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세계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그들의 시각의 틀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세계를 움직이는 궁극적 근본적인 원리는 있을까?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존재자는 실재하는 것일까? 현상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어떤 질서(낮과 밤 계절의 반복)가 있다. 세상이 이렇게 평화롭고 조화로운 것은 그 배후에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현상경험계)는 볼 수 있는데 원인(배후의 실재)은 볼 수 없다. 따라서 원인을 파악하려면 이성에 의거할 수 밖에 없다.
철학자들의 이런 의문과 나름의 해법을 가지고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유(이성)의 논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철학의 시작이라 여겨진다.
이들은 유물론적 입장에서 만물의 근원( 원질, 아르케-Arke)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1) 탈레스- 물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구는 물 위에 놓여있는 평평한 원판이라한다. 사실상 실재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단일(-)이라는 것이다. 현상은 다양하고 복잡해도 근원은 단일한 단 하나라는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2)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은 Apeiron(무 규정자/ 무 한정자)이라 한다.
3) 아낙사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은 공기라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은 전제사실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이론적 논리적(이성의 눈으로 )이끌어 낸다. 이들은 신화적 세계관 탈피하여 인간의 사유(이성=로고스)로서 세계의 원리를 규명하려 한다. 즉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너머 본질을 보려.(본질주의 합리주의의 시작)한다.
1)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동일률/ A=A)
2)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모순률 /A는 非A가 아니다.)
2) 존재는 존재 하면서, 존재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중률A는 A 이거나 非A이다.)
3) 존재는 말해 질 수 있고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존재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존재는 말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1.만물은 영원불변한다.
무(無)에서 유(有)가 발생할 수 없으므로 생성은 없다. 유(有)가 무(無)로 소멸되지 않으므로 소멸도 없다. (이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입증) 따라서 세계는 시초도 끝도 없다. 시초가 있다면 무에서 유가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세계는 영원불변한다.
2. 운동 변화는 있을 수 없다.
운동을 하려면 진공(허공=무)이 있어야 하는데 무는 없기 때문이다. 이 학파의 제논은 아킬레스와 거북. 당신은 운동장을 건너 갈 수 없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 등의 역설을 통해 운동 변화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3. 실재는 복수가 아니라 하나이다. 복수가 가능하려면 진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4. 눈에 보이는우리의 현실은( 감각 경험계)은 미친 환상의 세계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생성 변화 운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아무것도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똑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 갈 수 없다”며.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라고 강조한다.
세계는 대립된 것(선 과 악, 행복 과 불행, 전쟁과 평화,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 그러나 상관적으로 대립된 것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주장한다. “ 만물은 투쟁을 통하여 생성되고 소멸된다” 따라서“투쟁이 사라진다면 만물이 사라진다.”“물은 결핍이며 과다이다.”“선과 악은 하나다”“바다는 가장 깨끗하면서도 더러운 물이다.”
엠페도클레스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결합 절충하여 생성과 소멸은 없지만 변화는 있다고 결론낸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흙, 물, 불, 공기라는 4원소설을 제시하며 운동 변화의 원인은 사랑과 미움이라 주장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작은 원자의 결합과 분리로 만물이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개 지지 않으며 생성도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다. 또한 원자는 더 이상 분할되지 않으며 영원히 증감이 없이 우주를 떠돌아 다닌다. 원자는 그 자체가 운동하고 스스로 움직여 다른 원자와 결합한다.
이러한 원자론은 영원 불변하는 실체(원자)를 상정 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유물론 완성이라 볼 수 있다. 원자는 영혼 없는 순수한 물질이므로 이들에 의하면 자연은 생명없는 기계인 셈이다 (기계적 자연관)
피타고라스는 본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질료들은 불명확하고 매우 혼돈스러우며 인식될 수 없는 상태인데 이 질료에 수의 원리가 적용되면서 비로소 세계가 명확하고 구체적인 어떤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원리로 수는 질료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수, 색깔, 시간, 공간, 보편자, 존재, 로고스등도 어떤 개별적 사물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피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수는 위대하고 완숙하며 모든 작용을 다하여 하늘과 인간의 삶의 근원이고 지도자이며 모든 것에 참여 하는 것은 수의 힘이다. 이 수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한계 지워지지 않고 불명확하며 볼 수가 없다.”
