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지?
20대 후반이 되고 스스로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가 있다.
그건 바로, 외모에 대한 집착이 옅어지는 것이다.
원래부터도 또래 친구들에 비해 꾸미거나 외모에 투자하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1일 10거울 정도는 했던 여성이었다 나도.
거울을 들여다보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하나밖에 없다. 뭐가 묻었을까 봐 (or 이런저런 털이 나왔을까 봐)
그런데 요즘은 1일 3거울 정도 한다.
아침, 점심, 저녁 먹고 양치할 때 보게 되는 화장실 거울을 통해서 내 얼굴을 3번 본다는 뜻이다.
영혼이 오랜 시간 몸 안에 갇혀있다 보면 '내가 나'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데, 1일 3거울을 할 때마다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와.. 나는 아직도 나구나?'
메이크업이 완벽하게 된 날 신나서 하루종일 셀카를 찍던 내 얼굴, 외모 칭찬 한번 들었다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던 내 표정, 너무 울어서 팔자주름이 선명해진 어느 날의 내 얼굴이 전부 스쳐 지나가며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여기에는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다.
왜 이렇게 짱구처럼 숯검댕이로 진하냐고 싫어했던 내 눈썹에서 아빠가 보인다.
크게 웃지 않아도 패이는 입가 보조개에서 엄마가 보인다.
가끔 휙휙 돌아서는 옆모습의 윤곽에서는 친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입술이 조금 더 도톰했더라면..'
'지금보다 5kg만 더 날씬했으면..'
나름 간절했던 외모에 대한 열망은 가시고 그리워하는 아빠의 모습을 닮은 나를 본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이 위선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와닿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내 얼굴에는 사랑하는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인정하기 싫지만 오빠의 모습도 있다.
가족을 사랑하는 한, 내 외모를 비하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행복과 압도적인 슬픔 앞에서는 내 외모는 하등 상관이 없다.
희로애락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줄 아는 내 그릇의 와꾸(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통통하다고 부끄러워했던 과거의 모습도 나 자신이라는 걸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친구들도, 회사 동료들도 더 넓게는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티비 속 연예인들도 모두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마를린 먼로가 했던 명언을 떠올린다.
최악일 때의 나를 감당할 수 없다면, 당신은 최상일 때의 나를 가질 자격이 없다.
(But if you can't handle me at my worst, then you sure as hell don't deserve me at my best)
지독히도 속상했던 3년이 지났다.
한 달 뒤면 아빠가 떠난 지 4주기가 된다.
그동안 얼굴에 그늘이 지고, 주름도 생겼다.
가족들이 전화를 바로 받지 않으면 불안해졌고, 또 누군가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대담함이라는 미덕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악일 때의 나를 감당해 냈다.
힘든 만큼 강해졌다. 너무 힘들면 포기했고 감당할 수 있으면 버텨냈다.
나는 앞으로 다가올 최상의 나를 마땅히 가질 자격이 있다!
가장 힘들 때 내 옆을 지켜준 이 시대의 둘도 없는 내가 있다.
이제 화장실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볼 때면 환하게 웃어줘야지.
+ ai가 관상도 봐준다. 난 참 재밌는 세상에 살고 있다.