편적인 것(이데아, 인간, 동물, 식물, 사회등)은 우리가 경험해 볼 수 없으므로 존재치 않으며 모든 것은 개별자로서만 존재한다고 본다.(유명론)
인간은 기계이다. 스스로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자동엔진 같은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는 이기적 존재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이므로 인생은 고독하고 추악하며 야만스러우며 짧다. 그러므로 인간은 강제력에 의해 관리해야할 이리와 같은 존재이다.(사회계약설 – 전부양도설- 전제군주정 옹호)
세계에는 신/ 정신/ 물체/의 세 가지 실체가 있다. 실체란 자율적 원리로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족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대상을 말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한 실체이다. 최초의 신은 이 세상에 일정한 운동량을 주었다.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이다. 물질(=육체=자연)은 연장 있는 실체이다. 연장이란 수학적인 부피와 길이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물체는 입자로 갖가지 형태로 결합한 것으로 형상이 없는 기계로서 순수하게 기계적인 고유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
정신과 물체는 서로 독립 무관계하다. 이로써 정신은 편견 없이 중립적인 태도가 가능하며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다. 이로써 정신에 의한 물질의 연구와 지배(자연정복)가 정당화 된다.
인간에게는 본유관념이 있는바 이를 이성의 직관과 추리에 의한 연역법으로 자연에 대한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제 1의 원리이며 모든 진리를 정초할 아르케이다. 이는 신으로 부터의 인간 독립선언서이다.( 나는 신을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폐기) 물체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함으로써 존재한다. 즉 존재는 의식됨으로 있음이다. 주체가 존재의 근원이다. 정신이 물질의 존재의 근원이다.
이로부터 연역해 나가면 세계에 대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라는 두 가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를 폐기한다.
우주는 단 하나의 실체로 이루어졌는바, 그 유일한 실체는 신이다. 신은 우주만물이고 우주 만물은 신이다. 모든 물체는 실제로는 하나의 위대한 전체이다.(범신론)
방패의 한쪽에서 보면 그 무늬를 볼 수 있고 반대편에서 보면 다른 무늬를 보듯이 실체도 한쪽에서 보면 그것은 연장을 가진 물체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그것은 사유를 가진 정신이라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연장이고 사유이며 신의 일부이다. 신즉 자연이다. 개개의 물체는 변할지 모르지만 우주 전체의 표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물체는 관련을 가지고 존재하며 모든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모나드는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말한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모나드는 원자, 입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원자나 입자는 물질이기 때문에 이론상 계속해서 더 쪼개질 수 있다. 그러나 모나드는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모나드는 단순한 실체, 생명체, 영혼, 정신처럼 더 이상 나눌 수가 없다.
모나드는 진화한다. 모나드에는 등급이 있다. 물건을 품질에 따라 상품과 하품으로 나누듯이 모나드도 우열을 구분할 수 있다. 실신한 상태나 꿈을 꾸는 사람이 가지는 지각과 같이 모호한 상태의 모나드는 이성적 고양으로 명확하고 판단력이 확실한 우월적 모나드로 진화한다.
우주의 궁극적 존재는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작용과 반작용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운동을 발생시키는 최초의 원인은 결코 규명할 수 없다. 한 가지 원인을 밝혀내면 그것은 또 다른 원인으로 소급되고, 이 과정은 무한히 되풀이된다. 따라서 어떤 이유도 필요로 하지 않는 충분한 이유는 우연한 사물들의 계열 외부에 존재해야 하고, 이 계열의 원인이며 자신 안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필연적 존재인 실체만이 우주의 궁극적 존재를 설명해줄 수 있다. 이 사물의 최종 근거를 라이프니츠는 신(神)이라고 부른다.
우주는 신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최고의 완전한 질서 속에 세팅되어 있다. 완전한 것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우주는 창조될 당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장래에도 완벽한 질서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예정조화를 통하여 모든 사물들이 우리들의 기대를 능가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설명이다.
경험은 객관성은 인정되어 내용있는 실질적인 지식이나 필연성 없는 개연적 지식이다. 이성은 필연성과 보편타당성은 인정되어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으나 현실적 실재성이 없다. 이성론은 독단론으로 흐를 위험성 있으며 논리성만으로는 공허하다. 인간은 감성형식(시간 공간)과 오성형식(12범주)의 선험적 틀에 후펌적인 감성과 오성으로 인간만의 세계를 구성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물자체의 세계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사과의 모습이 잠자리도 두더지도 곰도 호랑이도 똑같이 보인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실제 사과의 모습(물자체)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인간만의 사과모습(현상)을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구성한 세계인 현상의 진리만 알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신을 물리치고 자연의 입법자로서 인간만의 형식을 가지고 인간만의 세계를 본다.(근대 인간 주체 확립)
자연의 현상 속에 자연 법칙이 있듯이 인간의 마음속에 도덕법칙이 있다. 이는 명석 판명한 사실, 즉 자명한 사실로서 증명을 요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은 자연 필연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 인과계열을 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존재 이다. 따라서 인간은 도덕법칙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이는 인간으로서 자명한 의무이다.