이처럼 피타고라스학파는 본질을 물질에서 찾지 않고 물질을 초월해 있는 추상적인 원리와 법칙으로부터 아르케(근원)를 이끌어 내려 하였다.
음악에서 음의 높낮이와 현의 길이가 수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화음을 이루는 음들 사이의 관계가 수의 법칙을 따른다. 온 우주가 수학적 질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구조 전체가 음계(조화)이다. 인간도 수의 조화가 어긋나면 병이 생긴다.
원본 없이 사본 없는데 현상계에는 완벽한 존재가 없다. 현실에는 완벽한 원, 삼각형이 없는데 완벽한 원의 이데아는 수학자의 머릿속, 즉 이념에 있다. 그러므로 완벽하고 영원한 세계인 이데아가 존재한다. 이처럼 이데아는 현실에 없으므로 감각경험으로는 알 수 없고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경험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 모방(분유설)에 불과하다. 가짜의 세계이다. 현상계(물질계)의 원인은 이데아계(관념)이다. (관념론)
인간은 동굴에 갇혀있어 이데아는 못보고 그림자만 보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동굴의 비유) 국가의 임무는 국민들을 이데아계로 인도하는 것이다.(이상국가론) 따라서 철학자가 국가지도자가 되어 이데아로 인도 해야만 한다.(철인정치론)
이러한 이상국가에 가려면 인간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주덕을 지켜야 행복할 수 있다. 즉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행복해 질 수 있다.
플라톤은 형상(이데아)과 질료는 분리되어 있다 주장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함으로써 플라톤이 가짜라 했던 현실세계를 진짜로 구출해 냈다. 다만 질료는 형상이 터 잡는 자리일 뿐이다.(관념론)
존재의 단계구조가 있다. 제1질료는 4원소(불 불 흙 공기=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 수용)로 구성되어 있고 어떤 형상을 받느냐에 따라 무기물->식물->동물->인간->순수형상(신)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순수형상, 즉 신은 부동의 원동자이다. (기독교 철학에 영향)
만물의 존재와 운동에는 원인이 있다.(4원인론-형상인 질료인 능동인 목적인) 우연적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 원인 능동인을 가진다. 이처럼 능동인의 필연성을 규정하는 원리를 인과율이라 한다.
존재는 더 높은 존재를 지향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목적론적 세계관) 형상은 질료의 목적, 질료는 형상의 수단이다. 질료와 형상은 상호 이행한다. 존재는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로 이루어져 끊임없이 자신보다 높은 형상을 목적으로 그 형상을 향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운동하는 거대한 목적의 세계이다. 이처럼 운동은 질료가 형상으로, 가능태가 능동태로 변하는 것이다. 이로써 파르메니데스의 운동불가론을 극복한다.
지식은 다양한 지각 감각들로 알 수 있다.(경험론) 그런데 감각 지각은 사람마다 다르다(객관성 없음). 또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 방도도 없다. 이처럼 지식이란 개인에게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진리 상대주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것을 파악한다 해도 그것은 전달될 수가 없다. 그는 주장한다.
“우리는 단어를 전달하지만 단어란 단지 상징이나 기호이며 상징과 그것이 상징하는 사물자체와는 동일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의가 정의로운 생활보다 도움이 된다. 불의를 성격의 결함으로 간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불의한 사람을 성격과 지성에 있어서 매우 우월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정의는 얼간이에 의해 추구되며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인간이란 무한하게 자기 자신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곧 힘이 정의이다.
