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연습 ⑥ — 버티는 삶에서, 사는 삶으로
나는 오래도록 ‘내가 원하는 것’보다 ‘괜찮은 쪽’을 먼저 골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참는 게 익숙했고 상황을 먼저 보는 게 습관이 됐다.
그게 어른스러움이라고 믿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습관이 내 삶의 방향을 자꾸 늦춘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됐다.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일찍부터 몇 가지를 배운 사람 같았다.
“이건 내가 참아야겠다.”
“지금은 말하면 안 되겠다.”
“분위기를 깨면 안 되겠다.”
그런 마음이 먼저 올라왔다.
말보다 눈치가 먼저였고, 감정보다 상황이 먼저였다.
외로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 외로움을 말로 꺼내는 법을 몰랐다.
서운한 일이 생겨도 입술 끝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
그리고 혼자 결론을 내렸다.
‘그럴 수 있지.’
그 한마디로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렇게 나는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것을 먼저 선택했고,
내 감정보다 분위기를 먼저 읽었고,
내 속도보다 주변의 기준을 먼저 맞춰왔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도권을 잡기보다는 맞춰주는 쪽이었고,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쪽에 가까웠다.
갈등이 생기면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혼자 정리했다.
그게 어쩌면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정면충돌을 피하면, 관계가 깨지지 않을 것 같았고
내가 조금 손해 보면, 큰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습관은 시간이 지나도 남았다.
지금도 선택 앞에 서면 무의식적으로 먼저 묻는다.
‘이게 맞나?’
‘이래도 되는 걸까?’
질문이 늘 “내가 원하는 게 뭐지?”가 아니라
“이걸 해도 되나?”로 시작된다.
그래서 답답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답답함이 늘 따라다녔다.
원하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원하는 걸 묻는 법을 한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요구하기보다는 참았고,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상황을 먼저 봤고,
보호받기보다는 자리를 지키는 편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단단해졌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게 미덕이라고 배웠다.
참는 사람이 철든 사람이고,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 미덕이 가끔은 나를 오래 붙잡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전환이 필요해도 망설였고,
불편한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사람 관계는 판단을 더 늦췄다.
누군가의 기대가 보이면, 나는 내 마음보다 그 기대를 먼저 생각했다.
우유부단함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살아오면서 몸에 밴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실패를 크게 하지는 않았지만,
성공도 온전히 내 것으로 느끼기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자꾸만 불안했다.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을 거야”라는 감각이
이유 없이 늘 따라다녔다.
괜찮은 회사에 들어갔을 때조차 그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안정과 책임이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걸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내가 원하는 삶’은 더 멀어졌다.
IT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에도 비슷했다.
지인이 같이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을 때,
나는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내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에 부합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버티는 게 익숙한 사람은 쉽게 벗지 못한다.
그래서 전환하기까지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혼자 버텨오는 삶을 살아온 건 아닌가.
요즘은 종종 내 삶을 다시 돌아본다.
이제는 혼자 더 버티기보다는,
버티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옮겨가고 싶다.
내 마음을 억지로 누르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내 기준을 “괜찮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쪽으로.
이제는 혼자 더 버티기보다는,
버티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옮겨가고 싶다.
아침엔 눈을 떠도 마음이 급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낮엔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고, 그 일이 내 삶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주는 느낌이면 좋겠다.
밤엔 오늘 하루가 괜찮았다는 확신 하나를 품고, 편안한 기분으로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