칸트 이전의 최고 선은 행복, 쾌락, 신, 자연등이라고 주장되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칸트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최고 선의 개념을 제시한다. 최고선은 무엇을 위한 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이어야 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 선이어야 한다. 행위의 결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선이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그는 지성이나 판단력 같은 인간의 이성적 기능 또는 용기나 담대성 같은 인간의 성품 따위를 배제한다.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선한 것이고 상황에 따라 제한 받기 때문이다. 부귀, 명예, 쾌락,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주로 행위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행위의 결과에 따라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주체는 자아라고 결론 내린다. 자아는 자유이고 자기의지로 행동하는 것이며, 자유롭고 창조력을 가진 원리이다. 자아야 말로 신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 이다. 우주에 있는 것은 모두 영적이다(절대적 관념론)
현실세계는 정신 또는 영혼의 세계이며 생명 없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다. 데카르트 칸트 로크 조차도 우주에는 정신과 물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피히테는 물질계의 존재를 부인한다. 우주만물은 정신 영혼이며 세계는 단지 물질적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질의 세계는 자아(自我)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장소로 만들어져 있다.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없으면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신은 비아(非我)의 세계를 만들었다. 이 속박과 대립하는 세계가 있기 때문에 자아는 싸우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자아와 비아의 대립은 종합으로 고양된다.
헤겔은 순수한 논리적 방법(신 존재의 증명등)을 배격하고 현상으로부터 본질을 탐구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방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전쟁(현상)을 보고 절대정신의 실현(본질)이라 해석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상과 본질이 일치될 때 (절대인식에 도달할 때 까지) 진정한 진리에 도달한다. 즉 주관과 객관 변증법적 과정으로 주관과 객관이 일치할 때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전체세계는 자연에서 신에 이르는 정신의 발전 과정이다. 인간의 정신안에서 발견되는 과정들이 자연 안에서 똑같이 발견된다. 자연안에서는 이 운동이 무의식적으로 진행된다. 씨앗은 꽃이 되려 한다. 자연은 이러한 모순상태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극복하고 하나의 전체 안에서 또는 통일적으로 이들 모순되는 것들을 조화시키려 한다. 세계는 하나의 전체이다. 진리는 전체이다. 전체로서 세계안에 이성적 원리가 활동한다.
정신은 모든 곳에 있다. 이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사유이며 사유의 법칙에 종속된다. 자연과 인간은 이 전체 속에서 하나이다.
신은 이념이다. 신 역시 부동이 아니라 발전해 나가는 신이다. 신은 세계의 창조적 이성이며 세계안에서 자신을 외화하고 세계가 발전을 통해서 전개될 때 자신을 잘 알게 된다. 인간에게 신은 가장 확실한 자의식에 도달한다.
헤겔의 신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세계와 함께 발전하는 것 즉 신은 발전하고 있는 신이다. 신은 세계에 살아있고 운동하는 이성이다. 세계는 완전한 실현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인정 투쟁”이다. 연애역시 인정투쟁이다. 인정투쟁에서 생명을 건 사람은 주인이 되고, 승리 아니면 죽음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자 노예가 된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신분을 말하는 것 아니라 실존방식을 상징하는 은유법이다. 주인 삶의 본질은 향유이고 노예 삶의 본질은 노동이다.
인정투쟁의 결과 주인과 노예로 나뉜다. 주인은 자립의식의 대자존재이나 노예는 비 자립적 의식의 대타존재이다.( 1단계- 자기중심성에 기초한 타자 부정성 ) 그러나 곧 주인과 노예는 자각을 하게된다. 주인은 노예없이 살 수 없다. 노예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주인은 노예의 노예임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노예는 자신이 없으면 주인도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노예는 주인의 주인임을 깨닫게 된다. 이로서 기존의 관계 역전된다.(2단계- 타자 중심성에 기초한 자기 부정성) 이로써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이 된다. 이는 완전한 인간관계로 나아가는 도약의 과정이다. 이러한 두 자각이 공유되고 전유 될 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된다. 마침내 상호인정의 단계(인륜적 관계)에 도달한다. (3단계- 지기 부정성에 기초한 자기 긍정성(역설적인 상호인정))
이는 서로가 서로의 노예가 되어 봄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주인이 된다는 역설이다. 섬기는 주인이자 섬김 받는 노예라는 역설이 사랑의 진리이다. 이것이 인륜적 사랑이다.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이기 때문이다.
인간 삶의 진리는 역설이다. 이로써 나인 우리, 우리인 나의 공동성의 관계로 발전된다.
세계는 물질뿐이다. 정신도 물질이다. 정신은 물질세계의 반영 모사 촬영이다. 모든 물질은 운동한다. 순간의 정체나 고정은 없다. 원자도 불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 모든 물질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 내적 모순이 바로 운동의 원인이다. 인력과 척력 입자와 파동등이 서로 모순관계이다. 내적모순의 특징은 상호의존과 상호 부정 대립이다.
모든 대립물은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이른바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법칙이다. 결국 부정의 부정으로 모순관계를 극복한다. 이를 지양이라 한다. 세계는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즉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연관되어 있다. 개개의 제 현상과 제 과정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될 수 없도록 결부되어 있다. 내용은 형식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은 내용의 존재양식 내용조직이며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내용의 구조이다. 내용과 형식은 서로 이행한다.
역사의 근본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다.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경제적 상황(물질 하부구조)은 인간의 의식(정신, 상부구조)을 규정한다.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 감성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