우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은 상반하는 인상을 주고 사람에 따라 생각도 달라진다. 경험론이자 회의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1) 만물의 근원
만물의 근원은 불이며 모든 것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신도 물질적으로 해석한다. 즉 신은 불, 힘, 로고스, 이성이며 만물에 내재한다.
2) 이성의 질서로서 세계
물질은 자체속에 이성의 원리가 존재한다. 자연 전체, 인간사회도 이성의 원리로 가득차 있다. 인간사회는 섭리에 의해 (즉 신의 통제에 의해) 신의 의도대로 작동된다.
3) 숙명론
인간은 연극속의 배우일 뿐이다. 연출가는 신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역할이나 결말을 선택하지 못한다. 배역과 줄거리를 결정하는 것은 신이다. 배우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태도와 감정이다. 단역을 맡았다고 절망하는 것은 행복을 포기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감정에서 자유로운 경지(아파테이아) 소위 무관심에 이른다면 평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배역을 선택할 자유는 없지만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있다.
1)유물론
만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 수용) 세계는 원자들의 충돌에 의한 우연적인 산물이다. (기계론=목적도 의미도 없다) 스토아학파는 우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정신, 즉 이성의 산물이라 주장함으로써 에피쿠로스에 반대한다.
신은 존재치 않으므로 인간은 신에 대한 공포로 떨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으므로 죽음이 어느 누구도 괴롭히지 못한다.
2)인간은 이기적 존재(=경험론자)
이 세계는 물질만이 존재하며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 육체와 경험하는 현재의 순간 뿐이다. 감각이 진리에 대한 시금석이 되듯이(경험론) 감정은 선악에 대한 직접적인 척도가 된다.
즉 불쾌(손해) 고통은 악이고 쾌락(이익)이면 선이다.(이기적 인간관)
3) 최고선
인간은 쾌락추구를 본질로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규제할 수 있는 힘과 의무가 있다.
육체적, 물질적 쾌락은 더 큰 욕망만을 가져다 줄뿐, 우리를 결코 만족 시키지 못한다.
정신적 쾌락(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이 최고의 선이다.
1) 4단계 존재론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 현상의 이단계 존재론을 4단계로 세분화 한다. 이데아- 정신- 영혼 –물질로 세분화 하고 이데아를 일자(The one)로 바꾼다. 일자는 절대적 초월적 완전한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정신(NOus)은 물질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세계정신을 말하고 영혼(psyche) 사물을 살아있게 하는 영혼인데 정신의 복사물이며, 마지막으로 가장 낮으며 불완전한 물질이 있다한다.
2) 유출설
정신과 영혼 물질은 모두 일자가 흘러 넘쳐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 이로써 플라톤의 난점이 극복된다. 플라톤은 왜 가짜인 현실세계가 존재하는지 설명하지 못했으나 플로티누스는 이를 유출설로 해결한 것이다.
3) 자유의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물질 영혼 정신에서 일자로 이동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욕망과 본능에 몸을 맡기면 물질의 세계로 타락하지만 지적 도덕적 노력을 통해서 일자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개별자(홍길동, 봉준호, 박찬욱)들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의 상위개념인 인간(보편자)가 존재하느냐? 또 토끼 코끼리 사자등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의 상위개념인 동물(보편자)은 존재하는가? 이는 원죄설, 구원, 삼위일체론의 타당성, 교황청의 위상을 두고 중세 수백년을 이어온 논쟁이었다.
1)보편 실재론
보편자는 개별자와 독립해서 실재한다고 한다. 보편자가 존재치 않으면 어떻게 홍길동, 봉준호 박찬욱이 각각 다른 사람인데 공통된 성질을 지닐 수가 있겠는가? 보편자로부터 그 성질을 분유받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보편자가 아니라면, 또 예수님이 보편자가 아니라면 우리 개개 인간은 원죄설이나 구원과는 무관하게 된다. 이들이 보편자라면 우리의 원죄설이 인정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 모두 구원 받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일치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편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보편은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교회권력을 억누르고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컸다. 로마 교황청 만이 보편교회라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보편실재론에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2) 유명론
보편자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뿐이라는 주장이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고 종교개혁이 불을 지필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소위 오컴의 면도날 이론은 유명론의 선봉에 선다. 실재론은 교회 공동체 전체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지만 유명론은 사회 유명론으로 계승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발전한다.
3) 양이론을 절충하는 견해
보편자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재론처럼 개별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는 개별자 안에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개개의 질료속에 들어 있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실재론이 “하늘에 계시는 주님” 이라면 이 견해는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될 것이다.
1) 불필요한 실재를 덧 붙이지 마라(진리는 단순 명쾌하다)
오컴은 어떤 것을 설명함에 있어 불필요한 가정을 하지 마라 주장한다. 불필요한 것을 면도날로 싹뚝 잘라버려라는 의미로 면도날이론이라 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때로는 경제성의 원리, 절약성의 원리라고도 불린다. 즉 다른 모든 요소가 동일할 때 가장 단순한 설명이 최선이라는 뜻의 철학 용어. The simple is the best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과학계에서도 종종 쓰이는 표현으로, 결론이 최소한으로 간결하고 직관적이며 위배 사례가 없는 설명이 우대받는다. 뉴턴 또한 “같은 종류의 자연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능하다면 하나의 원리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실제사례
천동설 보다는 지동설이 단순하고 간결하다. 또 지상계와 천상계(에테르)의 운동원리가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해 지상계와 천상계가 동일 원리인 중력법칙에 의해 운동한다는 뉴턴의 설명이 더 간략하고 단순하다. 사과가 떨어지는 원리도 수성이 태양을 공전하는 이유도 모두 동일한 원리로 설명할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물리법칙이 있는 것 보다 하나의 물리법칙이 있는게 단순하고 진리이다.
3) 과학이론
세상에는 전기력(+전하 -전하), 자기력(N극, S극) 약력(방사선 붕괴를 일으키는 힘) 강력(쿼크를 묶어주는 힘) 중력(질량있는 물체들이 잡아당기는 힘) 이렇게 5종류의 힘이 있다. 이는 오컴의 면도날 원칙으로보면 부적절하다. 그리하여 이를 통합시키려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을 통일한(전자기력) 맥스웰 방정식을 제시한다. 이후 1970년대 와인버그는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일 시킨다. 이후 강력까지 묶는 대통일장 이론(아인슈타인)을 시도한다. 이후 80년대에는 중력까지 통일 시키기 위해 끈(string)이론을 제시하고 아직도 연구중이다.
왜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무신론은 신이 없기 때문에 악이 존재한다고 하고 유신론자들은 나름의 주장으로 신을 변호한다.
1) 에피쿠로스의 무신론 논증
만약에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만약 신이 악을 막지 못한다면 신능 전능하지 않다.
그런데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 않거나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이 악을 막으려 하지 않거나 막을 수 없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할까?
2) 맥키의 무신론 논증
신이 존재한다 가정하면 신은 전지전능하고 선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신은 악을 제거해야한다. 그런데 현실은 악이 있다. 이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모순된다. 따라서 신은 존재치 않는다.
1)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장하기 위해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그래 인간은 선과 악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행할 자유가 있다. 만약 악이 존재치 않는다면 인간은 선과 악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의지를 가질 수가 없다.
2)자연법칙의 일관성을 위해
중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그렇다고 중력을 없앨 수는 없다. 자연은 필연적 인과법칙에 따라 운동을 하기때문에 부수적으로 악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악은 인과관계의 필연적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고층에서 사람을 밀어버리면, 목을 조르면 등. 이처럼 악 또한 인과관계의 부수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과관계를 없앨 수는 없다. 그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므로.
3) 신의 섭리
개별적인 악들을 통해 전체적인 선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유다의 배신이 있었기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로 인해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 신은 가능한 모든 세계들 중에서 가장 선한 세계를 창조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가장 선한 세계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